제 2장 침전(沈澱)
그저 기억해 주는 것만이라도 좋아요.
제가 바라는 건 이것뿐이에요.
약속해 주실 수 있죠......?
그저 당신이 가진 기억의 한 부분에라도
자리잡을 수 있다면
죽어서도 행복할 수 있어요.
미소를 보여주지 않아도 좋아요.
그러니까 하나만은 약속해 주세요.
당신이 살아갈 무수한 시간 속에
제가 존재했었다는 걸
그저...... 기억해 주세요.
一.
화연은 오늘따라 이른 아침에 눈이 떠졌다. 아직 해도 떠오르지 않은 아스라
한 어둠에 잠긴 방안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둡지도 그렇다고 확연히
모든 것을 볼 수 있을 정도로 밝지도 않았다.
그렇게 희미한 이른 새벽의 방 안에서 화연은 기이할 정도로 설레이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숨을 골랐다.
대체 무슨 일이지?
화연은 의문을 속으로 삼키며 이불을 걷어올리고 일어나 앉았다.
그렇게 앉아있기를 수십여 분. 어느새 먼동이 터오고 있었다. 하얀 문풍지 사
이로 엷은 아침 햇살이 비쳐들어왔다. 아스라하게 잠겨 있던 어둠을 몰아내며
그렇게 햇살은 아침을 부르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화연의 마음을 점령하고
있던 기이한 울림도 사라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화연은 검은 옻칠이 된 네모진 손거울을 꺼내들고 머리를
정돈했다. 어머니가 남기신 유일한 유품인 그것은 어머니도 할머님께 받았다
고 하는 오래된 물건이었다. 할머니에게서 어머니에게로 그리고 다시 자신에
게로 전해진 그 물건에는 손때가 묻어있어 검은빛이 바래 있었다.
낡긴 했지만 거울에는 꽤 고급스러운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노련한 장인의
솜씨인 듯 거울 뒷면에 새겨진 매화 문양은 무척이나 정교했다. 거울의 면
역시 화연이 매일같이 정성들여 닦았기에 먼지한점 묻지않은 투명함을 보여
주었다.
작은 손거울에 비친 화연의 얼굴은 작고 말라 있었다. 하지만 그 작은 얼굴에
오목조목하게 자리잡은 오관은 그녀의 성품을 말해주듯 곧아 보였다. 빗으로
곱게 머리를 빗어내리며 화연은 손에 익은 거울에서 어머니의 온기가 느껴지
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 화연아. 어서 나가자."
밖에서 오라버니가 화연을 부르고 있었다.
" 네. 지금 나가요."
밝게 대답하며 화연은 방문을 열었다. 작은 마당에서 나무 넝쿨로 엮은 바구
니를 등에매고 있는 오라버니 비영의 듬직한 얼굴이 보였다.
예전에는 항상 글을 벗삼던 오라버니의 유약했던 얼굴이 언제 이렇게 듬직하
게 변했는지 화연은 잠시 옛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그저 5년의 세월이 지났을 뿐인데도 벌써 10년도 더된 일처럼 느껴졌다. 아버
님이 돌아가신 것도 남매 둘만의 생활이 시작된 것도 그 무렵의 일이었지만
지금은 너무나 아득하게 느껴졌다. 이제 자신이 걸치고 있는 옷은 더 이상 비
단이 아닌 싼 포목이었지만 그것조차 이제는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집안이 몰락하지만 않았더라도 오라버니는 약혼녀와 혼인해서 벌써 한 일가
를 이루었을 나이였지만 비영은 집안이 기울어짐과 동시에 그 모든 것을 잃
고 나서도 아무런 불만없이 동생인 화연을 돌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화연은
그런 비영이 너무나 고마웠다.
" 오늘은 구절초를 따도록 하자. 마침 오늘은 날도 맑고 하니 찾기가 어렵
지는 않을거다."
" 네. 오라버니."
막 신발을 신고 마당으로 내려선 화연은 또 다시 밝게 웃어보이며 앞서가는
비영의 뒤를 따랐다.
* * *
" 오늘은 운이 좋군요."
벌써 반 이상이나 보라색의 꽃잎을 가진 구절초로 채워진 바구니를 보며 화
연은 흐뭇한 미소를 떠올렸다.
바구니가 다 찰 정도로 구절초를 모으기만 하면 보름 정도 생활할 수 있는
돈을 벌 수가 있다.
" 잠시 쉴까?"
비영은 바구니를 바닥에 내려놓고 나서 바닥에 주저 앉았다. 이마에 흐른 땀
을 손으로 훔쳐내던 화연은 문득 시원한 물 생각이 간절해 졌다.
여기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계곡이 있었다.
" 오라버니. 저 잠시 계곡물에 손좀 담그고 올께요."
" 그래라. 예상보다 시간이 덜 걸렸으니 한참 쉬다와도 괜찮겠다."
투박한 미소를 떠올린 비영을 뒤로하고 화연은 부지런히 계곡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넓게 드리워진 나무 그늘을 지나쳐 한참을 걷자 귓가에 맑은 물소리
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화연의 눈에 시원하게 흘러내리는 꽤 넓직한 계곡이 들어
왔다. 화연은 커다란 돌을 넘어가며 계곡의 가장자리에 발을 딛었다.
작은 소리를 내며 흘러가는 계곡물은 얼음장처럼 시원했다. 물속에 손을 담그
자 땀이 다 날아가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동안 물에 손을 담그고 있던 화연
은 치마를 무릎까지 걷어 올리고 매끈한 종아리를 드러낸 채 물 속으로 몇걸
음 걸어들어 갔다. 발바닥에 닿는 돌의 감촉을 느끼며 화연은 물 속을 거닐었
다. 이순간 만큼은 자신이 이제 더 이상 방안에 갇혀 살아야 할 규수가 아니
라는 것에 감사하며 화연은 마음껏 시원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때였다. 화연은 갑자기 온몸을 엄습하는 위화감 때문에 움직임을 멈추고 주
위를 둘러보았다. 위험스러울 정도의 느낌은 아니었지만 무언가 압도하는 듯
한 중우함 같은 것이 계곡안을 감싸고 있었다. 그때문이었을까. 분명 깊은 산
이라면 당연히 들려왔어야 할 새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것은.
그리고 화연은 볼 수 있었다. 계곡 전체에 그늘을 드리울 정도로 거대한 천년
수의 기둥에 기대어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을.
천인(天人) 이라도 하강한 것일까. 조용히 눈을 감은 하얀 얼굴에 드리워진
엷게 흔들리는 그림자와 숲에 동화된 듯이 보이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모습.
등을타고 흘러내린 윤기있는 검푸른색의 머리카락은 그의 흰 얼굴과 대조되
어 더욱 뚜렷하게 화연의 눈을 잡아 끌었다.
그리고 그의 온몸을 감싸고 있는 검은색의 파오는 귀족들이라도 만져보기 힘
들정도의 고급스러운 비단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화연은 숨을 삼키며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조금전까지 느껴지던 위화감은
어느샌가 오늘 새벽에 느꼈던 설레임으로 바뀌어 있었다.
" 화연아. 오늘은 왜 그리 서두르지? 산에 숨겨둔 보물이라도 있는 모양이
구나."
웃음띤 비영의 말에 그저 싱긋 웃는 웃음으로 답하며 화연은 빠른 걸음으로
산을 올랐다.
요 며칠새 화연은 매일같이 계곡을 찾았다. 그녀가 계곡을 찾는 이유는 단 하
나. 언제나 그곳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였다.
한번도 그가 깨어난 모습을 본 적은 없지만 인적이 드문 산속에서의 생활에
나타난 비영이외의 남자는 화연에게 있어 관심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
때문이 아니더라도 인세에 머물 것 같지 않아보이는 그의 전신에 떠도는 신
비함이. 그리고 자연과 동화된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그의 모습이 그녀의 발길
을 부르고 있었다.
꽤 험한 산길이었지만 화연에게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반시진 정
도를 걸어서 계곡에 도착한 화연은 깊게 숨을 내쉬며 천년수의 기둥으로 고
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곳에 남자의 모습은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나왔다.
언제고 떠날 수 있다는 것을 왜 몰랐지....
화연은 자신을 질책하며 바닥에 주저 않았다. 조금전 까지만 해도 힘든줄 모
르고 올랐던 산길이었지만 지금은 일어설 수 조차 없을 정도로 지쳐 있었다.
여전히 계곡물은 맑은 소리를 내며 흘러내려가고 있다.
" 구절초에는 약재 이외의 다른 효능도 있습니다. 구절초의 잎은 귀한 약재
로 쓰이지만 꽃잎에는 기억을 떠올리게 해주는 효능이 있습니다."
낮게 울리는 부드러운 목소리.
화연은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깊이 가라앉은 편안한 어둠이 담긴 눈동자가
그곳에 있었다.
늘 감겨있던 그 눈에는 어떤 빛이 담겨있을까 궁금해 했었지만 직접 마주대
한 그의 눈에는 말을 잊게 만드는 중우함이 있었다.
" 모르는 사람이 더 많지만 갓 따온 구절초의 꽃잎을 뜨거운 물에 띄워 마
시면 그날 밤에는 반드시 그리운 사람이 꿈에 나타난다고 하지요."
그렇게 말하며 그는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를 떠올렸다. 분명 아주 작은 미소
에 불과했지만 그의 미소는 잔잔하게 얼굴전체에 퍼져나갔다.
" 전.... 과거를 그리워 하지는 않아요."
화연은 겨우 입을 떼어 그렇게 말했다.
남자는 아무말 없이 화연의 옆에 앉았다. 부드럽게 흔들리는 그의 머리카락에
서는 옅은 백화향이 풍겨왔다.
" 전 1년에 보름정도 이곳에서 머물죠. 이 근처에 살고 있나요?"
화연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저..........이름을 가르쳐 주실 수 있나요.......?"
한참을 망설인 후에야 화연은 겨우 그의 이름을 물을 수 있었다.
" 훼이...그게 제 이름이죠."
화연은 귓가에 울려퍼지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가슴속에는 훼이라는 이름이 작게 물결치듯 울려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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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도새도 모르게 1장이 끝나고 2장이 시작되었네요....^^
흑룡의 숲은 에피소드 형식입니다. 그래서 내용은 시공을 넘나들며(?) 진행되죠.
시간의 순서와 전개도 순차적으로 진행되지 않습니다.
이런 동양물은 맘에 들지 않으시나요? 그치만 전 이런식의 동양물을 상당히 좋아
해서요. ^^ (뒤에가면 전투장면들도 많이 나오지만 지금은 안나와요..)
그치만 읽어주신 분들이 생각보다 많아서 기분이 좋네요. 단 한분이라도 좋다고
생각해 주신다면 전 행복할 것 같아요.... 그러면 읽어 주셔서 감사...
번 호 : 486 / 3334 등록일 : 1999년 06월 13일 22:16
등록자 : 까망포키 이 름 : 포키 조 회 : 337 건
제 목 : [연재] 흑룡의 숲 제 2장 二.
흑룡의 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