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룡의 숲-5화 (5/130)

제 2장 침전(沈澱)

二.

" 이제.... 돌아가시나요?"

화연의 음성에는 옅은 망설임이 배어 있었다.

하지만 그 망설임은 말이 되어 그에게 전해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저

처연한 미소만을 떠올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훼이는 그녀의 손가락에 청옥(靑玉)으로 된 반지를 끼워 주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오른손을 휘둘러 공간을 열었다.

훼이의 머리카락 한 가닥까지  사라지고 나서야 화연은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낼 수 있었다. 눈을 감으면 그의 모습이 금방이라도 사라져 버릴 것 같았

기에 화연은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난 후에야 그의 모습을 눈에 새기

듯 눈을 감았다.

말....... 안하는 편이 더 나은 일이겠죠?

당신은...... 내게 다가온 당신은 하늘에 계실 귀한 분이시니까요.

말은 안했지만 느끼고 있어요. 이제 당신이 내게 돌아올 날은 아주 먼 어느날

이라는 것을요.

전 그냥 이곳에서 살아가야 겠지요.

당신이 제게 남겨준 가장 큰 선물과 함께.

아이에겐 당신의 이름을 붙여주고 싶어요. 그 이름을 부를때마다 당신을 떠올

릴 수 있게.

비(飛)...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아요.........?

화연의 왼손에 끼워진 반지에서는 그의 온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            *            *

하계는 많이 변해있었다.

화연이 살고 있던 인적이 드문 산 속에도 마을이  들어서 밥 짓는 연기를 하

늘로 피어 올리고 있었다. 예전의 그곳은 사냥이나  약초를 캐러 다니는 사람

들만이 들어오곤 했었는데 인간이란 참으로 많은 것을  변화 시켰다. 이제 또

세월이 흐르면 훼이가 즐겨 찾던 그 산도  인간의 마을을 품고 있는 작은 뒷

산정도로 여겨질 지 몰랐다.

1년만 이었다. 훼이는 이렇게 오랫동안 화연의 곁으로 돌아오지 못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차기 흑룡왕 후계자를  택할 때

까지는 어느 누구도 영지 밖으로 나가서는 안된다는 엄명을 내렸다.

흑룡일족에게 있어 흑룡왕의 말은 곧  법. 그리고 그것은 훼이에게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천계에서의 1년은 하계에서의 10년. 용족에게 있어서는 극히 일순의  짧은 시

간에 불과했지만 인간들에게 있어 10년이란 길고도 긴 시간이었다.

화연의 집에서도 저녁을 준비하는 긴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훼이는 오늘만큼은 공간을 열고 그녀의 앞에 나타나고 싶지 않았다.  처음 그

녀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때처럼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말을 걸고 싶었다.

작고 아담한 화연의 집은 그동안 몇번의 보수를 한 듯 손이간 흔적이 엿보였

다. 곧게 세워진 나무 울타리 사이에는 이름 모를 작은 풀들이 자라나 있었고

황토로 덮인 작은 안마당에는 말리기 위해 늘어놓은 약초들이 놓여 있었다.

그 세월속에서도 그 정경만은 변함이 없었다.

누런 초가 지붕으로 덮힌 소박한 집은 훼이의 방 보다도 작았다.

훼이는 익숙한 발걸음으로 화연의 방문 앞에 섰다. 별다른 가구하나  없던 그

녀의 방은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 였지만 훼이에게는  그런 것들 조차 그녀의

일부로 그립게 다가왔다.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그는 누렇게 빛이 바랜  문풍지로 덮힌 방문을 열었

다. 분명 화연은 그 작디작은 얼굴을 환한 미소로 채우며 자신을 맞이할 것이

다.

하지만 방안 어디에도 화연은 없었다. 뭔가 이상했다.

방안에 화연의 체취조차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에 당혹해하고 있을 때 훼이는

방 한구석에 비스듬한 자세로 누워서 자고있는 어린 소년을 발견했다.

이유모를 전율이 온몸을 감싸며 피어 올랐다.

검은천을 길게 잘라 대충 동여맨 머리카락에서, 오목조목하고  작은 옆얼굴에

서 화연의 모습이 엿보였다. 그리고.....  투명할 정도로 흰 피부는  바로 훼이.

자신의 것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훼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망연하게 소년을 응

시할 뿐.

" 비야. 밥먹어라."

문을 열고 들어선 비영은 방안에 앉아있는 낯선  남자를 보고 흠칫하며 놀랐

다. 아니, 그것보다 그의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이름모를 위압감에 자신도 모

르게 몸을 떨었다.

훼이의 눈이 천천히 비영에게로 향했다. 그는 비영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화연. 그녀의 하나뿐인 오라비가 아니던가. 화연은  언제나 자신 때문에 깊은

산속에서 촌부로 파묻혀 지내야하는 오라버니에게 미안함을 품고  있었다. 자

신이라는 짐이 없었다면 집안은 몰락했어도 분명 학자로 대성했을 거라며.

화연에게 이야기를 듣고 훼이는 먼 곳에서 그를 지켜보았다. 그때의 그에게는

확실히 기품이라고 부를만한 것이 풍겨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세

월이라는 무게에 짓눌린 투박한 촌부의 모습에 지나지 않았다.

한동안 훼이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에  몸을 떨던 비영은  천천히 몸을 굽혀

훼이의 앞에 앉았다. 그리고 나서 예의바르게 깊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비

영은 그순간만큼은 예전의 귀공자의 모습으로  돌아간 듯이 느껴질만큼 기품

이 있었다.

" 비의...... 아버지시군요. 범상치 않은 분일거라 생각했지만 이토록 고귀하

신 분인줄은 몰랐습니다."

훼이는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 화연은 이제 없는 것이군요."

" 네. 비를 낳고 바로 눈을 감았습니다.  편지 한 장과 손가락에 끼고 있던

청옥 반지를 남기고 말입니다."

훼이는 비영이 건네주는 화연의 유품을 받아들었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끼워

주었던 반지는 다시 훼이의 손으로 돌아왔다.

곱게 접힌 빛바랜 화선지에는 깨알같이 작은 글씨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흐

트러진 글자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곧고 바르게...

한동안 편지를 읽는 훼이를 조용히 바라보던  비영이 결심한 듯이 말을 꺼냈

다.

" 비를 데려가 주십시오. 비는 이곳에 남아 있어야 할 아이가 아닙니다."

훼이는 화연이 남긴 말들을 가슴속에 새기며 다시 편지를 접었다.  정성을 담

아 곱게 편지를 써 내려가고 접었을 그녀의 모습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 그렇게 하겠습니다. 비는 흑룡의 피를 이어받은 제 아이니까요."

훼이의 말이 떨어지자 비영은 크게 놀란 듯 숨을 삼켰다.

그리고 다음날. 훼이는 비와 함께 천계의 흑룡궁으로 돌아왔다.

*            *            *

" 저... 훼이......."

귓가에 울리는 유에린의 딱딱하지만 맑은  목소리. 훼이는 일부러 눈을  뜨지

않았다.

아직 그녀를 떠올리는 시간 속에 머물고 싶었기에.

비를 데리고 흑룡궁에 들어서자 일족들 사이에서 대 소란이 일어났다.

다음 흑룡왕이 될 자가 아직 정비(正妃)도 정해지지 않았는데  인간의 여인에

게서 아이를 낳다니.

노성을 터트리는 흑룡왕 앞에서 훼이는 스스로 후계자의 위(位)를 버렸다.

그리고 맑은 검은 눈으로 훼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비는 어렸지만 그 소란

의 원인이 자신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인간의 피가 섞인 흑룡의 아이를 일족들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용족 중

에서도 최강의 힘을 가졌다는 흑룡으로서의 자부심이 그것을 부추겼다.

훼이는 비에게 살벌한 일족들의 시선을 받게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훼이가

지금까지 일족들에게 가장 큰  신뢰를 얻고 있던  장남이었기에 더욱 여파가

큰 것이기도 했다.

그 때문에 흑룡궁의 본궁에서 멀리 떨어진  별궁에 기거하며 훼이는 비와 둘

만의 생활을 시작했다.

" 훼이..........."

또 다시 유에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더 이상은 자는 척 할 수도 없다. 훼이는 머릿속에서 흘러넘치는 과거의

잔상들을 지우며 눈을 떴다.

숲은 여전히 눈부시도록 푸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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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 호 : 492 / 3334 등록일 : 1999년 06월 14일 23:45

등록자 : 까망포키 이 름 : 포키 조 회 : 330 건

제 목 : [연재] 흑룡의 숲 제 3장 一.

흑룡의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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