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장 화살(矢)
三.
" 잊지마라. 유안. 비록 겉모습은 인간들과 별다를 것이 없지만 우리는 용
족이다.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용족 특유의 기운을 인
간들은 은연중에 느끼기 마련이다."
유안은 아버지의 얼굴을 마주 대하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 그리고 인간들과 마주치지 않도록 조심하거라. 만약 부득이한 사정이 생
겨 인간들과 마주하게 되더라도 그들의 삶에 관여해서는 안된다. 꼭 명심하거
라."
" 네. 아버지."
" 자, 이제 가거라. 유안을 부탁하네. 리린."
라이엔은 차분한 표정을 떠올린 채 유안의 옆에 서있던 리린에게 당부했다.
" 염려 마세요. 흑룡왕님."
짧게 대답하고 나서 리린은 공간을 여는 주문을 외쳤다.
[ 역궁(繹窮) 개문(開門) ]
주문의 여파로 인해 미미하게 공기가 흔들렸다. 그리고 흑룡궁의 정원에 공간
이 열렸다.
" 다녀오겠습니다."
기대감에 가득 찬 유안은 힘차게 인사를 하고 공간 안으로 들어섰다.
용족에게 있어서는 그저 편안한 휴식의 장소로 여겨질 정도로 위험성이 없는
하계로 가는 것뿐인데도 걱정이 앞서는 걸 보니 자신 역시 부모라는 것을 새
삼 깨달으며 라이엔은 몸을 돌렸다. 미하는 공간을 열고 유안이 떠나가는 모
습을 보기가 싫다며 먼저 궁안에서 인사를 나누었다.
라이엔은 치밀어 오른 걱정을 털어 버리려는 듯 걸음을 빨리 했다.
수행은 후계자가 되기 위한 하나의 수업(修業). 수행을 많이 하는 편이 유안
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었다. 어리다고 해서 언제까지 약하게 키울 수는 없는
법이었으니까.
" 보좌관에게 집무실로 오라고 좀 전해주겠나?"
지나가던 시비 한 명을 불러 세워 그렇게 말하고 나서 라이엔은 집무실로 향
했다.
* * *
공간 안은 천계의 풍경과 별다른 것이 없었다. 단지 주위를 감싼 공기만이 조
금 다르게 느껴졌는데, 태어나서 처음으로 수행을 떠나는 유안에게는 모든 것
이 신기하게 다가올 뿐이었다. 차분히 걸음을 옮기는 리린과 달리 유안은 이
곳저곳을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아직 성인식을 치르지 않았기 때문에 유안은 공간을 여는 주문을 사용할 수
없었다. 공간을 여는 주문은 고급에 속하는 것으로 보통의 용족들이 그 주문
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마력과 주문을 필요로 했는데 주문을 외치지
않고도 공간을 열 수 있는 것은 각 용족의 왕들뿐이었다.
" 저..... 리린. 하계는 어떤 곳이에요?"
호기심에 가득 찬 푸른 눈이 자신을 향하자 리린은 엷게 웃으며 대답했다.
" 천계 못지 않게 아름다운 곳이지. 그 때문에 하계에서 살다시피 하는 용
족들도 있을 정도야. 그들이 인간들의 눈에 띄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그런 것
들이 전해져서 전설이 되기도 했지."
" 아......"
짧게 감탄성을 내뱉으며 유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 자, 이제 나가자."
공간 안에 들어선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그들은 어느새 공간의 반대편.
즉, 하계로의 입구에 도달해 있었다.
[ 해제(解制) 지문(止門) ]
리린의 목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유안은 주위의 풍경이 확연히 달라진 것을
보고 입을 크게 벌렸다. 눈앞에는 마치 그림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유려한 풍
경이 펼쳐져 있었다.
" 여긴 어디죠?"
" 곤륜산(崑崙山)의 입구야. 인간들에게 선계(仙界)라고 불릴 정도로 하늘의
기운을 많이 품고있는 곳이지."
리린의 말대로 곤륜산은 맑은 정기로 가득 찬 곳이었다. 운무에 휩싸인 장엄
하기까지 한 봉우리들은 천계에서도 보기 드문 절경을 이루어내고 있었다.
" 우리가 머물 곳은 곤륜산 정상이야. 저곳이라면 인간들과 마주칠 염려도
없고 지내기도 아주 편하지. 유안도 마음에 들 거야."
" 리린은 여기 와봤나 보군요."
" 응. 이번이 세 번째니까."
청룡왕의 무남독녀인 리린은 붙임성 있는 유안을 보며 동생을 얻은 듯한 기
분이 들었다. 이번에는 다른 용왕들의 후계자 선정이 늦었기 때문에 지금 후
계자의 위(位)를 받은 것은 청룡족인 리린과 흑룡족인 유안 뿐이었다. 청룡왕
과 흑룡왕이 나이가 많은 것에 비해 다른 세 용왕들은 수백살이나 어렸기 때
문에 그들이 후계자 선정에 느긋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 유안. 곤륜산의 경치도 감상할 겸 걸어서 가기로 할까. 아름다운 곳이 무
척이나 많으니까."
" 좋아요. 리린."
유안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리린을 재촉했다.
* * * *
" 훼이.....?"
자신의 방안에서 서책들을 뒤적이고 있던 성휘는 방안에 들어선 훼이를 보자
반가움에 휩싸였다. 훼이의 얼굴을 보는 것도 꽤 오랜만이었다. 성휘와 달리
후계자의 신분을 가진 훼이였기에 그렇게 한가하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성휘에게 있어서 유일한 친구인 훼이는 지금까지 외로운 나날을 지내온 성휘
에게 있어 마음을 열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반갑게 인사를 건네던 성휘는 훼이의 표정이 굳어진 것을 발견했다. 늘 밝았
던 훼이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을 보자 자신의 일처럼 걱정이 앞섰
다.
" 무슨일 있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훼이의 앞에 다가선 성휘가 묻자 훼이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 화란이........ 그녀가....... 세상을 떠났어..."
그 말을 듣자 성휘는 둔기에 얻어맞은 듯한 굵은 통증을 느꼈다.
" 아이를 낳다가 목숨을 잃었다고 하더군.......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 천계와
하계는 시간의 흐름이 다르다는 것을...... 그녀는 인간이었는데..... 왜 떠올리지
못했을까........."
훼이의 목소리에는 깊은 슬픔이 배어 있었다. 그리고 그런 훼이를 바라보며
성휘는 자신이 훼이에게 해줄 위로의 말이 없다는 것에 자책하고 있었다.
" ...............아이는...?"
성휘는 겨우 그렇게 물었다.
" 데려왔어. 하지만 아버님의 성화가 대단해서 여지껏 인사조차 시키지 못
했지....."
화연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의 훼이는 무척이나 즐거워 보였다. 그녀가 그토
록 좋냐는 성휘의 질문에 훼이는 짓궂은 미소를 떠올리며 사랑을 해보지 않
은 자는 말해도 알 수 없다는 대답을 했었다.
천계를 비롯한 환계나 천상계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가장 금기시 되는
것. 그것은 바로 인간과 사랑에 빠지는 것이었다. 인간의 피는 그들의 피를
흐리게 한다. 피가 흐려진다는 것은 힘이 약해진다는 것을 뜻했다.
그리고 극히 짧은 생을 살아가는 인간과는 사랑을 하면 괴로움이 남을 뿐이
었다. 죽은 자는 사라지면 그만이지만 남아있는 자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했기에.
" 나... 후계자의 자리에서 물러날 거야."
성휘는 깜짝 놀랐다.
" 대체...... 무슨 생각으로....."
" 아버님이 그토록 노여워하시는 것도 내가 후계자이기 때문이지. 내가 아
니더라도 내겐 다른 형제들이 있어. 후계자의 자리보다...... 그녀가 소중하니
까......"
훼이의 얼굴에는 굳은 결의가 떠올라 있었다.
" 네가 바라는 일이라면..... 난 뭐라고 하지 않겠어."
" 고맙다. 성휘."
" 아이의 이름은 뭐지?"
막 돌아서려는 훼이에게 성휘가 물었다.
" 비(飛)...."
" 멋진 이름이구나...... 다음에 꼭 한번 데려와. 알았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린 훼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성휘는 자신에게 다가
와 준 유일한 친구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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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시온지요. ^^
이제 내일이면 시험이 끝이 나옵니다. 무척이나 기다려지는 방학이옵니다.
흑룡의 숲에서 가장 길어질 지도 모르는 3장 이옵니다. 너무 길어지면 다음 장으로
넘겨버리려고도 생각하고 있사옵니다.
그러면 읽어주신 모든 분들... 제 절을 받으시옵소서.....^^
번 호 : 517 / 3334 등록일 : 1999년 06월 17일 22:54
등록자 : 까망포키 이 름 : 포키 조 회 : 309 건
제 목 : [연재] 흑룡의 숲 제 3장 四.
흑룡의 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