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장 화살(矢)
四.
곤륜산의 정상에서 내려다보이는 구름의 바다는 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할 만
큼 멋진 것이었다.
깎아질 듯이 위태롭게 솟아오른 봉우리들을 허리에서 감싸 안으며 구름은 낮
게 떠 있었다. 구름이 낮은 곳에 머물 만큼 곤륜산은 높게 솟아올라 자신의 자
태를 뽐내고 있는 것이었다.
" 이야. 이런 곳이라면 정말 살고싶을 정도네요."
힘든 기색 하나 없이 싱글거리는 얼굴로 유안이 말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리린
역시 조금도 힘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 이제 이곳에서 네 힘을 키우는 연습을 하는 거야. 유안."
올라오면서 수도 없이 본 곤륜산의 풍경임에도 유안은 눈앞에 펼쳐진 운해(雲
海) 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 유안. 지금까지 몇 가지의 주문을 배웠지?"
재차 리린이 말하자 유안은 아쉬움을 담은 채 리린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 음.... 중급주문까지는 거의 다 배웠어요. 상급 주문도 배우긴 했지만 아직
쓰진 못해요."
" 역시 흑룡족이네. 성인식도 치루기전에 고급 주문까지 깨우치고 있다니
말이야."
" 과찬이에요."
유안은 어색한 듯이 웃어 보였다.
" 용족들이 수행장소로 하계를 택하는 것은 하계의 환경이 천계와 흡사하
기 때문이지. 그리고 오행에 속하는 원소들의 힘이 충만해 있기도 하고 말이
야. 물론 천계만은 못하지만."
" 리린은 성인식 치른 지도 오래됐으니까 고급 주문도 잘 쓰겠네요."
리린의 설명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던 유안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후계자의 위를 받긴 했지만 유안은 아직 어렸다. 다른 이의 실력이 궁금한 것
은 당연한 것이었다. 더욱이 유안은 최강의 힘을 가진 흑룡족이었기 때문에
다른 용족 후계자들이 힘을 얼마만큼 잘 사용하는지 궁금했다.
" 쓸 수 있긴 하지만 위력은 미약하지. 좀더 수련을 하지 않으면 안돼."
" 음... 우리 그러면 아까 올라오다가 본 폭포 근처에서 수련을 하기로 해
요. 우리 둘다 물을 근본으로 하는 주문을 많이 쓰니까 그게 더 편할 것 같은
데 리린은 어때요?"
" 좋아."
세차게 쏟아져 내리는 폭포 줄기에서 수룡이 고개를 쳐들었다. 마치 폭포 자
체가 살아있는 생명체인 것처럼 움직이는 듯이 보였다. 그리고 투명하게 속
이 비쳐 보이는 은은한 물빛의 몸체가 머리를 따라 폭포에서 튀어나왔다. 수십
장은 되어 보이는 폭포의 길이 만큼이나 거대한 몸체를 자랑하는 수룡은 유
연한 움직임으로 상공에 떠올라 있었다.
리린이 불러낸 수룡의 움직임을 말없이 지켜보던 유안 역시 작게 주문을 외
쳤다. 세차게 떨어져 내리는 폭포 소리 때문에 유안이 주문을 외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주문의 여파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나타났다.
폭포 위의 하늘이 어느 순간 검게 물들기 시작하더니 먹구름 사이에서 가느다
란 빗줄기가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그 빗줄기 사이로 묵빛의 용의 형상이 모
습을 드러냈다. 묵룡(墨龍) 역시 수룡처럼 투명하게 비치는 몸체에 은은하게
묵빛이 떠올라 있었다.
" 굉장한데?"
리린은 감탄하며 자신이 불러낸 수룡을 묵룡의 근처로 움직이게 했다.
" 좋아요. 리린. 한번 붙어볼까요?"
그렇게 말하는 유안의 눈에는 기대감과 흥분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 * * *
" 무슨 소리냐. 훼이."
흑룡왕은 노기를 품은 얼굴로 훼이에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참는 기운이
역력하게 배어 있었다.
" 다시 말씀드려야 합니까? 전 분명 후계자에서 물러나겠다고 말씀드렸습
니다."
"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냐."
두손을 부르르 하고 떠는 흑룡왕을 대신해 흑룡왕비인 훼이의 어머니가 말했
다. 그녀의 음성에는 노기가 깃들어 있지 않았지만 당황이 묻어나 있었다.
" 두분께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제 아이를 흑룡족으로 인정하지 않으신 다
고 하셨습니다. 원로들도 마찬가지 이구요. 제겐 후계자의 위(位) 보다는 제
아이가 더 중요합니다. 그렇게 어린아이를 혼자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두분께서는 인정하지 않으실 지 모르지만 그 아이는 엄연히 제 아들입니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곧 폭발할 듯이 손을 떨며 화를 삭이고 있던 흑룡왕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좋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해라. 그 대신 다시는 이 궁안에 발을 들여놓을
생각은 하지 말아라."
" 무슨소리에요. 당신."
흑룡왕비는 남편의 말에 당황한 듯이 그를 바라보며 물었지만 그의 얼굴엔
고집스러운 표정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부디 평안하시길."
훼이 역시 고집스럽게 인사를 하고 대전에서 빠져나갔다.
둘은 너무나도 닮은 부자지간 이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뜻을 꺾지 않는 고
집스러운 아버지와 아들.
흑룡왕비 만이 갑작스럽게 달라진 상황에 망연해 하며 아들이 서 있던 자리
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 아버지....."
훼이의 허리정도 까지밖에 오지 않는 작은 비(飛)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훼이
를 올려다보았다.
" 왜그러지?"
조금 전까지와는 확연하게 다른 부드러운 얼굴로 훼이는 비를 바라보았다.
" ......할아버님과는 만날 수 없는 건가요...?"
" ............그래."
비는 실망한 듯 작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훼이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며 아들을 안아 올렸다.
" 너무 실망하지 말거라. 네가 분명 훌륭하게 자라면 할아버님께서 먼저 널
보자고 하실 테니까."
어린아이 답지 않게 차분한 눈으로 훼이를 마주보며 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 조금만 기다려라. 어른이 되는 건 금방 이니까."
그리고 그날 훼이는 비와 함께 별궁중 하나로 거처를 옮겼다. 한순간에 후계
자의 자리에서 벗어나 지금까지와는 다른 나날을 누리게 되었지만 훼이는 오
히려 그것이 더 자유롭게 느껴졌다.
지난 10년간을 하계에서 보낸 비는 어린아이답게 천계의 생활에 놀랍도록 쉽
게 적응했다. 혹시 라도 하계로 돌아가겠다고 하는 건 아닐까 내심 걱정하던
훼이였지만 그건 기우에 불과했다.
늘 북적대는 본궁 흑룡궁에서의 생활과 별궁에서의 생활은 확연히 달랐다. 본
궁에서 생활할 때는 식사 및 의복 준비. 청소에 이르기까지 훼이의 주변에서
항시 맴도는 수십 명의 시비들과 후계자로서의 수업을 받기 위해 쉴새없이
수행과 업무처리등을 반복하는 생활로 시간을 보내왔다. 그야말로 정신없는
생활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어떻게 그런 생활들에 적응하고 살아왔는지 신
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별궁에 배치된 인원은 별궁의 관리를 위해 상주하고 있는 세명의 시비와 병
사하나. 그리고 시종 한명 뿐이었다. 본궁에서 일어난 소란을 아는지 모르는
지 별궁에 머물겠다는 훼이와 비를 그들은 따스하게 맞이했다.
" 전하. 식사는 어제처럼 밖으로 가지고 나갈까요?"
애띤 얼굴의 시비가 물어왔다.
" 그렇게 해주겠나. 그리고 난 이제 후계자가 아니니 전하라고 부를 필요는
없네."
훼이의 말에 시비는 웃음띤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 전하는 언제까지나 전하이신 걸요. 이름은 상관없습니다."
훼이는 그렇게 대답하며 방을 빠져나가는 시비의 뒷모습을 보며 묘한 감응을
느꼈다. 항상 앞만 보며 살아온 자신이었기에 주위에서 어떻게 자신을 생각하
고 있는지 조차 신경 쓰지 못했었다. 아니, 그보다 시비들의 존재 자체를 염
두해 두지 않고 살아왔던 것이다.
" 아버지. 오늘은 뭘하지요?"
밖에 나갔다가 막 상기된 얼굴로 들어선 비가 물었다.
비의 몸에 맞게 만들어진 중간 길이의 검은 파오는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비
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훼이는 처음 비와 마주 대했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 비
가 걸치고 있던 낡은 장포는 천계로 돌아오기 전에 화연의 집에 벗어두고 온
차였다. 언제고 비가 떠날 것을 알고있던 비영은 비를 위해 값비싼 비단 옷을
마련해 두었었다.
그랬다. 화연과 비영. 그들 두 남매는 배려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10년이
나 남자 혼자의 손으로 키운 누이의 아이를 무작정 떠나보내면서도 비영은
붙잡는 말 한번 내뱉지 않았다.
" 오늘은 네게 간단한 주문 몇 가지를 가르쳐주마. 이를테면 구름을 불러
비를 내리게 하는 주문 같은 것을 말이다."
" 정말이에요? 저도 할 수 있어요?"
비영은 눈을 크게 뜨며 훼이에게 물었다. 어린아이답게 금새 마음이 들뜬 모
양이었다.
" 물론이다. 흑룡들은 태어날 때부터 비를 부르는 힘을 가지고 있단다."
훼이의 대답에 비는 활짝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훼이는 그 웃음에서 화연의 미소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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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와.....너무 기뻐요. 추천해주신 꾼2님(예전에 해주셨는데 감사도 안드려서 정말
죄송...) 그리고 ELENOA님. 감사합니다. ^0^
흑룡의 숲의 세계관 설정을 위해 쓴 소설에서는 같은 배경이지만 스케일이 좀
작았었는데.... 이번엔 엄청 커지고 있습니다. 글 전개 속도는 느린편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저희 언니는 빨리빨리 뒷 내용 쓰라고 그러더군요. 제가 뒷 내용
말해줬거든요...^^ 그러면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번 호 : 530 / 3334 등록일 : 1999년 06월 18일 22:20
등록자 : 까망포키 이 름 : 포키 조 회 : 299 건
제 목 : [연재] 흑룡의 숲 제 3장 五.
흑룡의 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