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장 화살(矢)
五.
비와 별궁에서 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한 달이 지나갔다. 그 동안 비는 시비들
과 매우 친해져서 그녀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훼이는 별궁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하루종일 비의 곁에서 시간을 보
냈다. 인간의 피가 섞여있었기 때문에 비가 가진 힘에 조금 의심을 가졌던 훼
이였지만 비는 주문을 통해 자신의 힘을 사용하는 일을 능숙하게 해냈다. 흑
룡왕의 장남으로 태어난 훼이는 어릴 때부터 다른 누구보다 뛰어난 재능을
보였었다. 하지만 그런 자신의 재능도 비에게는 이기지 못할 거라고 생각될
정도로 비는 모든 것들을 빠르게 배워나갔다.
아직 어린아이일 뿐인데도 비는 무척이나 이해가 빨랐다. 단지 체력이 약하다
는 것만 제외하면 이제 비도 한 명의 훌륭한 흑룡족이었다.
" 비. 오늘은 내 가장 친한 친구를 소개시켜주마."
" 아.... 천상계의 왕자라는 분말이죠. 아버지?"
" 그래. 정말 좋은 사람이지. 너도 분명 그렇게 느낄 거다."
별궁에서 살기 시작한 이래로 처음 하는 외출이었기에 비는 즐거운 것 같았
다.
" 자. 이게 공간을 여는 술(術)이다."
비를 향해 미소지어 보이며 훼이는 아무런 주문도 외치지 않고 공간의 문을
열었다. 그저 약간의 미미한 파동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비의 눈앞에 공간이
열렸다. 그것을 본 비는 깜짝 놀란 듯이 감탄성을 내뱉었다.
" 너도 얼마 지나지 않으면 할 수 있게 될 거다."
둘은 공간에 들어선 후 천상계의 성휘에게로 향했다.
" 오랜만이군. 성휘."
언제나처럼 성휘는 의자에 편안하게 기대어 앉은 채 서책을 뒤적이고 있었다.
" 아..... 훼이..."
익숙한 목소리에 반가움을 표하며 성휘는 책을 덮었다.
" 그쪽은....."
" 소개하지. 내 아들 비야."
성휘는 잠시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 약간은 의외라는 듯한 표정
을 떠올리며 비에게 인사를 건넸다.
" 반갑다. 비."
" 안녕하세요."
성휘에게 인사를 건네며 비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 언제나 훼이에게 아련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그 미소를 보며 성휘역시 환한 미소로 답했다.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훼이가 사랑했던 인간의 여인의 모습을 성휘역시 비
를 통해 볼 수 있었기에. 왜 훼이가 그녀에게 끌렸는지 그녀와의 사이에서 태
어난 자신의 아들 비를 위해 후계자의 위를 버렸는지도... 알 수 있었다.
분명 자신이 훼이였더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이제까지의 자신에게는 그토
록 소중한 존재는 없었지만 느낄 수 있었다. 훼이의 마음을.
" 훼이를 많이 닮았구나."
성휘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성휘는 그렇게 말하며 두 부
자에게 자리를 권했다.
" 차(茶). 마셔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마셔보겠니?"
성휘가 자신에게 묻자 비는 밝게 빛나는 검은 눈으로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
였다.
" 네. 마셔보고 싶어요."
" 좋아. 잠시만 기다려라."
성휘는 기분 좋게 대답하며 지난번에 동생에게 받은 용정차( 精借) 잎을 꺼
냈다. 모든 차중에 가장 일품으로 여겨지는 용정차는 천상계에서도 왕족 이상
이 아니면 맛볼 수 없는 귀한 것이었다. 성휘는 술보다는 차를 즐기는 편이었
기에 여러 종류의 차 잎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꺼낸 용정차 잎은
천상계에서 유일하게 그를 이해해주는 여동생 가진으로부터 받은 것이었다.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엷은 녹색의 찻물을 내려다보며 비는 신기한 듯 시선
을 떼지 못했다.
" 차를 마실 때는 단숨에 마시지 말고 천천히 그 맛과 향을 음미하면서 한
모금씩 마셔야 한단다."
훼이는 조용히 성휘가 비에게 다도에 관해 가르쳐주는 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포근하게 내려앉는 저녁 공기와 같은 평화로움이 그들을 감싸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의 슬픔은 없을 것이라 생각하며 훼이는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따스한 미소를 떠올리고 있었다.
* * *
곤륜산에서 수행을 하면서 지낸 지 어느덧 열흘째가 되었다.
인적이 드문 곤륜산의 구석구석에서 유안과 리린은 마음껏 자신들이 배워왔
던 주문들을 쓰며 시간을 보냈다. 유안은 머지않아 흑룡궁으로 돌아가야 한다
는 사실도 잊은 듯 수행의 즐거움에 한껏 빠져 있었다.
" 받아요. 리린."
유안은 손에 들고 있던 복숭아 하나를 리린에게 던졌다. 리린은 유안이 던진
복숭아를 가볍게 받아들며 싱긋 웃었다.
" 어때? 보름의 시간이 너무도 짧다는 걸 알겠지?"
유안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 리린과 함께 라서 다행이었어요. 유사한 주문들도 많이 쓸 수 있었고."
" 난 천계에 돌아가면 당장에 다른 주문들을 배워야겠어. 성인식도 아직 치
르지 않은 너한테 밀릴 정도라니. 내 체면이 말이 아니야."
뾰루퉁한 얼굴로 말하긴 했지만 리린의 어조에는 책망하는 뜻은 조금도 담겨
있지 않았다.
" 자, 오늘은 충분히 수련했으니까 그만 쉬도록 하자."
리린과 유안은 나란히 걸음을 옮기며 복숭아를 베어 물었다.
그리고 곤륜은 두 용족을 품은 채 조용히 밤을 맞이했다.
검게 펼쳐진 밤 공기 속에 녹아든 곤륜의 숲은 낮의 푸르름을 모두 감추고
검은 그림자 속에 자신을 묻었다.
세차게 물이 떨어지는 거대한 폭포 옆의 나무 아래에는 몸을 눕히고 깊게 잠
든 유안의 모습이 보였다. 몸에 걸친 검은색의 파오 때문에 유안의 모습은 눈
에 잘 띄지 않았다. 반면에 파란색의 파오를 걸친 리린은 유안이 몸을 눕힌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앉은 채 눈을 감고 있었는데. 어둠 속에서도 그녀가
몸에 걸친 파란 파오는 어렴풋하게 자신의 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세차게 떨어지는 물소리와 가끔 불어오는 바람에 가지를 흔드는 나무소리. 그
리고 작게 들려오는 유안과 리린의 고른 숨소리만이 밤 공기 속에서 울려 퍼
졌다. 그렇게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잠시 몸을 뒤척이던 유안이 다시
자세를 바로잡고 잠 속에 빠져든 바로 그 순간. 세찬 폭포수 아래로 흐르는
널찍한 못의 맑은 물이 밤의 어둠이 간직한 빛처럼 검게 물들어 가기 시작했
다. 칠흑처럼 어두운 검은빛도 아닌 탁하긴 하지만 속이 비치는 검은빛으로
물의 색이 변해갔다.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의 물은 여전히 흰 포말과 함께 부
서져 내리고 있는데 오직 고인 물의 빛깔만이 검은 색으로 물들어 가고있었
다. 검은빛으로 물든 물은 마치 원래의 빛깔이 검은색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 오랜 숙원을 풀 때가 다가왔다........>
그리고 어디서부터 들려온 소리인지 알 수 없는 음산하면서도 작은 울림이
폭포 소리를 뚫고 들려왔다. 원래대로라면 폭포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어야
할 그 소리는 특별히 큰 소리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뚜렷하게 들려왔다.
그 이상한 현상을 느끼지 못하는지 깊이 잠든 유안과 리린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 이제 저 심연에서 벗어날 수 있다........>
다시 들려온 그 목소리에는 묘한 울림이 담겨 있었다. 기쁨 같기도 하고 분노
같기도 한.
쏴아아. 세찬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며 지나갔다. 마치 깊이 잠든 두 사람에
게 경고를 전하듯이.
날이 밝았다. 유안은 두 팔을 펼치며 기지개를 폈다. 나무 사이로 비쳐드는
햇빛은 따스하게 숲을 밝혀주었다. 잠기운을 몰아내기 위해 못가로 다가간 유
안은 투명하게 흐르는 물 속에 손을 담갔다. 뼈까지 시리도록 차갑고 청명한
물이 기분 좋게 느껴졌다. 그리고 어느새 뇌리를 점령하고 있던 잠의 기운은
달아나 버렸다.
" 어제 좀 피곤했던 모양이네."
언제 일어났는지 리린은 품안에 과실들을 안고 유안의 곁에 다가서 있었다.
" 곤륜의 대지가 날 반기는 모양이죠. 놓아주기 싫었는지도."
" 이제 감상적인데?"
유안은 씩 하고 웃어 보였다.
" 오늘도 빨리 식사를 마치고 힘을 겨뤄봐요. 리린. 어제는 무승부 였으니
오늘은 꼭 결판을 내야겠어요."
" 좋아. 아무리 네가 흑룡족이라지만 난 너보다도 엄연히 오랜 시간을 살아
왔다구. 질 수야 없지."
유안은 손을 담갔던 시리도록 맑고 투명한 물에서 손을 꺼내며 몸을 일으켰
다. 요란한 굉음과 함께 폭포수는 변함없이 거대한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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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드디어 뭔가가 시작될 것 같지요? 지금까지의 순탄한 전개와는 조금
다른 전개가 시작됩니다. 3장도 이제 얼마 안 남았군요. 다음편에서 바로 4장이
시작될지도 모르죠.. ^^ 지금 이야기는 엄청난 초반부인데 끝까지 읽어주실 수
있으신가요? (네. 저나 열심히 쓰라구요 ^^ 알겠습니다.)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날리며..... 전 이만 샤샤샥....
번 호 : 540 / 3334 등록일 : 1999년 06월 19일 21:50
등록자 : 까망포키 이 름 : 포키 조 회 : 298 건
제 목 : [연재] 흑룡의 숲 제 3장 六.
흑룡의 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