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룡의 숲-11화 (11/130)

제 3장 화살(矢)

六.

명진관(命鎭館). 성휘는 금빛의 힘찬 필체로 쓰여진 편액을 바라보며 잠시 숨

을 가다듬었다.

깊게 가라앉은 밤 공기는  조심스러운 성휘의 발소리도  금방 읽어낼 정도로

고요했다. 천상계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잡은 상천궁. 그리고 그보다 더 깊숙

한 곳에 있는 명진관. 명진관을 관리하는 것은 12 천선중 하나인 서빈과 구천

현녀로 그들은 천선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는 만큼 위세또한

대단했다.

아직 해뜨기까지는 한시진도 더 넘게 남은 새벽. 성휘는  굳게 닫힌 명진관의

문에 손을 가져갔다. 감히 그곳에 들어가려고 생각하는 자는 없었기에 명진관

의 거대한 문에는 빗장조차 걸려있지 않았다.

미세하게 끌리는 소리와 함께 명진관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문

에 새겨져 있던 두 마리의 주작의 형상은 문이 열림과 동시에 성휘의 시야에

서 사라졌다.

명진관 안은 끝도 보이지 않을 만큼 넓었다. 원래부터  끝은 존재하지 않을지

도 몰랐다. 명진관은 바로 세상의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수명을 관리하는 곳

이었기 때문에. 이 넓은 곳에서 자신이 목적하는 것을 찾기위해서는 한시진의

시간은 너무나 빠듯했다. 성휘는  두리번 거리며 나무 책장이  일렬로 한없이

늘어서 있는 사이를 걸었다. 책장에 꽃혀있는 두루마기들에는  모든 살아있는

이들의 수명이 적혀 있었다. 그 두루마기들은 수명부(壽命簿) 라고 불렸다.

물론 그곳에는 옥황상제를 비롯한 천상계 사람들의 수명부도  있었다. 하지만

성휘가 찾는 것은 자신의 수명부 따위가 아니었다.

한참을 두리번 거리며 명진관 안을 거닐던  끝에 성휘는 이윽고 목적했던 두

루마기를 발견했다. 아직 새것인 듯 다른 수명부와는 달리  하얗고 깨끗한 그

수명부는 주위의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용족들의 수명부 사이에 있었다.

비(飛). 그 이름이 적힌 수명부를 꺼내들며 성휘는 떨려오는 마음을 진정시켰

다. 그리고 나서 조심스럽게 두루마기를 펼쳤다.

" 무얼 하시는 겁니까!"

망연한 얼굴의 성휘를 바라보며 상천궁 수비대장 이수는 노성을 내질렀다.

성휘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았지만 명진관안에 들어선 이상 그가 누

군가의 수명부를 보기 위해 이곳에 들어왔다는 것은 자명했다.

" 상제께서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그런 건 염두에 두지도 않으십니까?"

이수는 다른 귀족들이나  왕족들처럼 성휘를  경멸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비호하지도 않았다. 어디까지나 상천궁  수비대장으로서 그는 냉정하게  모든

것을 판단했다.

성휘는 여전히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 어서 나가시죠. 아무리 왕자님이라고 하셔도 이번일은 간과하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성휘는 이수가 이끄는 대로 명진관  밖으로 나왔다. 명진관 밖에는  많은 수의

천군들이 도열해 있었다.

" 거처로 모시고가라."

이수의 명령에 몇 명의 천군이 성휘에게로 다가섰다.

천군들에게 거의 끌려가다시피 하며 명진관  앞에서 떠나는 성휘의 뒷모습은

슬퍼 보였다.

*            *            *

" 유배.......?"

훼이는 자신에게 말을 건네는 아직 앳띤 얼굴의 천군을 보며 되물었다.

" 예. 왕자님께서 자세한 이야기도 하지 못하고  떠나게 되어 미안하시다며

절 보내셨습니다."

훼이는 갑자기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 무엇 때문에 갑자기 유배를 명받은 것이지?"

훼이가 묻자 천군은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 그건..... 왕자님께서 직접 말씀하시겠다며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하셨습니

다. 유배에서 풀려나기만 하면 그때 말씀드리겠다구요."

유배. 유배라니.... 갑자기 헛웃음이 나왔다.

아무리 성휘가 눈엣가시처럼 여겨지는 화선  소생의 왕자라고는 하지만 천상

계의 왕자라는 신분을 가진 그를 그렇게 쉽게 유배 보내다니.

" 그 이외에 전한 말은 없었나?"

" 그저 미안하다는 말씀밖에는....."

대체 무엇이 미안하다는 말인가. 가슴이 답답해져왔다.

대체 천상계의 천인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몸  속에 흐르는 피는

모두 같은 것이거늘. 어째서  그렇게 신분에 얽매이려고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왕자라는 신분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성휘는 언제나 자신의 방에서 거의 나

올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근신하듯이 지금까지의 시간들을  보내왔다. 활동적인

용족의 피를 가진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성휘

는 담담하게 자신에게 던져지는 모멸의 시선을 견뎌내며 자랐다. 성휘의 인내

심은 참으로 깊은 것이었다. 그런 질식할 듯한 공기  속에서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다. 성휘의 얼굴에 떠오른 슬픈 듯한 미소는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

다. 나쁜 쪽으로 성격이 변하지 않는 대신 성휘는 조용하게, 존재감조차 희미

할 정도로 자신을 감추며 지내온 것이었다.

훼이는 자신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네고 천상계로 돌아서는 천군을 바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 성휘...... 대체 무얼 한 거야........"

훼이는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반년이 넘게 지나도록 훼이는 성휘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공간을 열

고 돌아다니며 성휘가 있는 곳을 찾아볼 까도 생각했지만 자신이 나타나는 것

이 성휘에게는 오히려 나쁜 영향을 끼칠지도 모르는 일이었기에 훼이는 성휘

의 유배가 풀리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            *            *            *

하늘에 걸려있는 붉은 노을을  바라보며 유안은 리린과  함께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어느새 익숙해진 하계의 공기. 천계와는 조금 다른 향기가  맴도는 그 공기에

유안은 어느새 취해버린 것 같았다.

" 빨리 성인식을 치렀으면 좋겠어요."

" 그래. 얼마나 남았지?"

유안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 21년이요."

" 지내다 보면 금방 이야."

노을은 어느덧 붉은 빛을  서서히 잃어가고 있었다. 하늘의  동쪽 끝에서부터

아스라한 어둠이 밀려와 세상을 뒤덮듯이 퍼져 나갔다.

" 밤하늘을 보면 제 백부님이 생각나요."

유안이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말에 리린의 눈동자는 미미한 떨림을 보였다.

" 그분은...... 어떤 분이시지..?"

" 무척이나 좋은 분이세요. 누군가와 만나기를 꺼려하시긴 하지만 제겐 단

하나뿐인 백부님이시고....... 누구보다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기도 하죠. 모

두들 말은 꺼내지 않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거에요."

리린은 그래 하고 작게 대답하며 유안에게로 돌렸던 시선을 거두어 들였다.

" 이제 폭포로 돌아가요. 리린."

한동안 아무 말없이 각자의  생각에 빠져있던 둘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주위는 달빛에 감싸여 있었다.

그것은 무척이나 이상한 느낌이었다. 분명 지금은 봄 날씨였건만 유안은 온몸

을 찌를 듯한 냉기 속에 파묻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유도 없이 몸이 떨

려왔다. 하지만 그것은 주위가 차갑게 식었기 때문에 느껴지는 한기는 아니었

다. 겨울을 지배하는 흑룡족인 유안이 까닭 없이 추위에 몸을 떨 일은 없었다.

유안은 눈을 뜨려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눈꺼풀하

나 들어올리는 일인데도 몸이 의지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것이다.

귓가에서는 여전히 폭포의 굉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혹시 이건 꿈이 아닐까. 그렇게도 생각해 보았지만 열흘 넘게  지내온 이곳의

대지는 이제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있었기에 꿈이라기엔 너무나 생생하게

대지의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유안은 계속해서 몸을 움직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여전히 손끝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리린..... 리린도 혹시 나처럼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계속 머리 속으로 생각을 떠올리던 유안은 주위에  있을 리린의 몸에 걱정이

미쳤다. 하지만 그 사실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 애써 몸부림 칠 필요 없다........ >

뼈끝까지 파고들 듯한 한기가 담긴 음성이 유안의 머리 속에 울려 퍼졌다.

누구지....?

유안은 그 목소리의 주인을 보기 위해 다시 한번 눈에 힘을 주었다.

< 아무리 강한 힘을 가진 흑룡족이라도 아직 제대로 된 힘을  가지지 못한

너는 내 상대가 될 수 없다........>

대체 누구야....!

하지만 유안은 자신을 내리누르는 힘을 가진 존재를 볼 수 없었다.

그리고 유안의 몸을 감싸오던 냉기가 더욱 강해졌다.

" 유안!"

리린은 유안의 몸을 감싸고 있는 투명한 검은  안개를 없애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그것은 리린의 힘을 그대로 흡수해 버렸다.

형체도 없이 사그러들지도 않는 그 안개는 점점  짙은 검은색으로 물들어 가

며 유안의 몸에 달라붙었다.

< 청룡족의 여인이여....... 흑룡들에게 전해라. 이 흑룡족의 아이를 심연으로

데려가겠노라고.........>

온몸에 소름이 돋게 만드는 냉기 서린 음성.

" 넌 누구냐!"

리린은 날카롭게 외쳤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점점 더 빛을 더해 가는 검은 안개만이 리린의 시야를 가득 채울 뿐. 이제 더

이상 유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힘빠진 얼굴로 주저 앉아있는 리린의 몸에 아침의 햇살이 비쳐  들어왔다. 리

린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한 일족의 후계자인 자신의 힘으로도 유안을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이 너무나

도 분했다.

한동안 주저 앉아있던 리린은 입술을 깨물며 일어섰다.

[ 역궁(繹窮) 개문(開門)! ]

부서질 듯 쏟아지는 폭포 소리보다도 더 크게 리린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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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금어울님, 마계요정님, 다루마님, 미스리드님, 다크스폰님, 천랸화니님과

만났습니다. 평소에 무척 보고싶었던 분들이었는데 만나니까 감회가 새롭습니다.

^^ 모두들 멋진 분들 이었어요.

이야...이제 3장이 끝날때도 얼마남지 않았네요. 힘내서 열심히 써야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당..

번 호 : 564 / 3334 등록일 : 1999년 06월 20일 23:29

등록자 : 까망포키 이 름 : 포키 조 회 : 294 건

제 목 : [연재] 흑룡의 숲 제 3장 七.

흑룡의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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