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룡의 숲-13화 (13/130)

제 4장 침묵(沈默)

태양 앞에서 모습을 감추고

달빛 아래서 어렴풋이 피어나는

조각난 시간의 파편.

별들이 비추는 것은 무엇인가.

一.

언제나 생기 있게 반짝이던 유안의 푸른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채 멍한 빛으

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아직도 유안의 몸은 희미하게 검은 안개로 휘감겨  있었다. 분명 유안

의 눈동자에서 생기를 앗아간 것은 그 안개임이 틀림없었다.

유안은 마치 버려진 목각 인형처럼 갈색의 나무의자에  기대어 앉은 채로 어

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은 채 굳어져 있었다.

< 이제 더 이상의 지독한 고독은 싫다.......... >

온 몸의 피부가 창백하다 못해 푸른빛을 띄고 있는 슬퍼 보이는 인상의 청년

은 곧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이는 마른  몸을 움직여 유안에게로 다가섰

다. 소름끼치도록 서늘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와 달리 청년의 눈은  맑은 빛

을 담고 있었다. 마치 그의 몸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것이 눈이라고   느

껴질 정도로 그의 눈은 맑게 개어 있었다.

길게 자라나 있는 그의 진한 푸른빛이 도는 머리카락은 차분하게 등뒤로 늘어

져 있었다. 웬만한 여인들보다도 더 길어 보이는 그 머리는 땅에  닿을 정도로

길었다.

그는 거의 소리가 나지 않도록 움직였는데 그렇다고  해서 천천히 걷고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더욱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

는 것은 자세히 보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을  만큼 미미하게 흔들리는 길다란

그의 머리카락 뿐이었다.

어느새 유안의 곁에 다가선 그는 천천히 마른  손을 들어올려 유안의 이마에

가져다 댔다. 그가 걸친 넉넉한 품의 장포는 그의 마른 체격을 더욱  잘 드러

나게 만들었다. 손을 들어올린 순간 손 아래로 길게 늘어진  장포자락은 그의

손이 열 개도 더 들어갈 정도로 보였다.

그가 지낸 오랜 세월을 말해주듯 검은색이었을 듯한  그의 장포는 빛이 바래

회색에 가까워져 있었다.

그의 마르고 창백한 손이 이마에 닿자 유안은 몸을 흠칫했다. 초점 없이 풀린

눈은 여전했지만 유안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몸에 닥친  위기를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 두려워할 필요 없다. 그저 날 받아들이면 돼........ >

유안의 몸이 떨려오는 것을 느끼고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나서 유안의 이마에 올려진 그의 손에서  희미한 푸른빛이 뿜어져 나

오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유안의 몸을 감싸고 있던 검은 안개의  빛과는 확연

히 다른 청명하게까지 느껴지는 푸른빛.

그 푸른빛이 이마에서부터 시작해 유안의  온몸을 뒤덮자 초점 없이 풀려있던

유안의 눈에 다시 푸른빛이 돌아왔다. 언제나 생기 있게 반짝이던 맑고 투명한

푸른 눈동자가 그곳에 있었다.

< 푸른색은..... 언제고 그리운 색이지....... >

유안의 푸른 눈을 대하자  그는 의외로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그렇다고는

해도 여전히 그의 목소리에는 냉기가 남아 있었다.

잠시동안 남자는 유안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의 손에서 뿜어져 나오던 푸른빛이 눈부시도록 강해졌

다. 그때까지 죽은 듯이 굳어져 있던 유안의 입에서는  낮은 신음성이 터져나

왔다.

유안은 자신의 눈에 비친 낯선 얼굴을 보며 본능적인  위험을 느꼈다. 하지만

자신에게 여기에서 빠져나갈 능력이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이마에 닿

은 남자의 손에서는 끊임없이 서늘한 푸른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유안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눈을 움직여 주위를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쇠락한

기운이 물씬 풍겨오는 칠이 벗겨진 벽과 먼지가 쌓여있는  가구들. 그리고 그

방처럼이나 위태로워 보이는 창백한  인상의 남자. 문득 유안은  남자의 눈이

놀랍도록 맑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순간. 찢을 듯한 격통이 온몸을

달리기 시작했다.

*            *            *

이곳은 언젠가 한번 와본적이 있었다.

흔들림조차 느껴지지 않는 적막이 흐르는 공기. 그 적막은  이유 없는 불안을

느끼게 할만큼 이질적인 것이었다.

커다란 천이 펄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지 않아도 훼이는

그 소리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것은 비유(肥遺) 라는 이름의 세

쌍의 다리와 네장의 날개를  가진 뱀이었다. 가늘게 찢어진  세모꼴의 눈으로

위협하듯 훼이의 주위를 날아다니던 이형의 뱀은 훼이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

지 않자 요란한 날개 소리를 내며 다시 어딘 가로 날아갔다.

훼이는 길게 자라난 수풀  속을 헤치며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원시림을

방불케하는 울창한 숲.  명계에서 자라나는 모든  식물들은 기형적으로 컸다.

훼이의 키만큼이나 길다란 풀들과 높이를 알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나무들이

빽빽하게 돋아나 있었다. 훼이가 머물고 있는 흑룡의 숲 보다 더 울창하게 들

어찬 나무들은 빛이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는  것처럼 길게 가지를 내뻗고 있

었다.

" 위험하군...."

훼이는 낮게 중얼거리며 평소와는 달리 조심스럽게 공간을 여는  술(術)을 펼

쳤다. 앞에 있던 나무들이  기이하게 휘어지는 듯이 보이더니  눈앞에 공간의

문이 열렸다.

미하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있었다. 막 사실(私室) 안으로 들어선 훼이에게 고

개를 숙여 인사를 건네는 동작조차 힘겨워  보일 정도로 그녀는 수심에 잠겨

있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나뿐인 자신의 아들이 누군가에게 끌려갔

다는 데 멀쩡하게 있을 부모는 어디에도 없었다. 더군다나  유안은 앞으로 흑

룡일족을 이끌어 갈 왕이 될 몸이 아닌가.

" 훼이....... 유안은......무사할까요....."

유안과 마찬가지로 푸르게 빛나는 두 눈으로 훼이를 바라보며 미하가 물었다.

" 걱정 말아요."

짧은 한마디 였지만 미하는 진심으로  안도했다. 훼이라면, 오랜 세월을 살아

온 그라면 분명 유안을 무사히 자신의 품으로 되돌려 줄 수 있을 것이다.

" 형님. 어서 서두르죠. 한시가 급합니다."

라이엔이 그렇게 말하며 막 공간을 여는 술을 펼치려고 할 때였다. 훼이는 손

을 내밀어 라이엔을 저지했다.

" 넌 여기 남아라."

" 무슨소리에요, 형님."

훼이는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가라앉은 눈을 돌려  동생. 라이엔을 응

시했다.

" 넌 왕이다. 흑룡일족의 왕인  네가 명계로 들어서면 어떤  문제가 생길지

모른다. 그들에게 덜미를 잡혀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다."

" 그렇지만..."

" 나라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지. 그리고 난 초행이 아니다."

" 형님...."

훼이는 어느새 공간을 열고 있었다.

" 기다려라."

그 한마디를 내뱉고 훼이는 공간 안으로 들어섰다.

뒤에 남은 라이엔과 미하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걱정이 담긴 눈빛을 교

환했다.

지금 훼이가 느낀 것은  분명. 수계(水界)의 힘이었다. 흑룡들이  쓰는 힘과는

약간 다른 그것은 분명 물의 용인 청룡족들이 가진 힘과 흡사했다.

어쩌면 늦었을지도 모른다.

초행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명계의  복잡하게 얽힌 구조를  다 파악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훼이는 무작정 그 물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몸을 움

직이고 있는 것이었다.

공간에서 빠져나오자 마자 훼이의 눈에 시랑(豺狼)이 보였다. 여우와 같은 생

김새를 가진 꼬리가 희고 길다란 귀를 가진 동물이었다.  훼이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던 시랑은 어느 순간  꼬리를 내리고 도망치듯이 사라져

버렸다. 인간들에게 재앙을 가져다주는 불길한 동물들. 명계의 곳곳에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이형(異形)의 동물들이 살아가고 있었다.

훼이는 아직까지 희미하게 물의 기운이 풍겨  나오는 낡은 건물 앞에 멈추어

섰다. 본래는 상당히 심혈을 기울여 지어졌을 듯한  고풍스러운 건물이었지만

지금은 곳곳에 파손된 흔적이 보이는 낡아빠진 건물일 뿐이었다.

군데군데 칠이 벗겨져내린 목조건물은 금방이라도  삐그덕 소리를 내며 무너

져 내릴 것 같았다.

황폐해진 정원을 지나 예전에는  분명 아름다웠을 화려한  조각이 새겨진 문

안으로 들어서자 조금전보다 한층 강한 기운이 느껴졌다.

서둘러야 한다. 분명 살아있는 자의 존재를 느끼고 그들이  모여들기 전에 유

안을 찾아내야 한다.

마치 자신의 집안을 거닐 듯이 훼이는 막힘 없이 길게 이어진 복도를 지나쳐

갔다. 수십 개의 방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지만 훼이는  그 방들에는 눈길

도 주지 않았다.

그리고 예전에는 분명 침소로 쓰였을. 아직까지도 가장 온전하게 형태를 유지

하고 있는 문 앞에 멈춰선 훼이는 주저 없이 문을 열었다.

< 누구냐...... >

훼이는 축 늘어진 유안과 어느새 창백한 기운이 사라진 얼굴을 하고 있는 청

년을 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이  위태로워 보였던

청년은 어느새 몸에 걸친 장포에 어울리는 체격이 되어있었다.

훼이를 본 청년은 이채로움을 담은 시선으로 몸을 돌렸다.

" 역시.... 교룡(交龍) 이었나."

훼이가 낮게 내뱉자 청년은 미소했다.

< 당신은 분명 흑룡족의 후계자 였었지....... >

청년은 훼이를 아는 듯 했지만 훼이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의 변화조차 없었

다.

" 그 아이는 내 혈육이다."

< 이 아이 말인가. 내게 어울리는 기운을 가지고 있었지...... >

그렇게 말하며 청년은 낮게 웃었다. 더 이상은 그의  목소리에서 냉기가 느껴

지지 않았지만 지금의 목소리에는 어딘지 모르게 광기가 배어있는 듯 했다.

잠시 청년을 응시하던 훼이는 거침없이 유안의 앞으로 다가섰다. 유안의 얼굴

은 창백하게 굳어져 있었다.

청년은 훼이가 유안의 몸을 안아 드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가 막 생각

난 것처럼 말을 꺼냈다.

< 알고 있을 텐데..... 용족의 피에 인간의 피가 섞이면 어떻게 되는지...... >

깊게 가라앉은 훼이의 눈이 청년에게로 향했다. 담담하게 훼이의 시선을 맞받

은 청년은 가볍게 얼굴을 굳혔다.

" 역린(逆鱗)은 건드리지 않는 게 좋아..."

그렇게 말하는 훼이의 음성에 담긴 것은 명백한 적의 였다.

========================================================================

오늘은 보충 설명을 조금 하겠습니다. 여기서 자주 등장하는 공간이라는 것은

차원과 차원을 이어주는 통로 같은 곳입니다. 시간의 영향을  받지 않는 곳이

죠. 그리고 역린(逆鱗)은 알고  계시겠지만 용의 목  아래에 존재하는 거꾸로

된 비늘입니다. 그 역린을 건드리면 살아날 생각은 버리는  게 좋다고 전해질

정도죠. 약점을 뜻하는데 약점이라기 보다는 건드리면 죽어! 이런 느낌이죠..^^

요즘 자료조사 때문에 700페이지가 넘는 책 두권을 읽고 있는데 재미는 있지

만 솔직히 너무 두꺼워요....T.T

내일 올릴(아직 다 쓰지 않았지만^^) 부분에서는 뭔가가 벌어질 듯 하네요.

앗..오늘도 읽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당... *^0^* 아이 조아..

번 호 : 580 / 3334 등록일 : 1999년 06월 22일 23:19

등록자 : 까망포키 이 름 : 포키 조 회 : 280 건

제 목 : [연재] 흑룡의 숲 제 4장 二.

흑룡의 숲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