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장 침묵(沈默)
二.
< 의외로군...... >
훼이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깊게 가라앉은 눈에서는 조금씩 살기가
내비치고 있었다.
< 분명 당신도... >
" 더 이상의 것을 말한다면 내 힘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지."
남자는 훼이의 날카로운 시선에 움찔하며 말을 멈췄다.
" 아무리 이곳이 명계라해도 질서에서 어긋난 자는 사라지는 것이 좋아."
남자는 피식거리며 웃었다. 그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 훼이 쪽으로 다가섰
다. 명백한 비웃음. 남자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그것이었다.
< 용족들이 가진 자부심이란 게 그런 거였나? 물론 용족의 피가 대단하긴
하지.... 이렇게 내 모습을 되돌릴 수 있을 정도니까...... >
훼이는 창백하게 늘어져 있는 유안을 내려다보았다. 분명 지금 이 상태가 지
속된다면 유안은 깨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닮진 않았지만 지금 유안의 모습에서 훼이는 지난날의 슬픈 기억을 보았다.
자신의 목숨과 바꿔서라도 되찾고 싶을 만큼 마음속 깊은 곳에 간절하게 남아
있는 기억.
" 그들이 오기 전에 널 네가 있을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주지."
한 손에는 유안의 몸을 그대로 안은 채 훼이는 자유로운 다른 한 손을 서서히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저 서늘한 눈으로 남자를 바라볼 뿐 훼이는 입조차 벌리지 않았다.
어느 순간 공기가 팽팽하게 곤두서는 듯한 느낌이 방안에 가득차기 시작했다.
남자는 여전히 비웃음을 띤 얼굴로 훼이를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 망설임 없이 내게 힘을 뿜어낼 수 있다면..... >
남자의 말에 훼이의 눈동자가 미미하게 흔들림을 보인 것 같았다. 하지만 여
전히 방안을 가득 채운 팽팽한 공기는 약해지기는커녕 점점 터질 듯이 커져
가고 있었다.
* * * *
" 고맙습니다........."
흐릿한 눈으로 훼이를 보려 애쓰며 비영은 입을 열었다.
훼이는 알고 있었다. 그리 길지 않았던 60여 년간의 시간들. 용족에게 있어서
는 하루 정도로밖에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짧은 시간이었지만 인간인 비영에
게는 실로 많은 것을 겪었던 무수한 세월이었다.
이제 곧 눈을 감을 비영을 눈앞에 두고 훼이에게 떠오른 것은 마지막으로
보았던 젖어있는 화연의 눈이었다.
비는 그저 비영의 손을 굳게 잡은 채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갈라지고
거칠어진 비영의 손이 전해주는 온기를 기억 속에 새기려는 것처럼 비는 필사
적으로 그 손을 잡았다.
" 당신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분명 나는 삶이 불행하다고 여겼겠지요...."
그렇게 말하며 비영은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를 머금었다.
" 당신이 나타남으로 해서 화연은 행복하게 짧았던 삶을 살아갈 수 있었고
나 역시 결코 후회하지 않을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노인의 목소리라고는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차분하게 비영은 말을 이었다.
" 비록 이제 더 이상 비가 자라는 모습을 볼 수는 없을 테지만 지금 이렇
게 두 눈에 당신과 비의 모습을 담을 수 있으니 여한이 없군요."
훼이는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알 수 없는 감정에 조금 당황하고 있었다.
비영이 보여주는 저 미소가 왠지 모르게 훼이의 마음을 잡아당기는 것이었다.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 인간이라고는 보여지지 않는 담담한 그 모습에. 비영이
한마디씩 꺼내는 차분한 목소리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이제 꺼져가는 촛불과도 같은 비영에게 자신은 무엇을 말해
야 하는 것인지.
" 숙부님........"
계속 비영의 손을 잡은 채 놓으려 하지 않던 비가 비영을 불렀다.
" 고맙다. 비. 네가 있어줘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비영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미소를 떠올린 비영의 얼굴은
더 이상 노인의 것이 아니었다. 화연과 함께 웃음 지으며 산을 오르던 젊었던
시절의 비영이 거기에 있었다.
하나뿐인 혈육인 여동생을 위해 손에 물 한번 묻혀보지 않고 살았던 그는 험
한 산중턱에 집을 지었고 발이 부르트도록 산을 타며 살았다. 처음 자신의 손
으로 캔 약초를 판 돈으로 음식이며 화연에게 줄 옷을 샀을 때 얼마나 즐거
웠던가.
그리고 하나뿐인 동생이 이름 모를 남자의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에도 비영은 그저 조카가 태어난다는 사실에 즐거움을 느꼈을 뿐이었다.
화연은 남자의 이름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립도록 어딘가를 향해 있는 화연
의 눈에서 비영은 화연이 선택한 남자를 본 것 같았다. 그리고 마치 자신의
죽음을 짐작하기라도 한 듯이 화연은 훼이에게 줄 편지를 적어 비영에게 맡
겨 두었었다.
화연이 갓 태어난 비를 남기고 세상을 떠난 후. 비영은 언젠가 돌아올 비의
아버지를 기다리며 비를 키웠다. 그리고 마치 꿈과 같이 모습을 드러낸 훼이
의 모습을 본 순간. 비영은 화연이 택한 남자가 바로 그라는 것을 알 수 있었
다. 어딘지 모르게 범접하지 못할 기운이 서린 고귀한 인상의 남자에게 비영
은 10년 동안 소중히 돌봐온 동생의 아이를 보내주었다.
그렇게 그의 인생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닌 타인을 위해 이어져 온 삶이었다.
동생을 떠나보내고, 비를 떠나보내고. 홀로 남았지만 그는 여전히 화연과 함
께 살아온 집을 떠나지 않았다. 무언가를 기다렸던 것일까. 아니면, 추억이 서
린 곳을 버리고 싶지 않아서 였을까.
훼이는 눈을 감은 비영의 얼굴을 말없이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비영이 자신에게 가르쳐준 것은 바로 배려. 인간인 그가 말이 아닌 자신의 평
생을 통해 보여주었던 진실이 바로 그것이었다.
" 언젠가는 모든 것이 사라지겠죠. 지금 제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온기가 빠져나가고 있는 비영의 손을 여전히 잡고 놓지 않은 채 비가 말했다.
훼이는 그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 숙부님은 어떻게 그렇게 편안하게 미소지을 수 있었죠......?"
작게 내뱉은 비의 말에 훼이는 한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다가 천천히 말을 꺼
냈다.
" 인간은 때로 오랜 시간을 사는 자들보다 더 초월적인 존재가 되는 지도
모른다....."
둘의 시선이 닿는 가운데 마치 잠든 것처럼 편안하게 비영은 세월의 틀에서
벗어났다.
" 이제 돌아가자."
훼이는 아직 황토로 뒤덮힌 봉긋한 무덤을 지긋이 바라보며 발을 뗄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 인간은 대지의 품으로 돌아갈 때 가장 편안한 안식을 맞이한다고 하지."
" 숙부님의 기다림은...... 분명 값진 것이었죠?"
훼이는 눈물이 맺혀있는 비의 얼굴을 향해 작게 미소지으며 답했다.
" 네 유년을 그와 함께 보내서 다행이다."
비 역시 훼이를 향해 미소를 보냈다.
그리고 비는 비영의 무덤에서 등을 돌렸다.
" 다음에 다시 이곳을 찾을 때엔 분명 비영의 휴식터도 푸르게 변해있을
거다."
걸음을 옮기는 비의 모습은 어느새 훌쩍 커버린 것 같았다.
* * * *
< 내 이름은...... 천오. 청룡족의 여인과 인간 남자의 사이에서 태어났지.....>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팽팽하게 곤두서 있는 방 안에서 인간의 피를 받은 교
롱(交龍) 천오는 담담한 어조로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 다른 것은 몰라도 용족들은 기이하게 인간의 피를 거부하지. 아니, 경멸
하는지도 몰라.... >
우수어린 천오의 목소리가 울려퍼짐과 동시에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기
운이 그를 향해 몰려들었다. 실날같이 이어지던 긴장의 끈이 풀린 것 처럼 일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 사라져......."
평소의 훼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차가운 어조가 울렸다.
그저 바람이 스쳐지나간 것 처럼 아무런 흔적도 없이 방안에 가득 차있던 기
운은 일시에 사라졌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보인적이 없었던 훼이의 힘이었
다. 주문으로 행해지는 힘의 발휘가 아닌 순수한 힘의 움직임.
< 늦었어............. >
간간히 끊어지는 듯이 미약한 음성이었지만 그것은 분명 천오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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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왓.....무지 졸리다. 우웅....자고 싶어...
이번 4장도 그리 짧지만은 않을 것 같네요. 좀 시시하다고 느끼셨다면 본격적인
내용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써서 대체 뭘 썼는지 모르겠습니다...--;)
뒷 내용은 구상해 놨는데 왜 여기서 막히는 것일까.....
읽어 주신 분들께 감사를 전하며........
번 호 : 591 / 3334 등록일 : 1999년 06월 23일 23:28
등록자 : 까망포키 이 름 : 포키 조 회 : 275 건
제 목 : [연재] 흑룡의 숲 제 4장 三.
흑룡의 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