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장 침묵(沈默)
三.
소용돌이 치는 듯한 공기의 움직임과 함께 검은 빛을 띄는, 속이 비어있는
듯이 보이는 공간의 문이 열렸다. 그것은 용족들이 사용하는 공간을 여는 술
(術)과는 어딘지 모르게 성질이 다른 것 같았다.
" 반가워요. 훼이.... 거의 500년 만에 보는 것 같군요."
눈에 띄게 화려한 옷차림을 한 여인이 공간에서 빠져나오며 훼이에게 말을
건넸다. 그리고 그녀의 뒤를 따라 살아있는 존재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 4명의
남녀가 따라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높게 틀어올린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벽쪽에 쓰러져 있는 천오에게 시
선을 던졌다.
" 그가... 당신을 화나게 했나 보군요. 하지만 이곳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나의 지배를 받죠. 당신의 힘으로도 그를 죽일수는 없어요."
훼이는 그녀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낮은 어조로 말했다.
" 나의 혈족을 다치게 한 대가를 치르려는 것 뿐이다."
그녀는 날카롭게 웃었다. 공기를 긁는 듯 소름끼치게 울리는 웃음소리로.
어깨를 들썩이며 웃는 그녀의 움직임 때문에 머리카락에 장식된 갖가지 보석
들이 사방에 빛을 뿌리며 흔들렸다.
" 여전하군요. 혈육에 대한 당신의 집착은...."
" 집착이라고 말해도 좋아...."
그녀는 요란하게 다시 한번 웃었다. 그리고 웃음을 멈춘 그녀의 얼굴에서는
섬뜩한 요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 명계의 모든 것들은 나의 관할. 아무리 당신이라도 손을 댈 수는 없어
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뒤쪽에 공손히 시립해 있는 남녀에게 무언가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두명의 남자가 천오쪽으로 다가서 그를 일으켜 세웠다.
" 당신이 안고 있는 그 아이가 현재 흑룡왕의 후계자인가 보죠?"
" 내게 대답할 의무는 없지."
짧게 대답하고나서 훼이는 공간을 열었다.
" 제 허락도 없이 이곳에서 빠져나가려는 건 아니겠죠?"
훼이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 보았다.
" 요희(妖姬). 그대의 힘으로 날 얽어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
지..?"
" 그런 건 두고보면 알겠죠."
어느새 요희의 목소리는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리고 치켜 올라간 붉은
색의 눈동자는 적의를 담은 채 훼이에게로 향했다.
소리도 없이 요희의 몸에서 강한 기운이 흘러나와 훼이를 덥쳐갔다. 하지만
그 기운은 훼이의 몸에 닿기도 전에 무형의 기운에 의해 튕겨져 나갔다.
요희가 내뿜은 기운의 여파로 인해 훼이가 열어놓은 공간이 흔들리며 약간의
비틀림을 보였다.
" 이대로 돌아갈 순 없어요."
날카로운 그녀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훼이는 그대로 몸을 돌려 공간 안으로
들어섰다.
무심한 검은 눈동자가 요희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곧 공간의 문이 닫혔다.
요희는 날카로운 눈으로 훼이가 사라진 자리만을 응시하다가 갑자기 무슨 생
각을 했는지 요란하게 웃어댔다.
" 좋아. 난 당신의 약점을 알고있어."
그렇게 중얼거리고 나서 요희는 허리를 숙인 채 힘겹게 서 있는 천오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언젠가 천오가 내뿜었던 것과 같은 투명한 검은 빛이 그
녀의 손에서 뻗어나와 천오의 몸을 감쌌다. 얼마 지나지 않아 힘겹게 숨을 토
하던 천오는 혈색이 돌아온 얼굴을 들어올렸다.
" 천오. 그대에게 한가지 일을 맡기도록 하지."
방금전까지만 해도 요사스럽게 웃던 요희의 얼굴은 어느새 냉정한 지배자의
그것이 되어있었다.
" 분부만 내리십시오."
" 그대는 지금 이순간부터 어린 용족들의 힘을 빨아들여 그대의 힘을 키우
도록 해. 그리고......."
요희는 잠시 말을 끊었다.
" 그가 가장 가슴아프게 간직하고 있는 모습으로 그대를 바꾸어주지. 그 모
습을 가지기만 하면 그를 없앨 수 있어."
요희는 입술 끝을 살짝 들어올리며 웃었다.
" .......두고보지. 훼이. 그대가 과연 그 모습을 눈에 대하고 이겨낼 수 있을
지......"
그녀의 붉은 눈은 피를 말릴 정도로 섬뜩하게 빛났다.
* * *
안절부절 하며 사실(私室) 안을 왔다갔다 하고 있는 라이엔의 모습을 미하는
무감동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한 시진 정도밖에 흐르지 않았는데도 며칠은 지난 듯이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간 것 같이 무기력했다. 미하와 라이엔은 훼이의 모습이 사라진 그 시
간부터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아무 말이나 꺼내기라도 하면 바로 유안
의 일을 말할 것 같았기에 아예 말 조차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더 흐른후. 라이엔과 미하는 어렴풋이 느껴지는 공간
이 열릴때의 파동을 느끼고 재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사실의 한 구석
에서 공간을 통해 막 걸어나오고 있는 훼이의 모습이 보였다.
미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달려가다시피 훼이의 앞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그것은 라이엔도 마찬가지 였다.
" 며칠간 정양을 시키면 곧 깨어날 거야. 생기를 많이 잃기는 했지만."
조금전 명계에 있을 때만 해도 눈에 띄게 창백했던 유안의 얼굴은 고르게 혈
색이 돌고 있었고 마치 잠든 듯이 평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라이엔은 훼이의 품에 안겨있던 유안을 조심스럽게 건네 받았다.
" 형님.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 정말 고마워요. 훼이...."
미하는 눈에 눈물까지 글썽이며 훼이에게 말을 건넸다.
" 나 역시 흑룡 일족의 하나일 뿐이니까 당연한 일을 한거다. 유안은 소중
한 후계자니까."
" 형님. 오늘 만큼은 궁에서 머물다 가세요. 드릴 말씀도 있고..."
라이엔의 말에 훼이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 그냥 오늘은 돌아가겠다. 그리고 내일 다시한번 들르도록 하지."
" 궁은 불편하신가요...."
미하가 묻자 훼이는 조금 씁쓸해보이는 표정을 떠올렸다.
" 제게 가장 잘 어울리는 곳은 그 숲 뿐이죠."
이래서 싫었다. 일족들을 대할때마다, 궁 안에 발을 들일 때 마다 기억 저편
에서부터 떠오르는 시간의 파편들은 평정심을 유지해왔던 훼이의 마음을 휘
저어 놓았다. 이제 굳게 닫으리라고 결심한 자신의 마음.
무슨 일이 있더라도 다시는 궁으로 돌아올 날은 없어야 한다. 그것만이 훼이
에게 있어서는 유일한 최선책이었다.
훼이의 가벼운 손길에 의해 다시 공간이 열렸다.
" 형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훼이는 엷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훼이가 없는 숲은 너무나 텅빈 공간처럼 느
껴졌다.
유에린은 바닥에 놓인 채 은빛을 발하고 있는 검을 집어 들었다. 자신이 사용
하던 검은 나무 그루터기 위에 올려놓은 상태였고 훼이가 쓰던 검은 그가 급
히 자리를 떠났기에 아무렇게나 바닥에 팽개쳐진 상태였다.
훼이의 세검에도 역시 손잡이 부분에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비(飛)라
는 한 글자. 그 이름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유에린으로서는 알 수 없었
지만 각각 이름이 새겨져 있는 이 검에 지난 추억이 담겨 있는 것만은 확실
했다.
" 너무 늦은 건 아니겠지."
유에린은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돌아선 유에린의 눈에 막 사라져가는 공간의 모습이 비쳤다.
" 빨리 돌아오셨네요."
" 명계는 시간이 흐르면서도 흐르지 않는 곳이니까."
훼이가 하는 말의 뜻을 잘 알수는 없었지만 훼이의 모습을 대하자 마음이 놓
였다.
" 다시 한번 검을 겨루어 보도록 하지."
" 네."
유에린은 손에 들고 있던 검을 훼이에게 건넸다.
이름이 새겨진 손잡이 부분이 다시 한번 유에린의 눈에 들어왔다가 훼이의
손에 가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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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오늘 또 추천을 받았네요. 제이슨님 감사 ^0^
음...동양 환타지라는 장르를 소화하기 위해서 나름대로 동양적인 문체를 만들었
는데요. 그게 이거에요. (잘 어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것말고도 저도 정통 환타지 쓰는 게 있거든요. 거기서의 문체는 흑룡의 숲이랑은
또 많이 달라요. 언젠가 흑룡의 숲이 다 끝나면 올릴 생각입니다.^^
읽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번 호 : 601 / 3334 등록일 : 1999년 06월 25일 00:05
등록자 : 까망포키 이 름 : 포키 조 회 : 288 건
제 목 : [연재] 흑룡의 숲 제 5장 一.
흑룡의 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