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장 흩날리는 꽃잎
약속하자.
넘치는 이 술한잔으로
끝나지 않을 시간동안
어디에서도 너와 내가
함께일 것을.
一.
" 파이론. 여기가 좋지 않겠어요?"
가벼운 흰색 경장 차림을 한 챠렌은 아무런 장식 없이 머리를 묶고 있어 무척
이나 자유분방해 보였다.
파이론은 그녀가 가리킨 넓은 초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파이론은 언
제나 처럼 활동적인 중간 길이의 파오를 걸치고 있었다. 궁에 있을 때 입는
옷보다는 좀 더 평범한 천으로 만들어진 것이었지만 현재 입고 있는 파오역
시 꽤나 고급스러운 소재가 쓰인 것이었다.
푸른 들판에 선 파이론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이질적이었다. 그가 가진 흰
색의 머리카락이 더욱 그런 느낌을 전해주는지도 몰랐지만 용족이라는 그들
이 가진 이름은 하계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 오늘로서 벌써 천계 시간으로 열흘은 지났겠어요. 파이론."
" 그러니까 여기서 마지막으로 시간을 보내고 돌아가자는 거지."
챠렌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 혼인하기 전에는 이런 성격인 줄 몰랐었는데..."
" 마찬가지야. 보좌관으로서의 당신은 질릴 정도로 완벽했으니까."
둘은 지난 추억을 회상하는 듯 잠시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소탈하면서도 자로 잰 듯이 똑바른 생활을 고집하던 챠렌과 적당히 넘어가기
를 즐기던 파이론과의 만남은 분명 의외의 것이었다. 눈에 뜨일 정도의 미모
를 가졌던 챠렌은 보통의 여인들처럼 자신을 꾸미는 데 시간을 쓰지 않았다.
그녀는 무엇보다 자신의 능력을 잘 알았고, 또 그것을 적절하게 활용했다.
" 기억해요... 파이론?"
" 뭘?"
푸른 초지를 쓸어 내려오는 바람을 온 몸으로 느끼며 챠렌은 입을 열었다.
" 가끔씩 이렇게 넓은 자연을 마주 대할 때면 떠오르곤 해요...."
챠렌은 어깨에 흘러내린 몇 가닥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잠시 말을 멈췄
다.
" 아버지의 마음이란 거......"
"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 제가 감상적이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어릴 때 전해들었던 흑룡족 왕
가의 이야기는 지금도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좋아했었죠."
파이론은 아무말 없이 챠렌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 가장 오래된 자.......인가....."
너른 평원의 어딘가를 바라보며 파이론은 작게 중얼거렸다.
" 자, 이제 오랜만에 힘을 겨뤄봐요. 아직까지 당신이 왕에 어울리는 힘을
유지하고 있는지 시험해 봐야 겠어요."
챠렌은 기대감과 장난스러움이 배인 눈동자로 파이론을 응시하며 말했다.
" 챠렌. 아무리 그 동안 변변한 싸움 한번 치르지 않았다지만 난 엄연히 백
룡일족의 왕이라고."
" 강조하지 않아도 알아요."
파이론은 챠렌을 감싸 안았던 손을 풀며 피식 웃어 보였다.
" 챠렌. 아무래도 당신은 싸움을 너무 좋아하는 것 같군."
" 당신이 백룡족 답지 않은거에요."
가벼운 어조로 대답하고 나서 챠렌은 나는 듯이 가볍게 몸을 움직여 파이론
의 반대편에 가서 섰다.
" 먼저 공격하죠."
[ 풍천( 遷) 회륜(回輪)! - 바람을 근본으로 하는 상위 공격주문 - ]
하늘을 뚫을 듯이 높게 회오리가 솟아올랐다. 강력한 힘의 여파에 휩쓸린 풀
들이 바람 속에 뒤섞여 하늘에 떠올랐다.
자신에게로 짓쳐들어오는 강력한 용권풍(龍卷風)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
쉰 파이론은 챠렌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 * *
" 전하. 돌아오셨군요."
" 비 전하께도 인사 올립니다."
막 풍천궁(風天宮-백룡궁의 정식 명칭)의 대전 안으로 들어선 파이론과 챠렌
을 맞이하며 그 동안 둘을 대신해 업무를 담당하고 있던 두명의 장로가 허리
를 숙여 인사했다.
" 그 동안 별일 없었나?"
" 아...예. 큰일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청룡궁에서 백룡왕 전하를
모시고자 하는 서신을 보내왔습니다."
파오와 장포를 섞은 듯한 모양의 넉넉한 품의 의복을 걸친 두명의 장로중 선
이 굵은 생김새의 장로가 청룡왕의 인장이 찍힌 서신 하나를 내밀었다.
파이론은 장로에게서 받아든 서신을 펼쳐 들었다. 한동안 서신을 읽어 내려가
던 파이론은 흥미롭다는 표정을 떠올리며 서신을 챠렌에게 건넸다.
" 곤륜쪽에서 그런 일이 있었군....."
" 흑룡왕비께서 상당히 놀라셨겠군요."
다 읽었는지 서신을 원래대로 접으며 챠렌이 대답했다.
" 그들은 무슨 생각으로 일을 벌인걸까요...."
" 그거야. 무료하기라도 한 모양이지."
챠렌은 심각한 얼굴이 되어있었다.
" 명계쪽이라면 섣불리 건드릴 수는 없지요."
" 오랜만에 천계가 좀 활기차지는 건가?"
챠렌은 흥미로운 듯이 미소짓는 파이론을 바라보며 가볍게 혀를 찼다.
" 전하. 그리고 비전하. 저희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두 장로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대전에서 빠져나갔다. 그들이
나가고 나자 넓은 대전 안에는 입구를 지키는 병사 네명과 시중을 들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시비 몇 명만이 남았다. 거대한 나무 기둥이 곳곳에 세워져 있
는 대전은 수백 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바닥에 깔려 있
는 백색의 대리석은 거울처럼 얼굴이 비칠 정도로 매끄럽게 손질이 되어 있
었다.
" 아직 회합까지는 시간이 좀 남았으니 사실(私室)에서 술이나 마실까?"
챠렌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 진지하게 좀 생각해봐요. 명계는 손대기 까다로운 곳인 만큼 이번 일은
심각하다구요."
" 그들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5대 용왕의 힘을 당해낼 순 없어. 그건 그렇
고 실로 오랜만의 회합이로군....."
느긋하게 말을 잇는 파이론은 위기감이라고는 전혀 느끼지 못하는 듯 태평한
얼굴이었다.
" 누가 사실에다 천화주를 좀 준비해 두도록 하거라."
챠렌이 말하자 입구 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비들은 머리를 조아리며 대전에
서 빠져나갔다.
" 큰 일이 될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자세한 사정을 알지 못하니 아무말도 않
겠어요."
파이론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챠렌에게 손을 내밀었다.
" 자, 사실(私室)로 옮깁시다."
300여년의 시간을 함께 지내왔지만 파이론은 지나치게 태평한 것 같았다.
용족. 그중에서도 다음 왕의 자리를 이어받을 후계자가 명계로 끌려간 사태가
일어났었음에도 불구하고 파이론은 여유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일
족이 아니기에 태평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감이 넘치는 것인지 챠렌으로서도
잘 알 수 없었다.
겉으로는 파이론에게 불만을 표시하고 있지만 챠렌도 속으로는 가벼운 기대
감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천계는 너무나 평온했기에..
어느 정도의 가벼운 자극은 필요한 것이다.
용족이라는 긴 수명을 가진 종족으로서는 무료한 일상을 벗어나기 위한 소재
가 필요했다. 그때문에 청룡왕은 5대 용왕들에게 회합을 요청한 것인지도 모
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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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요님이 감상을 써 주셨습니다. 아이 좋아...^0^
저는 동양환타지에 무협적 요소가 많이 내포되어 있으면 읽는 분들이 싫어하시진
않을까 생각했었는데요. 머... 무협적이라고 느끼셨다면 그렇게 봐주세요...
(사실...전 엄청난 무협 매니아 ^^)
원래 4장을 좀 길게 설정을 했었는데 지금 내용이 5장에 더 맞는 것 같아서 5장으로
넘겨버렸습니다. 어쩌면 5장은 3장 만큼이나 길어질지도 모르겠군요.
읽어주셔서 감사. 꾸벅.
번 호 : 609 / 3334 등록일 : 1999년 06월 25일 23:55
등록자 : 까망포키 이 름 : 포키 조 회 : 272 건
제 목 : [연재] 흑룡의 숲 제 5장 二.
흑룡의 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