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장 흩날리는 꽃잎
二.
성휘와 훼이가 다시 만난 것은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후였다.
다시 만난 훼이는 예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버릇처럼 지어보이던 슬픈듯
한 미소대신 희미하긴 했지만 행복해보이는 미소가 입가에 떠올라 있었다.
" 어떻게 된 거야....?"
훼이는 반갑게 자신을 맞이하는 성휘에게 약간의 의문을 담아 물었다.
" 내게도........ 내 마음을 맡길만한 여인이 생겼거든..."
그렇게 말하며 쑥스러운 듯이 웃는 성휘는 분명 행복해 보였다.
비록 1년전의 일로 본궁에서 쫓겨나 근신생활을 하고 있긴 했지만 오히려 성
휘는 답답함을 벗은 듯이 밝아져 있었다.
" 비는? 잘 있지?"
훼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 그녀는 연화(蓮花)라는 이름의......검선(劍仙)이야... 부끄럽지만 유배지에서
그녀의 구함을 받았지......"
1년 사이에 더 길게 자란 성휘의 머리카락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가지런하게
묶여 있었다.
" 다행이군... 행복해 보여서..."
성휘의 얼굴에 떠오른 어렴풋한 미소는 훼이에게도 그가 느끼는 기분을 전해
주었다.
나무를 깎아만든 정교한 목검을 들고 성휘는 자세를 가다듬었다. 성휘의 앞에
마주선 비 역시 진지한 표정으로 검을 올려든 채였다.
비록 연습이었기에 진검을 쓰지는 않았지만 마치 진검승부를 할 때처럼 둘은
호흡하나 흐트리지 않고 서로를 겨누고 있었다. 서로 대치 상태에 접어든 후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비의 검 끝이 미미한 흔들림을 보이며 성휘의 손
목을 노리고 움직였다. 비가 목검을 휘두르기 시작한 후에도 성휘는 여전히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 그리고 얇은 목검의 검날이 손목에 막 닿으려던 순간
성휘는 손목의 탄력을 이용해 자신의 목검을 움직여 비의 검을 막아냈다.
희미한 미소를 떠올리며 이번에는 성휘의 검이 비를 향해 움직여 갔다. 비는
눈하나 깜빡이지 않고 성휘의 검이 움직이는 것을 주시하며 왼쪽에서 짓쳐들
어 오는 검을 막았다. '탁'하고 나무와 나무가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둘의 검
이 허공에서 잠시 멈췄다. 그러길 여러차례. 둘의 호흡이 조금씩 거칠어 지기
시작할때쯤 비는 성휘의 눈을 마주 대하며 싱긋 웃어보였다.
" 잠시 쉬도록 할까요...."
검을 마주 대하고 있던 성휘 역시 가볍게 웃어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궁에 속한 별궁 정원답게 꽤 넓직한 초지에 주저 앉아서 비와 성휘는 서로
의 실력을 칭찬했다. 성휘로서는 검선인 연화와 대등해지고 싶다는 바램에서
검술을 연마하기 시작한 것이었지만 훼이를 따라나선 비 역시 검에 흥미를
가졌다.
" 나날이 실력이 늘어나는 구나. 이제 얼마 안있어 나 정도는 눈감고도 이
길 수 있을 것 같은데....?"
" 아직 멀었어요. 전 검을 배우기 시작한 지 한달도 채 되지 않았잖아요."
" 이제 내가 알고있는 검술은 거의 바닥이 났으니 네게 가르쳐 줄 것도 없
고 말이다."
훼이에게 주문을 배울때와 마찬가지로 비는 검술 또한 금방 익혀나갔다. 성휘
는 자신이 머물고 있는 별궁을 지키는 천군들에게 검술을 배우기도 하고 아
주 가끔이긴 했지만 연화에게도 검술을 배웠다. 그리고 그것을 비에게 가르쳐
주었다. 확실히 혼자 하는 것 보다는 둘이 함께 하는 것이 실력 향상에 도움
이 되었다.
" 오늘은 벌써 끝났나 보군."
비와 성휘는 동시에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별궁 건물과 맞
닿아 있는 동쪽편에서 공간을 열고 훼이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 무슨 일이 그렇게 바쁜거야. 요즘은 비 혼자만 보내고 말이야."
약간의 책망이 담긴 어조로 성휘가 말을 건네자 훼이는 가볍게 미소지었다.
" 이거 안돼겠군...... 둘을 위해 준비해 온 것이 있었는데....."
" 정말이세요. 아버지?"
비는 금새 기대감에 찬 눈빛을 훼이에게 돌렸다.
" 잠시만 기다려라. 너무 조급하게 굴면 주기가 싫어지거든."
말은 그렇게 했지만 훼이는 아직 닫지 않은 공간 안으로 왼손을 집어넣어 무
언가를 꺼냈다. 흰 천에 싸여있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길쭉
한 것이 막대기처럼 보이기도 했다.
" 자, 내가 주는 선물이다."
훼이는 성휘와 비에게 길다란 보퉁이를 하나씩 건네 주었다. 어리둥절한 표정
으로 그것을 건네받은 성휘는 손에쥔 그것에서 어느정도의 무게가 느껴지자
그것이 무엇인지 어렴풋하게나마 눈치를 챌 수 있었다.
비는 감싸여 있는 흰천을 서둘러서 풀었다. 그리고 자신의 손에 들린 길다란
검을 보며 탄성을 내뱉었다.
" 와..... 검이군요......"
" 손잡이를 보거라."
검신에만 정신을 팔고 있던 비는 훼이의 말에 손잡이로 시선을 돌렸다. 손잡
이에는 섬세하고 아름다운 글씨체로 비(飛)라는 자신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
다.
그리고 막 흰천을 벗겨내려간 성휘의 검에도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기뻐하며
검집에서 검을 꺼내 이리저리 검을 휘둘러보는 비와 달리 성휘는 한동안 아
무말도 하지 못했다.
" ......고마워."
훼이는 성휘 곁으로 다가선후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 맘에 드는지 모르겠는데...."
" 무척.....마음에 들어..."
성휘는 몇번이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성휘에게는 지금까지 타인에게 무언가를 받아본 기억이 없었다. 그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가슴 한구석에서 가벼운 통증이 일었다. 지금은 정말이지 행복했다.
비록 언제 끝날지 모르는 근신에 처해지긴 했지만 지금의 성휘에게는 마음
한구석을 차지한 여인 연화도 있었고, 무료하게 이어지는 자신의 시간을 함께
채워주는 비가 있었다. 그리고 어린시절부터 그토록이나 원하던 친구라는 이
름이 과분할 정도로 어울리는 훼이도 있다.
정말이지 아주 사소한 일상의 행복이었지만 성휘는 세상의 모든 것을 얻은
것 처럼 기뻤다.
" 아버지. 고맙습니다."
햇빛에 반짝이는 날카로운 검날에 시선을 빼앗긴 채 비는 큰 소리로 외쳤다.
" 진검을 가진만큼 좀더 책임감을 키워야 한다."
" 네. 명심할께요."
밝게 미소짓는 비의 머리를 훼이는 가볍게 쓰다듬었다.
* * * *
라이엔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져 있었다. 흑룡왕비 미하의 모습이 옆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아직까지 유안이 깨어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 어떤 말씀을 드려야 할지...... 유안은 괜찮습니까."
파이론은 라이엔에게 인사를 건네고 난 후 넌지시 물었다.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는지 라이엔은 파이론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그가 온 것을 알아챘다.
" 아...예.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닙니다..."
" 비께서 심려가 크시겠어요."
챠렌은 걱정이 담긴 어조로 말했다.
" 예....계속 유안의 곁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아서....."
" 그렇겠죠... 이 일로 비께서도 몸이 상하시지는 않을지 걱정 되는군요."
"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렇게 파이론과 챠렌이 라이엔에게 몇마디를 건네는 사이 다른 용왕들이 들
어섰다. 그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고 라이엔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청룡왕의 집무실은 깔끔했다. 벽면에 걸려있는 수묵화와 몇 개의 글귀들. 그
리고 한쪽 벽면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책장에는 청룡왕이 즐겨 읽는 서책들
이 잔뜩 꽃혀 있었다.
" 오늘 이렇게 자리해주신 용왕 및 용왕비들께 우선 인사를 올립니다."
먼저 인사를 건넨 29대 청룡왕 리판은 집무실에 자리를 잡고 앉은 용왕과 용
왕비들에게 차례대로 시선을 던졌다. 리판이 앉은 자리로부터 둥글게 원을 그
리며 자리한 오대 용왕과 비들은 모두 9명이었다. 이번일로 직접적인 피해를
받은 흑룡왕의 비인 미하만이 이 자리에 없었다.
" 이번 회합의 목적은 명계에서 용족을 상대로 벌인 일 때문입니다. 우선
서신으로 대략적인 내용은 말씀 드렸지만 여기 계신 흑룡왕님으로 부터 직접
사정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각각 자신의 힘을 상징하는 색의 파오를 걸친 용왕들과 간소한 궁장 차림의
비들은 모두 진중한 표정으로 흑룡왕을 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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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어제 올린 글에서 실수가 있었습니다.
백룡족의 공격주문중에 풍천 회륜이란게 있었잖아요. 거기서 풍자가 한자 지원이
안되더군요...^^ 林+風 이었는데.....(에잇..구린 컴퓨터 같으니라구)
그러면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번 호 : 613 / 3334 등록일 : 1999년 06월 26일 23:20
등록자 : 까망포키 이 름 : 포키 조 회 : 251 건
제 목 : [연재] 흑룡의 숲 제 5장 三.
흑룡의 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