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룡의 숲-18화 (18/130)

제 5장  흩날리는 꽃잎

三.

" 그곳. 서천(逝川)은 천상계에서 가장 험한 지역으로  소문난 곳이지. 깍아

질 듯이 높은 산들과 험하디  험한 지형. 그때문에 그곳에는 사람이  살지 않

아. 그리고 내가 유배를 명 받은 곳은 그 서천에서도 가장  끝에 있는 서천강

부근이었어."

부드럽게 울리는 성휘의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지도

않았다.

" 혼자인 건 궁에서와 마찬가지 였지만 그곳은 너무도 고요한 곳이었지. 그

곳에 간 이후로 한달 동안은 인기척조차 느끼지도 못했었으니까. 나는 매일같

이 서천강의 강둑에 앉아서 건너편을 바라보고만 있었어.  그곳에는 서책들도

그렇다고 무언가를 할만한 건  하나도 없었거든. 그저 하루종일  멍하니 앉아

있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지."

훼이는 미안해졌다. 자신을 유일한 친구라고 말해주는 성휘를 위해 해준 것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저 지금은 지나간 이야기를 듣는 것 뿐이었지만 마음

속에서부터 성휘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 그리고 언제였는지는 확실히 기억나지  않지만.....언제나처럼 강둑에 앉아

있던 어느날. 처음으로 그녀를 만났지. 그 험한 강물위에 배를 띄우고 능숙한

솜씨로 노를 저어가며 그녀는 내가 있는 쪽으로 건너왔어.  그리고 그녀는 날

보더니 가볍게 인사를 하고  그냥 지나쳐갔지. 차갑게 느껴질  정도로 표정이

떠오르지 않은 얼굴이었는데도 선명하게 가슴속에 남았지..."

그리고 나서 성휘는 잠시 말을 멈췄다. 성휘의 입가에  희미하게 떠오른 미소

는 그때를 회상하듯 아련함이 묻어 있었다.

" 검선이라면 어떤 자리에 있지?"

훼이는 처음으로 연화에 대해 물었다.

" 검선 중에서도 천(天)의 직급을 가지고 있지.... 파란색의 허리끈으로 상징

되는... 아마도 지금 천의 직급을 가진  건 그녀뿐일거야. 천의 직급은 검선중

에서도 최고를 칭하지. 천군  대장보다도 높은 자리니까...  그리고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녀의 실력을 볼 수 있었는데  그녀의 손에 들린 검날의 움직

임도 그리고 소리조차도 들리지 않을 정도였지."

연화라면 훼이도 단 한번이지만  본 적이 있었다. 얼굴에  표정다운 표정조차

떠올리고 있지 않아 과연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무심한 얼

굴. 하지만 성휘를 대할 때 만큼은 그녀의 얼굴도  조금이지만 부드럽게 풀렸

다. 근신중인 성휘였기에 현재 천궁의 수비를 맡고 있는  그녀는 궁을 둘러본

다는 빌미로 잠시 별궁에 들르는 것이었다.

" 그녀에게 구함을 받은 건 서천쪽으로  도망친 한 죄인이 날 공격한 직후

였어. 그때 난 무기라고 할 만한건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데다가 설사 있었다

고 하더라도 그걸 휘두르는 방법조차 알 수 없었을 테지만. 나름대로 몸을 굴

려 피하긴 했는데 죄인이 가진 검에 팔을 스치는 상처를 입었지. 그리고 바로

그때 그녀가 나타났지."

성휘는 싱긋 웃어보였다.

" 아무래도 그때 그녀의 검 휘두르는 모습에 반했나봐. 그때부터 나도 검을

배워야 겠다는 생각을 했으니까."

한쪽 벽에 걸어둔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검을 바라보며 성휘는 다시 말을 이

었다.

" 유배지에서 7개월정도 후에 돌아오게 되기까지  난 그녀와 함께 있을 수

있었지. 그녀가 맡은 서천을 둘러보고 점검하는 일이 끝나면  그녀는 내게 피

리부는 것을 가르쳐 주었지. 그녀가 가진 검은 평소에는  길다란 옥피리의 모

양을 하고 있었는데 싸움을 할 때에만 검으로 변했지. 예전에 검선의 천의 직

급을 가진 자에게 주어지는 검이라고 들은 적이 있어."

" 요즘 자주 피리를 분다 했더니 그런 사정이 있었군."

성휘는 조금 멋적은 듯이 웃었다.

" 그리고 그때 비로소 알 수 있었어. 훼이가  어떤 마음으로 화연에게 말을

걸었을지."

훼이는 아무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지금은 무척 행복하다는 걸  느끼고 있어. 소중한 이가  셋씩이나 있으니

까."

" 다행이군. 그렇게 느끼고 있다니..."

" 이제 내게도 운이 따라주는 지도 모르지."

아직 상천궁에서는 성휘와 연화가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하지

만 결국 그 사실은 알려질 것이고 그때가 되면 또다시 성휘는 주위의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 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성휘의 얼굴에 떠오

른 미소를 이대로 지켜봐주고 싶었다.

피의 이어짐.....

훼이는 잠시 자신의 몸 속에 흐르는 피가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

았다. 이제 인연을 끊은 부모님과 자신의 일족들. 그리고 자신의 아들 비.

그리고 한 순간 훼이는 지금의 평화가 영원히 계속  되기를 빌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간절하게.

*            *            *

성년식.

태어난지 100년이 되는 해에 치르게 되는 그 의식은 한명의 성인으로서 용족

의 일원으로서 다시 태어나는 날이었다. 지금까지 몸 속에  잠재되어 있던 용

족이 가진 진정한 힘을 쓸 수 있게 되는 날이자 이제 앞으로의 삶을 혼자 힘

으로 헤쳐나갈 수 있는 나이와 힘을 가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성년식은 힘을

깨우기 위한 노래와 진언이 그  주를 이룬다. 특별한 힘이 담긴  노래를 통해

몸속에 잠들어 있던 힘을 깨우고 진언으로 성년이 된 것을 축하하는 것이다.

보통 성년식을 치를때가 되면 핏줄이 이어진 친족들이 모여서 축하를 해주기

마련이었다. 생애에 단 한번 맞이하는 날이니 만큼 소란스럽다고 여겨질 정도

로 많은 이들이 모여드는 것이 상례였다.

하지만 비의 성년식에는 훼이를  제외한 단 두명의  하객들이 예정되어 있을

뿐이었다. 아무도 반쪽짜리 용족 아이의 성년식은 축하해주려 하지 않는 것이

었다. 초라하게 치뤄질 비의 성년식이 다가올수록 훼이는 자신을 책망하는 마

음이 더 깊어져 갔다.

적어도 아버지라면 성년식 만큼은 기억에 남을 수 있도록 치뤄주고 싶었건만

아직까지도 완고한 흑룡왕은 비의 존재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이제는 놀랄 정도로 자신의 모습을 닮아있는 비의 모습을 대할때마다 그리고

흔들림 없이 고요한 눈을  대할때마다 훼이는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끼곤 했다. 나이와는 맞지  않는 침착함을 가진. 단 한번도 잘

못된 일을 한 적이 없는 자신의 아들.

요즘들어 부쩍 힘이 강해진  비는 이제 혼자서 수행을  나갈 수 있을 정도가

되어 있었다. 성인식을 치루기 전에 하계에 다녀오겠다며 떠난 비의 뒷모습을

훼이는 깊이 기억하고 있었다.

언제 그렇게 커버렸는지......

그렇게 홀로 정자에 앉아 비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던 훼이는 이곳으로 오고

있는 낯선 방문자의 존재를 깨달았다. 아직 도착하지는 않았지만 미미하게 느

껴지는 진동이 곧 공간이 열릴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훼이의 짐작대로 공간이  열리며 누군가의 모습이

나타났다.

붉은색의 치파오를 걸친 늘씬한 여인의 모습. 예전보다 더  강해진 듯한 기운

이 그녀의 전신에 맴돌고 있었다.

" 오랜만이군요. 훼이...."

낯선 얼굴은 아니었다. 아니, 잘 알고 있는 모습이었다. 타는  듯이 붉은 머리

카락을 자연스럽게 늘어뜨린 그녀는 28대 홍룡왕 후계자인 화란이었다.

그녀와는 지난번에 상천궁에 초대받았을 때 이후로는 한번도 만난 적이 없었

다. 훼이는 갑작스런 그녀의 방문에 놀라긴 했지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 오랜만입니다. 화란."

화란은 훼이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 주어 기쁘다는 듯이 싱긋 웃어보였다.

" 훼이답지 않네요. 이렇게 적막한 곳에서 파묻혀 지내다니...."

" 무슨일로 이곳까지 찾아오셨습니까. 바쁘실텐데...."

화란은 훼이의 반대편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 당신의 아들 이야기는  들었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성년식을 치룬다죠?

노래를 불러줄 사람은 구했나요?"

경쾌하게 울리는 목소리였다. 훼이는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 그건 왜......"

" 혹시 아직까지 구하지 못하셨다면 제가 그 역할을 할까 해서요."

" 화란... 당신이 말입니까....?"

훼이는 의외라는 듯이 물었다.

" 물론이죠. 성년식에서 노래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알고 계시잖아요."

" 그거야 그렇지요."

" 제 짐작이 맞다면 아직 구하시지 못한 것 같은데.....맞나요?"

훼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화란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 그럼 제게 맡겨주세요. 성년식은 하객이 많은 편이 좋으니까요."

화란의 저의가 무엇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그녀가 먼저 나서고 있었기

에 거절할 수는 없었다.

" 그럼 부탁드립니다."

훼이는 예의바르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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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파오는 여성용 중국 전통 복식의 이름입니다. 장예모 감독의 영화에서 공리가

자주 입고 나오죠.

5장은 제목처럼 많은 사건이 나옵니다. 얼마나 길어질지는 저도 잘 몰라요.

전 무대뽀로 쓰기가 특기이기 때문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꾸벅.

번 호 : 644 / 3334 등록일 : 1999년 06월 28일 00:21

등록자 : 까망포키 이 름 : 포키 조 회 : 259 건

제 목 : [연재] 흑룡의 숲 제 5장 四.

흑룡의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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