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룡의 숲-21화 (21/130)

제 5장  흩날리는 꽃잎

六.

"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모든 참석자들의 만장일치로 오랜만에 열린 회합은 끝났다.

다른 용왕과 비들이 하나 둘씩 인사를 나누며 자리를 뜨고 있을 때, 라이엔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두 손을 포갠 채 자리에 그대로 앉아있었다.

" 흑룡족에게 가장 오래된 자가 있다고 해서 너무 자만하는 것 아닙니까?"

한참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던 라이엔이 막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을 때 홍룡

왕 란이 명백하게 감정이 섞인 어조로 말을 건넸다. 다른 용왕들은 이미 방을

빠져나간 후여서 방 안에 남아있는 것은 라이엔과 홍룡왕 부부뿐이었다.

" ......무슨.."

" 사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모든 용족들이 암묵적으로  흑룡족에게 한발 양

보하고 있는데. 전부터 무척 기분나쁘게 생각했습니다."

라이엔은 일순 황당함과도 같은 감정을 느끼며 아무말도 내뱉지 못했다.

" 그 수명을 벗어난 것이 그토록 대단한  일이라면 저도 그렇게 되고 싶을

정도군요."

명백한 비웃음이 담긴 그의 말에 라이엔은 울컥하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평

소에 차분한 태도만을 보여온 라이엔으로서는  스스로도 자신의 마음속에 이

런 격렬한 감정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놀랐다.

" 무슨 말씀입니까.... 제가 우둔해서 그런지 알아듣기가 힘들군요."

" 하하. 이거 참 의외로군요. 천하의  흑룡왕께서 우둔하다는 말을 다 쓰시

다니..."

순간적으로 터져나올 듯이 끓어오르던 화를 라이엔은 이성으로 억눌렀다.

" 란, 그만하세요. 대체  무슨 짓이에요. 홍룡족의 왕이면  왕답게 처신하세

요."

확실히 여인들은 눈치가 빨랐다. 홍룡왕비는 라이엔의 얼굴에  떠올랐다 사라

진 분노를 알아채고 자신의 남편을 만류했다.

" 사죄드립니다. 흑룡왕님. 저희 홍룡족들은 워낙 성격이 불같아서...."

" 아..예. 괜찮습니다."

고개까지 숙여가며 정중히 사과하는 홍룡왕비를  보며 라이엔은 화를 누그러

뜨렸다.

부인의 말에는 꼼짝을 못하는지 란은 잔뜩 찌푸린  표정을 떠올린 채 라이엔

을 노려보고만 있었다.

"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라이엔은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 홍룡왕 부부에게서 등을 돌렸다.

" 다음에는 그분도 꼭 함께이길 빌겠습니다."

어린아이가 유치한 말장난을 하듯이 란은 뒤돌아선 라이엔에게 말했다.

라이엔은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을 뿐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            *            *

글세...... 생각해 본 적이 있었던가......

'가장 오래된 자' 라는 말.....

정해져 있는 시간의 법칙을 무시하고 자신과 관련된 무수한 이야기를 남긴채

조용히 살아가고 있는 흑룡 훼이. 언제나 그렇듯 시간을 초월한 자는 다른 이

들의 관심을 끌기 마련이었다.

라이엔에게 있어 훼이는 형이라는 단어 이상의 존재였다. 그가 태어나기도 전

에 훼이는 이미 후계자의 자리에  있었고, 훼이가 후계자의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 훼이보다 이백살 정도 아래인 남동생이 후계자 위를 물려받고, 그로부터

다시 라이엔이 후계자가 되기까지 훼이는 흑룡궁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아니, 몇번 돌아온 적은 있었지만 라이엔은 그때 훼이를 보지 못했었다. 그만

큼 훼이는 흑룡궁으로 돌아오는 것을 꺼려했고 방문하는 일이 생겨도 무척이

나 조용히 머물다 떠나가곤 했다.

천년이라는 세월을 살아가는 용족. 다른  이들의 눈으로 보면 초월한  존재인

그들. 그 용족에게 있어서도 그 천년의 세월을 뛰어넘은 훼이라는  존재는 화

제가 되기에는 충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수명을 뛰어넘은 이유가  하늘이

준 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것이었기에 더더욱...

라이엔도 어렸을 적에 훼이가 머무는 별궁에 찾아간 적이 있었다.  자신의 가

장 가까운 혈족인 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훼이의  이야기를 다른 이를

통해서 들어야만 했으므로. 라이엔은 형이라는 존재에 대한 막연한 동경 같은

것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어느날. 라이엔은 훼이가 머물고 있는 별궁으로 갈 결심을  하고 그것

을 실행에 옮겼다.

그리고 라이엔의 두 눈으로 확인한 형의 존재는  다른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큰 것은 아니었다. 그저  깊은 슬픔에 잠겨있는  상처받은 눈을 가진  고독한

얼굴을 가진 낯선 존재였을 뿐이다.

시기가 나빴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때의 훼이는 더 이상 떨어질 수 없을 만큼

깊이 바닥으로 추락한 상태였으니까. 멀리서 그런 형의 모습을 바라보던 라이

엔은 가까이 다가가 인사조차 건네지 못하고 다시 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라이엔이 24대 흑룡왕이 되던 그때.  훼이는 더 이상 깊이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가라앉은 눈을 한 채 흑룡궁에 찾아왔었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

하고 자신이 추구하는 것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벗어던질 수 있는 과감함

을 가진 훼이는 그곳에 없었다. 그저 검고 검은 두 눈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담

고 마음을 닫아 버린 어떤 남자가 있었을 뿐이었다.

" 흑룡왕 전하. 유안님께서 깨어나셨습니다."

생각에 잠긴 채 무의식적으로 걸음을 옮기던 라이엔을  향해 기쁨에 잠긴 목

소리로 시비가 말을 건네왔다. 생각에서 벗어나 고개를 돌려보니 언제나 가장

가까이에서 유안의 시중을 들던 시비가 자신의 앞에 있었다.

" 얼마나 됐지?"

" 반시진 정도 전에 깨어나셨습니다. 지금은 훼이님께서 가져 오신 약을 드

시고 비전하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계십니다."

" 형님이....  아직 계신가?"

" 예. 세분이 함께 계십니다."

" 전해줘서 고맙구나."

라이엔은 시비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발걸음을 빨리했다. 회합이  열리지만 않

았어도 자신 역시 미하처럼 유안이 깨어날 때 까지 옆에서 떠나지 않았을 것

이었다. 핏줄이란 말로도 설명하지 못할 강한 끈과도 같이 연결 된 것이었다.

" 유안......."

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서며 라이엔은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 돌아오셨군요."

미하가 가볍게 미소를 띄운 얼굴로 라이엔을 맞이했다.

" 걱정 끼쳐드려서 죄송해요. 아버지."

" 몸은 괜찮으냐?"

" 네. 백부님이 주신 약 덕분에 이젠 완전히 나았어요."

라이엔이 듣기에도 유안의 목소리는 보통때와 다름없이 힘찬 울림을 담고 있

었고 혈색 역시 보통때와 같았다.

라이엔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유안이 누운 침상옆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

앉았다. 유안의 머리맡에 의자를 놓고 앉아있던 훼이는 아무말도 없이  두 부

자가 이야기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 형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라이엔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가느다란 미소를 떠올리고 있는 훼이를

향해 몸을 돌리며 말했다.

" 그런 감사는 필요없다..... 당연한 일이니까......"

" 백부님은 약초에 관한 것도 잘 알고 계셔서 놀랐어요."

유안은 언제나 처럼 방긋 웃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세사람을 향해 밝게

말했다.

그러자 훼이는 손을 내밀어 유안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으며 담담하게 웃었다.

" 괜히 나이만 먹은 게 아니니까 말이다..."

" 훼이. 오늘도 그냥 돌아가시지는 않겠지요?"

미하는 훼이가 돌아가려 할 때 미소를 보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훼이는

대답없이 또다시 가볍게 웃었다.

" 형님. 하루쯤은 머물다  가세요. 유안이 형님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 백부님. 부탁이에요."

우습게 느껴질 정도로 셋은 훼이가 돌아가려는 것을 만류했다.

" 솔직히 이야기 해서 난  이곳에 떠도는 과거의 기억들이  싫다.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난 강한 자가 아니야."

" 형님....."

자신을 향한 세쌍의 시선을 느끼며 훼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 훼이. 주제넘게 들리더라도 전 이말을  꼭 하고 싶었어요. 망각은 남겨진

자에게 주어진 하나뿐인 자유라는 것을요......"

" 다음에 또 들르도록 하지요."

등을 돌린 훼이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세사람은 볼 수 없었다.

========================================================================

우웃.....머리 뽀사진다...아..이 얽히고 ?힌 시간들이여....

난 숫자계산하는 게 젤 싫은데 어쩌다 이런 내용이 된 것인가.....T.T

나도 비축분 있었으면 좋겠다....매일 한편씩 쓰려니 언제 머리가 터질지 조마

조마.....(웃..동시연재는 힘들어... 빨리 완결내자... 완결....)

읽어주셔서 감사.....모기 조심하세요~~~

번 호 : 666 / 3334 등록일 : 1999년 07월 01일 01:41

등록자 : ZPFANTS4 이 름 : 포럼운영 조 회 : 199 건

제 목 : [연재] 흑룡의 숲 제 5장 七.

흑룡의 숲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