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장 흩날리는 꽃잎
七.
감았던 눈을 떴을 때 비의 눈에 비친 세상은 평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을 주
었다. 지금까지의 자신이 정해진 어느 높이의 세상을 보아왔다고 한다면 지금
보이는 세상은 하늘 위에서 내려다 보는 것 처럼 넓고 작았다.
" 축하한다. 한 사람의 어엿한 흑룡족이 된 것을."
언제나 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떠올린 얼굴의 성휘가 축하의 말을 건넸다.
" 축하드려요."
그리고 성휘의 곁에 선 검선 연화 역시 짧은 축하의 말을 전했다. 훼이가 그
렇듯이 비 역시 연화가 길게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은 없었다.
비는 자신에게 축하를 전하는 그들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것으로 답했다.
같은 용족인 훼이와 화란. 그리고 별궁의 식솔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
만 그들의 얼굴에 떠오른 엷은 미소는 이제껏 지켜봐온 비의 성장을 누구보
다 기뻐해주고 있었다.
" 우린 이만 돌아가야겠어."
모든 이들이 막 별궁을 향해 몸을 돌리고 있을 때 성휘가 말을 꺼냈다.
" 벌써 돌아가시는 거에요?"
" 아직 근신중이니까...."
성휘의 처지를 알고 있는 훼이와 비는 돌아가려는 성휘를 만류하지 않았다.
" 그럼 다음에 뵙지요."
인사를 건네는 용족들을 뒤로 한채 성휘와 연화는 돌아섰다.
" 언제 봐도 천계는 아름다운 곳이야. 천상계에서 느껴지는 중압감 같은 것
이 없으니까..."
혼잣말처럼 작게 성휘가 말하자 연화는 말없이 고개를 돌려 성휘를 응시했다.
" 하루빨리 말을 꺼내고 싶은데...기회가 생기질 않는군..."
" 전 괜찮아요."
" 하지만........"
연화는 고개를 저었다.
" 지금은 이대로 있어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 연화가 그렇게 생각해 준다면 괜찮지만.... 그래도 조바심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어...."
용족들이 공간을 여는 술(術)을 쓰는 것과 마찬가지로 천인들 역시 각 계(界)
를 이동할 때는 특별한 힘을 쓰곤 했다. 용족들의 경우 아무 곳에서나 공간을
열 수 있는 힘을 가졌지만 천인들은 각 계(界)를 잇는 문을 미리 만들어 두고
그곳을 통해 이동했다. 그것은 용족들이 오행의 힘에 가장 밀접한 영향력을
가지고 마력을 끌어내서 쓰는 것과 달리 천인들은 순수한 수련의 힘을 통해
그것을 길러야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상제의 피를 이은 자들은 용족들이 태
어날 때부터 가지는 특유의 힘과 같은 피를 통해 전해지는 힘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지닌 자는 극히 일부로 보통의 천인들은 부단한 노력을 통해
서만이 그 힘을 기를 수가 있었다.
" 시간은 가장 큰 해약이 될 수도 있으니까 기다려요. 지금까지 기다려 왔
잖아요."
" 기다림이라..... 어떻게 보면 내 삶의 거의 모든 것을 채운 감정이 바로 그
기다림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연화는 막 천상계로 통하는 공간의 입구를 열었다.
"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은 수명부에 적혀있는 것 만이 전부는 아닐거라 믿
었는데......"
" 갑자기 감상에 빠진건가요?"
연화의 말에 성휘는 피식 웃으며 공간 안으로 발을 들여 놓았다.
" 어쩌면 그럴지도...... 훼이의 아들 비가 벌써 성년을 맞이했고, 나 자신이
그것을 지켜봤다는 사실이 그런 감상을 자아내게 한 걸거야."
연화는 간단한 도술로 공간을 닫았다. 그리고 다시 성휘의 곁에 나란히 서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아직까지 훼이에게 사실을 말해주지 못했어...."
" 하지 않는게 좋을 거에요."
" ........그럴까....?"
연화는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 그럴지도 모르지. 때로는 모르는 것이 더욱 행복할 수 있으니까. 다가올
날을 근심으로 채우며 기다리는 것 보다... 주어진 시간들을 즐겁게 보내는 것
이 더 나을 때도 있겠지..."
그 말을 끝으로 성휘도 연화도 입을 열지 않은 채 걸음만을 옮겼다.
* * *
검은 하늘을 촘촘히 수놓은 별들사이로 크게 얼굴을 내민 달빛을 바라보며
비는 낮은 한숨을 토해냈다.
성년이 되었다는 것. 언제고 다가올 일이었지만 막상 성년식을 치루고 나자
다시 예전의 어린 아이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어느새 훌쩍 자라버린 자신이 오늘따라 더욱 낯설게 느껴졌다.
원래 어른이란 건 이런 것일까. 그저 그동안 잠들어 있던 힘을 끌어냈을 뿐인
데 어제까지의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별개의 생물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비는 두손에 힘을 주고 손바닥을 활짝폈다. 길게 뻗은 하얀 손가락과 손바닥
에 새겨진 가느다란 선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이 두손으로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
" 성년이란 그런거야. 이제 스스로 걸어나가야 한다는 것."
어느새 기척도 없이 비의 옆으로 다가선 화란이 말을 걸었다. 그녀의 몸을 감
싸고 있는 붉은색의 치파오는 검은 밤 하늘 아래서도 선명하게 그 빛깔을 드
러내고 있었다.
" 아직 안 주무시고 계셨나요?"
" 응. 난 이런 밝은 달빛을 좋아하지. 비 역시 그런 것 같은데?"
" 그래요."
비는 선선한 밤 공기 아래에 혼자 앉아있는 것을 좋아했다. 온몸을 파고드는
희미한 냉기는 피부의 감각 하나하나를 일깨워 주곤 했다.
" 난 이제 얼마후면 29대 홍룡왕이 될거야."
커다란 나무에 기댄 채 앉아있는 비의 옆에서서 화란은 모두가 알고 있는 당
연한 말을 꺼냈다.
" 홍룡족은 전투 성향이 강한 일족이지. 무척이나 활동적이라서 한 곳에 머
무르는 걸 무엇보다 싫어해. 나도 과연 왕이 된 이후에 여러 가지 업무들을
참을성 있게 처리할 수 있을지 걱정이야."
비는 화란을 빤히 쳐다보았다.
" 내가 만약 홍룡족이 아닌 다른 용족으로 태어났다면 난 누군가의 비가 되
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난 홍룡족의 여인으로 태어났고 당연히 왕이 될 거
야."
화란이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비는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 그리고 내겐 스스로 원하는 남자를 선택할 권리가 있지. 지금까지 내게
다가온 남자는 많았지만 내가 원하는 남자는 단 한명 뿐이지."
" 제게 허락을 구하시려는 건가요...."
비의 물음에 화란은 고개를 저으며 웃어보였다.
" 그저 말하고 싶었을 뿐이야. 내가 원하는 남자가 바로 훼이라는 것을. 너
는 그의 아들이긴 하지만 그와는 별개의 영혼을 가진 존재니까."
" 아버지는 알고 계신가요....?"
" 훼이는 네 어머니 이외의 여인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어. 자신의 마음
을 차지한 것은 그녀 뿐이라고 말했지. 하지만 내 마음을 차지한 것도 훼이
뿐이야."
어머니.......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어머니.
화란의 말을 통해 비는 문득 아득히 먼 기억속을 더듬어 어머니라는 존재를
끄집어 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의 기억속에는 어머니라는 존재는 처음부
터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인간을 사랑한 아버지. 용족을 사랑한 어머니. 그리고 다시 아버지를 사랑하
는 차기 홍룡왕이 될 여인 화란.
비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화란은 너무나도 당당했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가진
생기있게 피어난 꽃과도 같은 그녀.
아버지의 말을 통해 그리고 오래전 세상을 떠난 숙부 비영을 통해 전해들은
자신의 어머니 화연은 조용한 여인이었다. 하지만 직접 대하고 느껴보지 않고
서는 누군가에 대한 판단을 내릴 수는 없는 것이다.
가장 돌아가고 싶은 누군가의 품. 그것이 어머니라고 하지만 비는 훼이가 비
의 미소에 담긴 화연을 보듯이 어머니를 볼 수 없었다.
그저 어머니라는 막연한 단어만이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을 뿐.
" 난 훼이 이상의 남자가 아니면 혼인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지. 그리고 훼이
이상의 남자는 어디에도 없어."
자신의 선택에 대한 그 어떤 의문도 품지않은 흔들림없는 당당한 목소리.
비가 지금까지 한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그 감정을 화란은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화란과 비의 시선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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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웃....오늘은 늦어졌군요. 만화 동아리 회원들이랑 놀다가....^^
그래도 오늘분은 써야죠... 아아....졸렸었는데 지금은 졸음도 다 달아났습니다.
5장은 진짜로 길어지겠군요. 아직 하고 싶었던 얘기까지 도달하지 못했어요.
흑룡의 숲은 감정적인 내용이 많은데요. 제가 추구하는 스타일을 표현하고자
하려는 시도에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흑룡의 숲의 주제는 심리에 관련된 것이
거든요... 그래도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려면 아직 한참 남았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번 호 : 672 / 3334 등록일 : 1999년 07월 02일 01:09
등록자 : 까망포키 이 름 : 포키 조 회 : 255 건
제 목 : [연재] 흑룡의 숲 제 5장 八.
흑룡의 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