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룡의 숲-25화 (25/130)

제 6장  환영(幻影)

잠시 눈을 감았다.

한 동안의 침묵 속에

지겹도록 이어질 어둠과

아스라한 여명이 공존한다.

一.

" 오라버니가 현무족과 다투게 된 것은 순전히 젊은 혈기 때문이었어요."

유에린은 멀리에 있는 무언가를 응시하듯이 고개를 돌린 채 입을 열었다.

" 둘중의 하나라도 양보했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겠죠. 그 일은 그저

스쳐지나가듯이 넘겨버릴 수 있는 아주 사소한 일이었으니까요."

훼이는 잠시 고개를 들어 유에린의 얼굴을  바라보았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 젊은 현무족과 젊은 용족의 다툼은  그저 일상의 한 부분이었던 것  처럼

지나가 버렸죠. 아무도... 심지어 그 싸움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오라버니의 가

족들 조차 아무렇지 않게 그 사실을 받아들였어요.  하지만 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어요."

유에린은 낮게 시를 읊조리듯이 평이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 다른이들에겐 있을 수 있는 일이었을지 모르지만. 제겐 단 하나뿐인 혈육

을 잃어버린 듯한 느낌이었죠. 비록 피는 이어지지 않았지만...."

" 그를 마음에 두고 있었나보군."

유에린은 보이지 않게 살짝 미소를 떠올렸다.

" 그랬을 지도 몰라요.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자신을 돌봐준 이에게 이끌리

는 것은 당연한 것이겠지요. 오라버니는 일찍 돌아가신 제 부모님을 대신해서

절 돌봐주셨으니까요. 친 가족이라해도 거짓은 아닐 정도로."

" 그 현무족은 어떤 자였지?"

" 글쎄요. 전 그저 먼  곳에서 얼핏 보았을 뿐이니까요. 오라버니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 자가 대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보기 위해서 환계로 찾아갔

었지만 당당하게 그의 앞에 나설 수는 없었어요.  제겐 어떤 명분도 없으니까

요."

훼이에게서 피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오자 유에린은  얼굴 표정을 바꾸며

고개를 돌렸다.

" 세상엔 명분보다 중요한 게 많이 있지..."

" 하지만 적어도 그자의 앞에 당당하게 서기 위해서는 대등한 힘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지만."

" 그래서 무턱대고 내게 와서 현무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한 건가?"

유에린은 무안한 듯이 훼이에게서 시선을 거두어 들였다.

" 용족들에게. 아니 모든  이들에게 경이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당신이라면

제게 해답을 줄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요."

" 해답이라.....그래서 그 해답은 찾았나?"

유에린은 고개를 저었다.

" 아직 찾지는 못했지만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분명."

그것은 유에린이 어떤 생각을 품고 살아가는 지를 알려주는 말이었다. 성년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어린 청룡족 유에린이 어떠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

고 있는지 훼이는 느낄 수 있었다.

그래.....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이 결심한 것을 이루고 싶어하는 거겠지.

그 누구와 닮았군.

요즘들어 과거의 일들이 마치 얼마 전에 일어났던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르는

일이 많았다. 오랜 세월동안 혼자만의  생활을 고집해 왔기 때문일까. 일상에

자신 이외의 존재가 끼어들었다는 사실은 훼이의 심경에 많은 변화를 안겨주

었다. 마치 작은 돌 하나가 잔잔한 수면에  파문을 일으키듯이 유에린의 존재

는 훼이에게 과거로의 회귀라는 이름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살아온 천년을 훨씬 뛰어넘는 세월  동안 훼이는 세상이 변해가는 것

을 두 눈으로 지켜보았다. 반복되고 언제나 또  반복되는 시간이지만 그 시간

을 살아가는 자들은 언제나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유에린이라는 갓 성년을 넘긴 여인이 던져주는  파문은 아주 작은 것에 불과

했지만 요지 부동하게 움직이지 않고 있던  나무를 흔드는 것도 시작은 작은

바람에 불과한 것이다.

" 늦었지만 감사드려요. 당신의 안식의 시간을 방해한 저를 받아주신 것을."

훼이의 검은 눈동자에 비친 유에린의 모습은 처음과는 달리 부드럽지만 강인

한 여인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            *            *

" 전하. 이상이 이번에 수행을 위해 하계로 내려간 총 인원입니다."

라이엔은 보좌관이 내민 문서를 책상 위에 내려 놓고 잠시 내용을 훑어 보았

다.

" 예년에 비하면 적은 숫자군."

" 그렇습니다. 요즘은 혼인을 하는 연령대가  점점 높아지고 있는 추세이기

때문에 그만큼 아이들도 늦게 태어나고 있습니다."

" 하긴.."

라이엔은 고개를 끄덕이며 문서에  인장을 찍고 나서  쌓여있는 문서들 위로

그것을 올려놓았다.

" 이제 하계의 계절이 가을로 넘어올 때이니 백룡들이 바빠지겠군."

" 그리고 그 후에는 저희들이 바빠지는 때가 오는 것이구요."

" 그나마 올 여름에는 가뭄이 든 지역이  적어서 일이 덜한 편이었지. 마음

같아서는 매년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있도록 적당히 비를 뿌려주고 싶지만

가뭄 역시 천기의 일부이니 어쩔 수 없지."

아침부터 거의 쉬지 않고 문서들을 처리한  탓인지 한낯이 될 무렵에는 거의

모든 일이 끝이 났다.

" 오늘은 이걸로 끝인가... 수고했네. 보좌관."

" 아닙니다. 전하께서야 말로 늘 문서를  처리하시느라 유안님이나 비 전하

와 함께 하실 시간이 적으신데요."

라이엔과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짧고 깔끔하게 머리를 자르고 있는 보좌관은

엷게 미소지으며 답했다. 흑룡족 장로중의 한명을 아버지로 둔 그는 라이엔이

후계자가 되기 전부터 보좌관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고 있었다. 혼인은 일찍

한 편으로 같은 귀족인  흑룡족의 여인과 200살  정도에 혼인을 해서 지금은

두명의 자식을 가진 아버지 였다.

" 그렇군. 오늘은 오랜만에 밖으로 나가봐야겠군. 보좌관. 그러면 나는 나가

볼테니 뒷 정리를 부탁하네."

" 네. 전하. 편히 쉬십시오."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 보좌관의 인사를  받으며 라이엔은 집무실을 빠져나

왔다.

막 미하의 방으로 들어서려던 라이엔에게 미하의  전속 시비 하나가 말을 걸

어왔다.

" 전하. 조금 전에 비전하께서 유안님과 함께 산책하러 나가셨습니다."

" 아. 그런가... 어디로 간다고 했지?"

" 오랜만에 궁 밖으로 나가신다며 수행원 셋을 데리고 황룡족의 영지에  있

는 초지로 나가셨습니다."

라이엔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흑룡왕비가 된 이후로 미하는  거의 궁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었다. 기린족의

황녀였을 당시의 그녀는 혼자서 여러곳을  다니기를 즐겨했었는데 시간은 그

녀의 그러한 성격마저 바꿔버린 모양이었다.

영수족인 기린족에 비하여 용족들은 맡은 일들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에 하루

의 삼분지 일의 시간  정도에도 못 미치는 짧은  동안만이 라이엔과 보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낯설다면 낯설다고  말할 수 있는 용족들의  틈에서 미하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라이엔도 깊숙이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조

용한 여인이자 흑룡왕의 비로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가끔은 백룡왕 파이론의 비인  챠렌과 같은 활발한  여성이 곁에 있어주기를

바랄때도 있었다. 하지만 라이엔에게는 미하만이 가장 편안한 기분이 되게 만

들어주는 여인이었다.

자신의 검은 눈과는 전혀 다른. 심해와도 같은  미하의 푸른눈을 마주할 때면

일로 지친 몸이 저절로 풀어질 정도로 기분이 편해지곤 했다.

그때 환계에 가지 않았다면 미하는 만날 수 없었겠지.

인연이라는 것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다. 기린족의 여인을 자신의 비로 맞

이하게 될 거라는 생각은 그녀와 만나기 전까지는 한번도 해본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가장 깊이 자신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 어떻게 알고 여기까지 오셨어요."

자신의 무릎을 베고 잠든  유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하는 부드러운 눈을

들어 라이엔을 응시했다.

" 오늘은 오랜만에 셋이 함께 시간을 보낼까 해서."

" 유안은 조금 피곤했던 모양이에요. 그 동안 지난번의 실수를 만회해야 한

다며 수련에만 전념하더니..."

" 어린녀석 같으니라구...."

라이엔 역시 미하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눈 앞에 펼쳐진 푸른색의 초지와 등

뒤로 늘어선 나무숲. 황룡족의  영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꼽히는

이곳은 미하가 천계에 온 이후로 가장 마음에 든다고 말한 곳이었다.

" 이곳에 오니 문득 당신과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오르는군."

" 전 그날 당신을 만난 것이 정말  행운이라고 여기고 있어요. 진정한 인연

은 자신도 모르는 때에 찾아오는 것인가봐요."

미하의 입가에 떠오른 엷은 미소를 보며 라이엔 역시 미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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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나온 현실 장면이군요....^^

부드러운 분위기 연출입니다. 6장은 보통 길이정도(어느 정도지? ^^) 구요.

평이한 전개가 될 것 같습니다. 더운 나날이지만 힘내세요 ^0^

읽어주신 모든 분들. 감사드려요.

번 호 : 712 / 3334 등록일 : 1999년 07월 05일 01:21

등록자 : 까망포키 이 름 : 포키 조 회 : 247 건

제 목 : [연재] 흑룡의 숲 제 6장 二.

흑룡의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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