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장 환영(幻影)
二.
지리하게 이어지는 일상의 나날들.
남겨진 자는 남겨진 대로 떠나간 자는 떠나간 대로 시간은 흘러갔다.
성휘의 죽음이 아무렇지 않은 일처럼 처리되고 천상계에서 몇날 며칠 폭풍을
부른 훼이에게 천계의 흑룡궁으로 항의가 오고나서 훼이에게는 금족령이 떨
어졌다. 하지만 금족령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해도 훼이는 더 이상 움직일 생
각조차 갖고 있지 않았다. 침울하게 가라앉은 표정의 비와 함께 훼이는 별궁
안에서 한 발자국도 나서지 않았다.
천상계에서의 소란으로 인해 훼이와 비가 머물고 있는 별궁에는 많은 수의
병사들이 배치되었다. 흑룡왕에게서는 아무런 말도 없었지만 그것은 분명 자
중하고 조용히 지내라는 무언의 암시와도 같은 것이었다.
죽음이 가져다 주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자신의 눈앞에서 죽음을 목격한 비는 충격을 받은 듯 했다. 물론 숙부인 비영
의 죽음을 보기도 했지만 그것은 자신의 수명을 다한 자가 맞이하는 편안한
안식이었기에 슬픔 이외의 것은 없었다. 그에 반해 성휘의 죽음은 예정된 것
이 아닌 죽음이었기에. 게다가 그 죽음을 목도 하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죄책감으로 비는 심한 우울증에 빠진 것 처럼 보였다.
다른이의 앞에서라면 별로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던 비였지만 언제나 훼이의
앞에서만은 자신이 품고 있는 생각들을 이야기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훼이에
게 조차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멍한 시선으
로 자리에 앉아 있을 뿐. 비는 하루아침에 변모해 버린 것 같았다.
" 전하. 차라도 내어 올까요"
숨막힐 정도로 가라앉은 별궁안의 공기를 깨뜨리며 시비 한명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자신의 방에 틀어 박힌 채 며칠째 서책들을 읽고 있던 훼이는 오늘도 변함없
이 몇권째인가의 서책을 읽고 있었다.
" 차라......"
겨우 책에서 시선을 뗀 훼이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떠올리고 있는 시비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 용정차를 두잔 준비해 주겠나? 비에게도 한잔 가져다 주도록 하고.."
" 네. 전하."
훼이의 대답을 듣고난 후 시비의 얼굴에는 안도가 떠올랐다.
각자 자신의 방에 틀어박힌 채. 식사 때 조차 얼굴을 내밀지 않는 두 부자는
어떻게보면 지독히도 닮아 있었다.
훼이에게는 친구이자 비에게는 편안한 대화 상대였던 성휘의 죽음이 가져다
준 여파는 그토록 큰 것이었다.
" 들어가겠습니다. 비님."
시비는 가볍게 문을 두드리고 나서 비의 방 안으로 들어섰다.
시비의 눈에 비친 비는 지금까지의 단정했던 모습과는 달리 많이 흐트러져
있었다. 옷차림이나 외관이 아닌 풍겨나오는 분위기가 그랬다. 마치 정신을
놓아버린 사람처럼.
활짝 열린 창문으로 보이는 풍경들중 무엇에 시선을 두고 있는지 비는 줄곧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 차를 가져왔으니 드시지요. 아무일도 하지 않고 계시는 건 비님답지 않습
니다."
시비의 말에도 비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시비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탁
자 위에 찻잔을 내려 놓았다.
" 용정차입니다. 기분을 맑게 해주는 차이니 내키지 않으시더라도 드십시
오."
그렇게 말을 하고 나서 시비는 공손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막 방을 나서려는
시비의 눈에 찻잔으로 손을 가져가는 비의 모습이 들어왔다.
" ........고맙다....."
작은 소리였지만 시비는 비의 목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 * *
" 이래서 남자들은 어쩔 수 없다니까!"
날카롭게 울려퍼진 화란의 목소리가 방안을 맴돌았다.
"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거죠? 그러고 있으면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
오기라도 한 대요? 남겨진 자가 가진 최대의 축복은 망각이라는 것도 모르는
건 아니겠죠?"
훼이는 가볍게 눈만을 돌려 화란을 바라보았다.
" 누가 부자(父子) 아니랄까봐 그렇게 똑같이 하고 있는거에요. 대체."
" 무슨일로 이곳에...."
화란은 훼이의 말을 막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 갑작스레 찾아오긴 했지만 정말 이런 모습으로 있을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당장 일어나서 산책이라도 하세요. 당신과 비는 가뜩이나 얼굴색도
흰데 지금은 마치 송장같아요. 어서."
쏘아대듯이 빠르게 말을 뱉어내는 화란의 손에 이끌려 훼이는 정원으로 나섰
다. 화란은 훼이를 정원으로 몰아내고는 비의 방문을 벌컥 열어 젖히고 끌어
내다시피 해서 비를 데리고 나왔다.
여전히 굳어진 표정을 하고 있는 비를 보자 훼이는 지금까지의 자신이 한심
하게 느껴졌다. 그때문인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터져 나왔다.
얼마만에 보는 정원인지는 모르지만 시간이 흐른 것은 분명했다. 막 파릇한
새싹이 나무가지를 뒤덮고 있던 정원은 어느새 푸른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풍성한 푸른빛을 머금고 햇살아래 피어난 초목들은 어제와는 또 다른 오늘을
맞이하여 피어나 있는 것이었다.
" 비야....."
훼이는 나직한 목소리로 비를 불렀다. 그러자 비는 힘없는 시선을 훼이에게로
향했다.
" .....미안하구나..."
무엇을 위한 사과인지는 훼이 자신도 잘 알 수 없었다.
그저 초췌한 슬픔을 담은 비의 얼굴을 마주 대하자 그 말밖에는 할 수가 없
었다.
" 남은 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거에요.
그 이상의 것은 없다고 전 생각하니까. 자, 그렇게 서있지만 말고 정원을 걸
어 다니는 건 어때요? 이렇게나 아름답게 가꿔진 정원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
는건가요?"
가만히 자리에 서 있던 훼이와 비는 말 잘듣는 어린아이 처럼 천천히 정원을
거닐었다.
묵묵히 입을 다문채 걸음을 옮기는 두 부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화란은 고
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렇게 그들을 바라보던 화란은 몸을 돌려 별궁 건물 안
으로 들어섰다.
" .........아버지."
얼마만에 들어보는 비의 목소리인지 훼이는 알 수가 없었다. 아주 오래된 것
같기도 하고 바로 어제의 일인 것 같기도 했다.
" 정말 그럴까요........ 남겨진 자는 떠나간 자를 위해서 남아있는 자신의 삶
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사실 말이에요......"
훼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멀찌감치에서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는 병사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흑룡왕의 명을 받아 감시자로 붙여진 그들. 정원을 거닐고 있
는 훼이와 비를 향한 그들의 시선에 무엇이 담겨있는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 너보다 오랜 시간을 살아오긴 했지만 나역시 무엇이 정해진 답이라고 말
할 수는 없구나....... 그저 우리에겐 앞으로 많은 시간들이 남아있다는 것 이외
에는."
비 역시 훼이가 보고있는 병사들을 응시했다.
" 그렇겠죠.....시간은 언제고 변함없이 흘러가니까. 그리고........과거는 되돌릴
수 없는 것이니까."
훼이는 대답없이 그저 시선을 한곳으로 고정시키고 있었다.
" 아버지. 제게 그분의 검을 주시겠어요?"
" 검을.....말이냐?"
비와 훼이의 검은 눈이 서로 마주쳤다. 진실함과 의지가 담긴 비의 눈빛에 담
긴 뜻을 훼이는 읽을 수 있었다.
" 그래.... 그러면 한번 천상계에 다녀와야 겠구나. 연화에게서 그 검을 건네
받아야겠지."
" 그분과 함께 검을 겨루던 시간들을 기억하고 싶어요."
" 그래....."
초여름을 맞이하고 있는 별궁 정원의 나무들 사이를 훼이와 비는 계속해서
걸었다.
그리고 겨울을 지낸 나무들이 새싹을 피우고 푸르름으로 뒤덮히는 것처럼 그
들을 둘러싼 시간은 멈춤없이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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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숟가락 언니의 감상으로 저의 소설 형식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을 해 봤습
니다. 저는 나름대로 이원적 전개를 하고 싶었는데 역시 실력이 딸리다 보니
잘 안되는군요. 그러니까 이원적 전개란 현재의 이야기와 과거의 이야기가 동
시에 진행되는 것입니다. 일부는 회상의 형식을 빌어 쓴 것도 있지만 대부분
은 또 다른 하나의 전개로 쓰고 싶었거든요. (우..역시 실력이 딸려..--)
그리고 숟가락 언니의 감상.....너무 어려웠어요....감상이 글케 어려운 내용이라
니...^^ (제가 이해력 불능인가봐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열심히 쓸께요.
번 호 : 718 / 3334 등록일 : 1999년 07월 06일 00:04
등록자 : 까망포키 이 름 : 포키 조 회 : 245 건
제 목 : [연재] 흑룡의 숲 제 6장 三.
흑룡의 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