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장 역린(逆鱗)
四.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인간의 시간은 그토록이나 빠르게 흘러가는 것이었다.
비가 성년을 맞이하고도 얼마간의 세월이 흐른 후 였기에 하계는 벌써 몇 개
의 나라가 들어서고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망연함도 아무것도 아닌 그저 텅빈 시선으로 훼이는 화연이 살았던 그곳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그때의 흔적이라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그저 평평한 밭
으로 변해버린 그곳.
빽빽한 숲과 경사진 산길이 나 있던 예전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고
한창 번성하고 있었던 마을의 모습도 온데간데 없었다. 그저 띄엄띄엄 늘어서
있는 몇채의 집들과 피어오르는 밥짓는 연기만이 예전과 같았다.
" 보지 않아도 알 것 같군요....... 어떤 곳이었을지."
화란은 나지막하게 말을 꺼냈다.
" .....그때도 전 잊었었죠..... 아마도 그것은 내가 용족이기 때문이겠지만 인
간들의 시간이란 그런 것이니까요."
화란은 훼이의 입가에 스쳐지나가는 쓸쓸함을 보았다.
화란은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평평한 밭길 사이를 걸었다. 이제 얼마후면 인
간의 손에 의해 거두어 들여질 푸른 빛깔의 채소들은 싱싱한 빛을 간직하고
자라나 있었다.
" 안녕하세요. 화연. 늦었지만 먼저 인사할께요. 난 화란이라고 해요. 29대
홍룡왕이죠. 훼이와는 당신이 그를 만나기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지만 그
의 마음을 먼저 가져간 것은 당신이군요."
마치 바로 앞에 화연을 대하고 있는 것처럼 화란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꺼냈
다.
" 어쩌면 가장 오래 사는 것은 인간일 지 모르겠어요. 당신이 떠나고 나서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 이곳에는 당신을 기억하는 자들이 남아있잖아요.
당신이 남긴 핏줄도. 당신이 마음을 주었던 사람도 그리고 한번도 보진 못했
지만 저역시 당신을 기억하고 있어요. 마음 속에서 살아남는 다는 것..... 그런
거겠죠?"
화란은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에 담긴 것은 엷은 애닯음이었다.
" 이제 돌아갈까요.... 그저 이곳이 어떤 곳이었는지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
니까..."
훼이는 뒤돌아서서 공간을 열었다.
아직 어슴푸레하게 옅은 안개로 뒤덮여 있는 작은 마을의 어귀에서 훼이가
찾은 것은 아직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흔들림 없는 화
연의 얼굴이었다.
" 분명 이곳은 당신이 왔던 예전의 그곳과는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언제고 변하지 않을 그 풍경은 당신의 마음속에 있겠군요..... 돌아가요."
이곳까지 와서 무엇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일까.
잊혀진 자는 그저 잊혀진 자로 족하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왔던 자신이었
건만 모든 것이 그렇지는 않았다.
화연이라는 인간 여인이 가졌던 것이 무엇이었기에... 이토록 오랜 시간이 지
난 후에도 여전히 훼이의 마음을 점령하고 있는 것일까.
천계에서의 백년이라는 시간은 하계의 시간으로 따지자면 어마어마한 세월이
다. 천년의 세월을 보장받은 용족에게 있어서도 결코 짧은 않은 그 시간.
과연 지금도 마음속에 품고 있는 자신감이 흔들리지 않는다고 자신할 수 있
을까.
훼이의 눈 속에 들어오는 것은 오직 화연이 살았던 천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후의 대지일 뿐인데..... 그 오래고 오랜 세월의 흐름을 뛰어넘어서 그의 눈에
는 예전의 그가 기억했던 모습이 펼쳐지고 있을 것이다.
각자가 품고 있는 사랑은 그토록이나 달랐다.
" 무척 피곤했던 모양이군..."
막 햇살이 눈부시게 빛을 뿜어낼 무렵 훼이와 화란은 수행기간 동안 머무르
고 있는 얕은 평지에 다다랐다. 평소라면 벌써 일어나 있을 비가 아직도 잠에
빠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훼이와 화란이 나가기 전까지 곁에서 잠들
어 있던 홍룡족의 수행원 둘은 어딜 갔는지 그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 오늘은 일족들과 수행을 다녀오도록 하겠어요. 당신은 비와 함께 있는 편
이 좋겠죠?"
그렇게 말을 던지고 나서 화란은 몸을 돌려 일족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태양이 서쪽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화란과 홍룡족의
청년 두명은 돌아왔다.
" 아직 깨어나지 않았나요?"
훼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무슨.......문제라도 생긴건가요?"
" 아무래도 몸이 부담을 느끼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동안은 체력의 한계를
벗어날 정도로 힘을 쓴 적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겠죠."
잠시 말을 멈추고 나서 훼이는 잠든 비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 게다가 말은 안했지만 비는 흑룡족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이 자신이
약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왔지요. 그래서 몸이 힘들어도 내색하려 하지 않는
겁니다."
" 비는 나이에 비해 너무나도 깊은 눈을 가지고 있어요."
화란은 자신의 약함을 드러내기 싫어하는 비의 모습이 언제까지고 과거의 기
억속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 훼이의 고집스러움을 그대로 닮았다고 생각했
다.
* * * *
오늘따라 훼이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다른 곳에 마음을 두고 있는 것 처럼
느껴졌다. 항상 훼이의 정해진 것처럼 보이는 움직임과 별다른 표정을 떠올리
지 않는 얼굴을 대해 오던 유에린으로서는 그러한 훼이는 조금 의외로 여겨
졌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곳은 숲에서 한참 떨어진 흑룡궁 이었다. 그곳을 바라보
며 훼이가 무엇을 떠올리고 있을지는 짐작이 가지 않았지만 보통때와 달리
훼이의 얼굴에는 짙은 감정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 왜 궁으로 돌아가지 않으세요. 이런 곳에서 혼자 지내기 보다는 동생이신
흑룡왕님과 함께 궁에 머무르는 편이 더 낳지 않나요?"
별다른 생각없이 꺼낸 유에린의 말에 훼이는 입가에 고소(苦笑)를 머금으며
유에린에게 말했다.
" 내겐 저 곳으로 다시 돌아갈 자격 같은 건 없으니까. 그리고 비록 살아있
긴 하지만 지금의 내가 살아가는 시간들은 천상계의 수명부에도 기록되어 있
지 않지... 한마디로 난 존재하지 않는 자야..."
그 말을 듣고 유에린은 문득 일족의 어른들에게 들은 적이 있었던 훼이가 용
족의 수명을 뛰어넘게 된 까닭을 떠올렸다.
갓 성년을 넘긴 자신으로서는 천년이라는 세월보다도 더 길게 살아온 훼이가
무엇을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의 두 눈에 담긴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의 깊이와 굳어진 얼굴에서. 유에린은 그저 가라앉은 애
상을 보았을 뿐이었다.
" 오늘은 그동안 익힌 것을 혼자서 연습해 보도록 할께요. 지켜보다가 틀리
는 곳이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훼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유에린이 걸음을 옮기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막 하늘 위로 네 마리의 수룡을 띄우며 진중하게 표정을 굳히는 유에린의 모
습에서는 자신이 바라는 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자의 꺾이지 않는 의지
가 담겨 있었다.
훼이는 언제나 유에린을 볼때마다 느끼고 있었다. 그에게 다시 과거를 떠올리
게 만드는 것은 바로 유에린이 가진 앞을 바라보는 강인한 눈동자 때문이라
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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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너무 졸리다....다행히 낼은 학원에 안가는 날이라서 늦잠을 조금 잘 수
있지만. 오늘은 글이 너무 짧네요. 졸려서 쓰는데 평소의 두배나 걸렸어요.
역시 사람은 잠을 자야 합니다.
자..그러면 안녕히 주무세요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하루 되시길...
번 호 : 804 / 3334 등록일 : 1999년 07월 11일 01:50
등록자 : 까망포키 이 름 : 포키 조 회 : 203 건
제 목 : [연재] 흑룡의 숲 제 7장 五.
흑룡의 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