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장 역린(逆鱗)
五.
온 몸을 뒤덮는 나른한 기운.
비는 젖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움직이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하게
비쳐 들어오는 햇살을 보니 정오가 된 듯했다.
분명 오랫동안 잠을 잔 것 같았다. 말로 내뱉진 않았지만 화란의 힘을 막아내
기 위해 비는 내색 없이 힘을 끌어내어 사용했다. 그때문인지 이른 저녁이 되
었을 무렵 자신도 모르게 깊은 잠에 빠져버린 것이다.
천계의 고요함과는 다른 정적.
하계에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내려왔었다. 비가 태어난 곳도 바
로 하계 였고, 그의 몸의 반을 타고 흐르는 피는 바로 하계에서 살아간 인간
의 것이었기에 비는 하계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다른 용족들이 하계에 대해
약간의 이질감을 느끼는 것과 달리 비는 무척이나 친숙한 느낌을 받곤 했다.
하지만 지금의 정적은 비도 처음으로 느끼는 것이었다.
주위가 고요한 것은 언제나와 같았지만 피부에 와닿는 약간의 생소함과도 같
은 정적은 한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제 29대 홍룡왕이 된 화란의 수행. 그리고 그 수행을 함께 하고 있는 자신과
아버지 훼이. 그리고 홍룡족의 수행원인 두 청년은 그다지 많은 말을 하지는
않았다. 왕의 수행이라는 것은 힘을 기르기 위한 수행이라기 보다 앞으로 자
신이 관리해야할 하계의 모습을 익히는데 더욱 큰 목적을 두고 있었다.
천계의 시간으로도 500년이 훨씬 넘는 긴 시간 동안 하계의 여름과 화(火)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에 대한 관리는 홍룡족이. 그리고 왕인 화란이 해야하는
것이었기에 하계의 시간으로 세달 동안 하계의 곳곳을 둘러보는 것이다.
몸에 힘이 돌아오자 비는 공터에서 벗어나 숲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너무 오
래 잠을 자서인지 몸이 전처럼 가볍게 느껴지지 않았기에 지난번에 보아둔
얕은 못에 몸이라도 담글까 하는 생각을 떠올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왕으로서의 화란은 보통때와는 조금 달랐다. 평소에도 곧은 태도를 보이던 그
녀였지만 왕으로서의 그녀에게는 위엄이 있었다. 일족을 이끄는 자라면 누구
나 가지고 있을 그런 위엄. 비는 문득 자신의 아버지. 훼이를 떠올렸다.
분명 후계자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았더라면 훼이는 이미 흑룡왕이 되었을지
도 몰랐다. 아직 훼이의 아버지인 22대 흑룡왕이 정정하긴 했지만 그가 훼이
에게 일찍 왕의 자리를 물려주었을지도 모를 일이었기에.
만약 내가 없었더라면 아버지가 가끔 흑룡궁을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는 일
은 없었겠지......?
비는 피식 거리는 웃음을 터트렸다.
훼이가 무엇을 위해 후계자의 위를 버렸는지는 잘 알고 있는데.... 훼이가 얼
마나 자신을 생각해주는지 비는 알고 있었고,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어머니라는 존재를 알지 못하는 비를 위해 훼이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
면 무엇이든지 하려고 했다. 비에게는 오히려 별궁에서의 조용한 삶이 도움이
되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비와 훼이를 진정으로 위하는 시비들을 통해 비는
다른 이를 생각하는 마음을 배웠고 이제는 먼 기억 속의 한 자락으로 자리잡
은 비영의 모습 또한 떠올려 볼 수 있었다.
인간과 용족의 경계에 선 자.
그것은 언제나 비를 따라 다니는 해답 없는 물음이었다.
" ......뭐지..?"
막 못에서 빠져나와 옷을 걸치고 자리를 뜨려던 비는 못에 맞닿아 있는 반대
편 수풀 속에서 무언가 일렁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공간이 열릴 때
생기는 일그러짐 같이 휘어져 있는 것 같기도 했고, 희미한 빛깔의 안개에 푸
른색이 더해진 것 같기도 했다.
비는 그 일렁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겨 그곳으로 향
했다.
그리고 그 일렁임을 두 눈으로 보게 된 비는 신선한 호기심에 사로잡혔다. 그
일렁임은 다른 곳으로 통하는 문과 같았다. 보통 용족들이 사용하는 공간을
여는 방식과는 조금 달랐지만 분명 그 일렁임에서는 하계가 아닌 다른 곳의
기운이 풍겨져 나오고 있었다.
비는 천천히 손을 뻗어 그 일렁이는 한사람 정도가 드나들 수 있을 정도의
원 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비가 느낀 것은 생소함. 단 한번도 접해보지 못한 이계(異界)의 공기
가 주는 생소함 이었다.
* * *
" 어디 좋은 곳이라도 있나요? 계속 다른 곳에만 가계시는군요. 저와 함께
여러 곳을 둘러보는 것도 좋지않으신가요?"
막 공터로 들어서는 훼이에게 화란은 방금전에 따온 과실 하나를 내밀며 말
했다.
" 그저 발길 닿는대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왔습니다. 혼자서 생각할 것
이 좀 있어서."
" 그렇군요...."
화란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라난지 수십년은 되어보이는 굵직한 나무 기
둥에 몸을 기대고 섰다.
" 아..그리고보니 비는 어디론가 나간 모양이군요. 오후쯤에 깨어난 듯 한
데...."
화란의 말을 듣고 둘러보니 보니 비의 모습은 근처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 굳어진 몸을 풀기 위해 산에라도 오른 것 같군요."
훼이는 짧게 대답하고는 이제는 하늘을 완전히 뒤덮은 붉은 색의 노을을 바
라 보았다. 인위적인 색으로는 도저히 표현해낼 수 없는 자연만이 보여주는
아름다운 붉은 빛의 움직임. 그것은 언제고 훼이가 하늘을 바라보게 만드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 하지만 조금 늦는군요."
훼이가 덧붙여 말하자 화란은 빠른 어조로 말했다.
" 제가 찾으러 갈께요. 이제 날이 저물어 오니까요."
" 그렇게 하십시오. 지금 시간까지 돌아오지 않는 걸 보면 또 어딘가에서
잠들어 있는지도 모르지요."
고개를 끄덕이는 훼이를 한번 바라본 후 화란은 나무 기둥에서 몸을 떼고 발
걸음을 옮겼다.
" 홍룡왕 전하께서는 아무래도 훼이님을 마음에 두시고 있는 것 같은데...
알고 계십니까?"
화란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공터에 앉아 있던 두 명의
젊은 홍룡족 청년 중 한명이 훼이에게 말을 걸어왔다.
"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대답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또 다른 한명의 홍룡족 청년 역시 훼이에게 물어왔다. 지금까지 화란의 명령
에 대답하는 것 이외에는 단 한마디도 내뱉지 않았던 그들을 보아왔기에 훼
이는 조금 의외라고 느꼈다.
마치 친 형제가 아닌가 의심할 정도로 닮아 있는 두 청년은 완곡한 얼굴로
훼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 화란은 홍룡왕. 그리고 난 그저 한명의 흑룡족일 뿐이지. 그 이상 다른
무엇이 더 있다고 생각하나?"
" 하지만 홍룡왕 전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저 옆
에서 지켜보고 있는 저희들도 느낄 정도인데 당사자이신 훼이님께서 그것을
모르신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 마음이라는 것은 그렇게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니야."
그렇게 말하고 나서 훼이는 화란에게서 받은 사과를 한입 베어 물었다. 아삭
하는 소리와 함께 향기로운 과즙이 훼이의 입안을 가득 채웠다.
"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나는 인간의 여인을 사랑했고 지금도 그렇다. 내가
했던 선택이기에 지금도 난 그걸 후회하지 않아. 그리고 인생에 여인은 한명
으로 족하다고 여기는데..... 그대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 죄송합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저희도 더 이상 무어라 드릴 말씀
은 없습니다."
두 홍룡족 청년은 무척이나 정중한 어조로 훼이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 지금의 난 내 아들의 일만을 생각하고 싶으니 더 이상은 아무말 말아주
게. 누군가가 날 마음에 담는 것은 바라지 않으니까..."
그것은 무척이나 미묘한 흐름이었다.
화란은 언제나 한발 물러선 거리에서 훼이를 보고 있었다. 항상 말은 확실하
게 내뱉곤 하는 그녀지만 말 이상의 것은 하지 않았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과연 훼이가 생각하는 그것과 동일한 것일까.
언제나 확연하게 거절의 뜻을 전하는 훼이를 대하면서도 화란은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훼이를 대했다.
화란. 그녀만이 가질 수 있는 당당함과 직시하는 시선으로. 그 한결같음으로
그녀는 훼이를 바라보았다.
잠시 각자의 생각에 빠져 있던 세사람의 눈앞에 갑작스레 공간이 열리며 조
금 당황스런 모습의 화란이 나타났다.
" 큰일이에요. 어디에서도 비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아요."
그 말을 들은 훼이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화란의 눈에 비춰진 것은 굳어진 얼굴로 공간을 여는 훼이의 모습이
었다.
=======================================================================
우...제 소설 문장력이 너무 딸리는 것 같아요. 괴로워....괴로워...
읽어주시는 분들... 이런 졸작 소설을 읽어주시느라 주고가 많으십니다.
조금씩 자신이 없어지고 있네요. 주위에 뛰어난 사람들이 워낙 많다보니..
보잘 것 없는 제 자신이 너무 작아보여요. 에잇...그치만 열심히 써야죠.
제 장점은 열심히 쓴다는 것 밖에 없는 것 같지만... ^-^
오늘도 잠이 모자르는 저는 눈을 반쯤 감고 자판을 두드립니다.
번 호 : 829 / 3334 등록일 : 1999년 07월 12일 01:07
등록자 : 까망포키 이 름 : 포키 조 회 : 204 건
제 목 : [연재] 흑룡의 숲 제 7장 六.
흑룡의 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