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장 역린(逆鱗)
八.
며칠째 훼이는 유에린에게 지금까지 가르쳐 준 것 이상의 것은 가르쳐 주지
않고 있었다. 그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듯 훼이는 움직임 없이 한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유에린은 훼이에게 무슨 말이라도 건네고 싶었지만 생각에 열중하고 있는 훼
이를 보자 쉽사리 말을 걸 수가 없었다.
벌써 한달이라는 시간을 훼이와 함께 보내고 있었지만 유에린은 훼이가 무엇
을 생각하고 있는지. 그의 얼굴에 떠오른 그저 가라앉은 침묵이 무엇을 의미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토록 오랜 시간을 살아온 자는 과연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지금까지 자
신이 살아온 시간의 열배도 넘는 시간을 살아온 훼이가 겪었을 무수한 일들
은 자신으로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할 정도일 것이다.
유에린에게 자주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오라버니는 언제나 훼이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마치 자신이 훼이가 된 듯이 흥분을 감추지 못했었다.
" 들어봐라. 유에린. 그가 가진 힘은 같은 용족들도 당해내지 못할 만큼 강
한 것이다. 현재 천계의 각 일족들의 장인 용왕들이라해도 쉽사리 그를 당해
내지는 못할 것이다.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천상계 조차 상대도 되지 않을 정
도다."
그때의 유에린은 오라버니가 왜 그토록이나 훼이라는 인물에게 호감을 가지
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유에린에게는 먼 곳에 있는 훼이라는 인물 보다는 바
로 자신의 곁에 있는 오라버니 쪽이 훨씬 더 강하고 현실감이 있었기 때문이
었다.
" 그렇게나 강하다면 그는 왜 왕이 되지 않았죠?"
유에린의 질문에 그는 피식 하고 웃어보이며 대답했다.
" 그가 흑룡족 후계자의 지위를 버린 후에도 그리고 오랜 수명을 얻은 후
에도 그를 왕으로 앉히려는 노력은 있어왔다. 하지만 그는 모든 걸 거부했지.
그는 너무나 오랜 시간을 살았어. 그가 숲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는 것도 더
이상 다른이의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아서다. 오래된 자들은 항상 해가 지날
수록 고독해지기 마련이니까. 언젠가는 주위의 모든 것들이 다 사라지고 생소
한 것으로 변할테니까 말이다."
그때 오라버니가 했던 말의 의미를 유에린은 이제서야 조금씩이나마 알 것
같았다.
오라버니의 죽음을 목도하고 싸늘한 표정을 가지게 된 자신과 달리 훼이에게
서 표정의 변화를 보기란 극히 드문 일이었다. 끈질기게 매달린 자신에게 손
을 내밀었던 훼이는 분명 엷은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 뿐이었다.
그날 이후로 유에린은 단 한번도 훼이의 미소를 본 적이 없었다.
유에린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 존재였던 오라버니의 생명을 앗아간 현무족과
당당히 힘을 겨루고 싶었기에 오라버니가 입이 닿도록 이야기했던 훼이에게
찾아온 것이었다. 힘을 겨루고 난 후의 일은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것을 복
수라고 불러야 할 것일까. 그렇지 않을 지도 모른다. 유에린은 그 현무족을
증오하지는 않았다. 다만 오라버니가 어째서 그자와의 싸움에서 졌는지 자신
이 직접 마주 대해보고 싶었다.
모든 용족들에게 경외의 대상이 되어온 훼이의 모습을 직접 두 눈으로 대하
기 전까지 유에린은 훼이가 대단한 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직접
마주대한 훼이의 모습은 확실히 보통의 용족들과는 어딘가가 달랐다. 외관상
으로는 겨우 600살을 넘긴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훼이의 눈에 담긴 잴 수
없는 깊이는 그에게 얼마나 많은 세월들이 머물다 갔는지를 말해 주었다. 말
로 하지 않아도, 행동으로 내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훼이의
검은 눈은 깊고도 깊었다.
" 유에린. 난 언젠가 그를 만나서 그가 지내온 세월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
다. 그가 강한 힘을 가져서도 아니고, 수명을 초월한 자라서도 아니다. 물론
그 두가지 이유가 크지 않다면 그건 거짓이겠지. 하지만 난 천년이상이나 이
세상에 살아오면서 그가 느낀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다."
" 전 잘 모르겠어요...."
" 그래. 그럴거다. 하지만 유에린. 너도 언젠가는 이런 생각을 하는 날이 올
거야. 그리고 내게 주어진 시간동안 난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일을 할거
다."
그렇게 말했던 오라버니의 얼굴에는 자신이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지금 유에린이 오라버니가 그토록이나 이야기 하길 원했던 훼이와 함
께 있을 거라는 사실을 예측하지 못했던 것처럼 오라버니가 그토록이나 허망
하게 목숨을 잃을 거라는 사실도 그때는 알지 못했다.
" 시간이란 정녕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었군요........."
유에린은 자신도 모르게 머리 속에 품고 있던 생각을 입밖으로 꺼냈다.
그리고 유에린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훼이는 천천히 유에린에게 고개를 돌렸
다.
" 지나가기 전에는 느낄 수도 볼 수도 없는 것이 시간이 품고 있는 운명이
지."
운명이라.....
유에린은 고개를 저었다.
" 저는 운명을 믿지 않아요. 아무리 천상계의 수명부에 제 수명이 정해진
채 적혀있다고 해도. 전 단지 제 눈앞에 보이는 것을 믿을 뿐이에요."
훼이는 유에린의 얼굴을 한번 바라보고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갓 성년을 넘긴 저 어린 용족 소녀가 가진 당당함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오랜 시간을 살아온 자신조차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시간이라는 이름이 가진
힘을.
반복. 어쩌면 그 이름이 가져다주는 것은 기억과 망각의 교차일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모든 것들이 한조각도 남기지 않고 산산히 부서져 흩어질 것이다.
기억. 언제고 훼이의 마음 속을 채우고 있는 그 말 역시 그렇게 먼지가 되어
부서질 것이었다.
* * *
" 그게 사실인가?"
" 그렇습니다. 전하. 며칠전 백룡족의 보좌관이자 비인 차렌님께서 직접 내
려가셔서 확인한 사실이라고 합니다."
30대 홍룡왕 란은 기분 나쁘다는 듯이 얼굴을 찡그렸다.
" 그대도 다녀오도록 하게. 아직까지 홍룡족에서는 피해자가 나오지 않았지
만 이렇게 간과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백룡족과 황룡족 이외에는 아직까지
더 이상의 희생자는 없겠지?"
" 그렇습니다. 전하."
란은 타오르는 불꽃의 색처럼 선명하게 물든 붉은 색의 머리카락에 손을 가
져다 대며 다시 보좌관에게 말을 건넸다.
" 아니야. 괜히 힘을 낭비할 필요는 없으니 하계로 내려간 일족들에게 어린
일족들을 보호하라고 전하게."
" 알겠습니다. 전하."
란보다 200살은 젊어보이는 보좌관은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네고는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보좌관이 자리를 뜨고 나서도 란은 한참 동안이나 움직이지 않고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는 갑자기 눈을 빛내며
주문을 외쳤다.
[ 천개(遷開) 경(鏡) ]
그리고 눈 앞에 떠오른 붉게 감싸인 매끈한 평면에 비친 것은 차분한 얼굴로
문서를 들여다 보고 있는 라이엔의 모습이었다.
" 오랜만입니다. 흑룡왕."
이공간 매개 주문을 통해 얼굴을 드러낸 것이 란이라는 사실이 놀라웠는지
라이엔은 가벼운 놀라움을 나타냈다.
- 네. 오랜만이군요. 홍룡왕. 그런데 무슨일로....
"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만 요즘 명계의 교룡으로 추정되는 자에게 어
린 용족들이 습격을 받고 있소."
- 네. 그 사실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대답은 하고 있었지만 라이엔의 얼굴에는 명백한 의문이 떠올라 있었다.
" 그래서 말인데... 이번 기회에 훼이님의 힘을 빌어 그 교룡을 없애는 것이
어떻겠소?"
잠시 라이엔은 침묵했다.
- 형님은 더 이상 천계의 일에 관여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번
일은 우리 용왕들이 직접 해결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는데 그대께서는 그렇게
여기지 않으시는 모양이군요.
" 그게 그렇게나 어려운 일인줄은 몰랐군요. 그 정도도 해결하지 못한대서
야 어디 오래된 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란의 눈에 담긴 빈정거림을 읽고 라이엔은 순간 치밀어 오르는 화를 삭혔다.
예전부터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란은 훼이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
을 드러내곤 했다.
- 아... 잊고 계신 모양인데, 명계에서 살아가는 자들에게 영원한 죽음이란
없습니다. 아직까지 큰 일이 벌어진 것도 아니니 굳이 형님의 힘을 빌리지 않
아도 충분하다고 봅니다. 아니면, 그대는 자신의 힘에 자신이 없으신 겁니까?
라이엔으로서는 무척이나 드물게도 약간의 감정을 담은 말투였다.
라이엔은 란의 얼굴이 조금이긴 하지만 일그러지는 것을 보며 입을 열었다.
- 더 이상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이만 인사를 건네도록 하지요.
뭔가 할말이 더 남아있는 듯한 불만스러운 얼굴이었지만 란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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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일이당....외전도 같이 진행시켜야 얘기 진행이 맞아 떨어지는데... 후....
본편 쓰기도 벅차니 외전은 언제쓰나.....
오늘은 친구네 집에 묻혀있던 초류향 전기를 발견하고 기쁜 마음에 들고 나
왔습니다. 전 고룡 작품 중에선 절대쌍교랑 초류향 전기가 좋아요.
어느덧 오늘 올리는 것이 35편 이군요. 자, 50편을 채우는 그날까지 잘 써야
지. (50편에서 끝은 아녜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하루를....
번 호 : 889 / 3334 등록일 : 1999년 07월 15일 00:13
등록자 : 까망포키 이 름 : 포키 조 회 : 206 건
제 목 : [연재] 흑룡의 숲 제 7장 九.
흑룡의 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