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장 역린(逆鱗)
九.
훼이로서도 명계에 들어선 것은 처음이었다.
그 존재만 알고 있을 뿐 관심을 가진 적도 없었기에 이곳에 무엇이 있는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지금의 훼이가 느끼는 것은 무척이나 생소하다는 느낌이었다. 주위에 자라나
있는 초목들 역시 색과 그 모양이 기이했고 가끔씩 지나 다니는 동물들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는 느낌을 강하게 던져 주는 것들 뿐이었다.
명계 전체를 감싸고 있는 공기는 천계를 비롯한 다른 곳들과는 완전히 달랐
다. 무색무취여야 할 공기가 가지고 있는 희뿌연 느낌과 웬지 모르게 기분을
바닥까지 끌어내리는 듯한 기분나쁜 향. 그 향은 확연하게 맡을 수 있는 강한
냄새는 아니었지만 은근하게 몸 속을 타고 퍼져나가며 신경을 거스르는 것이
었다.
죽은자의 땅이라더니 과히 기분 나쁜 곳이군.....
훼이는 속으로 낮게 읊조리며 걸음을 옮겼다. 온 몸의 신경은 오직 비가 내뿜
는 희미한 기운을 느끼는데 기울여져 있었다. 그리고 두눈으로는 한시도 쉬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인적하나 없는 적막으로 가득찬 숲속을 거닐던 훼이는 어느 순간 비의 기운
을 감지하고 그 자리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제까지와 같이 너무나 희미해서
어느 곳에 있는지 느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뚜렷하고도 선명하게 비의 기
운이 느껴졌다. 분명 비는 가까운 곳에 있을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나서 훼이는 거의 달리다 시피 하여 비
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향했다.
길고도 넓은 잎을 가진 작은 나무들이 양쪽으로 길게 늘어서 있는 길을 따라
비가 빠르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아직도 등 뒤에서 음산하게 깔린 남자의 음성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어째서 그 남자는 이곳 명계의 땅에서 살고 있는 것일까.
지금까지 비는 인간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용족은 자신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
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훼이도 태어나기 전인 더
오랜 과거에도 훼이처럼 인간과 사랑에 빠져 피가 섞인 아이를 낳았던 모양
이었다.
하지만 그는 왜 그토록이나 심한 광기에 휩싸여 있는가. 비로서는 알 수 없었
다. 버림받은 영혼들이 살아가는 땅이 이곳 명계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과
연 그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리고 세상이 끝날때까지 삶을 반복해야
한다는 그 남자의 말은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리고 영혼조차 구제 받지
못할정도의 죄라는 것은 무엇인지. 조금 전의 남자가 들려준 말은 비에게 혼
란을 가중시킬 뿐이었다.
훼이조차도 그런 말은 들려주지 않았었다.
영원한 반복.........?
과연 그것은 고통스러운 형벌인 것인가.
비는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더욱 발걸음을 빨리했다.
" 용족이군......"
비는 갑작스레 들려온 여인의 목소리에 흠칫하고 놀라며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비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좌우에 그림자와도 같은 검은 옷으로 몸을
감싼 두명을 데리고 마치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서 있는 여인의
모습이었다.
그녀의 모습은 무척이나 특이했다. 높게 틀어올린 짙은 푸른빛의 머리카락과
붉은색을 띄고 있는 눈동자. 그리고 금빛 찬란하게 빛나는 화려한 의복.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세명을 보자 비는 어떻게 해야할 지 알 수가 없었다.
비가 머뭇거리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던 여인은 입끝을 살짝 치켜올리며 웃었
다.
" 그대 역시 교룡이군..."
" 교룡.......?"
비는 자신을 향해 던져진 여인의 말에 가슴 가득 의문을 느끼며 되물었다.
" 모르고 있었나? 인간과 용족 사이에서 태어난 자를 교룡이라고 부르지.
용족도 아니며 인간도 아닌 자. 하지만 동시에 두 종족이기도 한 자."
비는 아무말 없이 날카롭게 치켜져 올라간 여인의 눈을 바라보았다.
" 결국 교룡이 갈 곳은 이곳 뿐이지.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자를 받아
들여주는 유일한 곳이니까."
" 난 우연히 이곳으로 들어서게 된 것 뿐입니다. 제겐 돌아갈 곳이 있어요."
비는 눈 앞의 여인에게 당당하게 말했다.
그러자 여인은 소름끼치도록 날카롭게 미소지었다. 어떻게 입술을 살짝 움직
인 것 만으로 그런 표정이 나오는지 신기할 정도로 여인의 미소는 섬뜩하면
서도 놀라웠다.
" 그대는 이곳에 들어선 것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해. 나는 이곳에
들어선 자를 되돌려 보낸 적이 없으니까."
비는 붉은색을 띄는 여인의 눈이 마치 스스로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 같다는
착각에 빠졌다.
" 당신은......"
비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 이제 이곳에 속하게 될 테니 알려주어도 무방하겠지. 나는 명계의 주인인
요희다. 이곳 명계가 생겨났을 때부터 이곳에 존재해 왔지."
그렇게 말하며 요희는 돌려 자신의 양 옆에 선 검은 의복을 걸친 자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잠시 후 인형처럼 아무런 표정도 떠올리지 않은 두 사
람은 비를 향해 다가왔다.
그리고 그들의 손에서는 안개와도 같은 검은 빛이 끊임없이 뿜어져 나오며
비의 주위를 감싸기 시작했다.
순간 적으로 위험을 느낀 비는 재빨리 방어주문을 외쳤다.
[ 패사령진(覇邪靈陣) 개(開) ]
방어주문을 펼치자 비의 주위에 몰려들던 검은 빛은 접근해 오지 못했다. 하
지만 요희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 네가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지 두고 보도록 하지. 보통의 용족이라도 견
디기 힘든 이곳 명계의 공기에 교룡인 네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말이
야......"
요희의 목소리를 들으며 비는 자신의 마음이 점점 무거워 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 * * *
자신의 손바닥을 통해 온 몸으로 퍼져나가는 따듯한 생명의 기운. 그것이 온
몸에 퍼져나갈 때의 느낌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이나 기분 좋은 것이었
다. 자신의 몸이 새로운 생명으로 충만해 가고 있는 것과 반대로 손바닥 아래
에 놓인 소녀의 얼굴은 점점 창백하게 탈색되어가고 있었다.
이미 반항할 여력을 상실한 듯 소녀의 얼굴은 평안해 보이기 까지 했다.
천년이라는 세월을 살아가야 할 어린 용족의 소녀는 그렇게 자신의 생명력이
다른이에게 넘어가는 것을 무감동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모든 생
명력이 남자에게로 넘어가자 소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마지막으로 두 눈에
세상의 모습을 담기라도 하듯이 천천히. 그리고 남자의 손이 이마에서 떨어지
자 소녀의 몸은 바닥으로 허물어져 내렸다. 그리고 남자의 손은 다시 떨리는
눈동자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다른 소년에게로 향했다. 무슨 주문에라도 걸
린 듯 소년은 굳어진 그대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남자는 무감각한 표정을 떠올린 채 소년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또 다시 손바
닥을 통해 느껴지는 생명의 기운은 기분좋은 울림처럼 그렇게 퍼져나갔다.
어느새 남자의 얼굴에는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검은 눈을 들어 바닥에 쓰러져 있는 이제 막 생명이 사라진 두명의 어
린 용족을 응시하다가 천천히 자신의 두손을 들어올렸다.
< 난 누구지..........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
갑자기 머릿속이 백지가 된 것처럼 텅빈 것 같았다.
하지만 남자는 자신의 이름도,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도, 자신이 몸이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로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투명할 정도로 흰 피부와 어깨를 타고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 갸름한 얼굴
선과 우수에 찬 검은 눈동자. 남자의 모든 것은 누군가와 닮아있었다. 몸에서
풍겨오는 분위기 까지. 모든 것이 한 남자를 쏙 뺀 것처럼 익숙하게 느껴졌
다.
< 훼이......... >
한동안 자신의 두 손을 응시하던 남자는 낮게 울리는 목소리로 이름 하나를
내뱉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강하게 자신을 이끄는 이름. 남자의 머리 속에 잠
시 지금의 자신과 닮아있는 훼이의 모습이 스치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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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뎌 내일부터 편집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내일 것 까지 두편을 올립니다.
펑크 안 내려는 저의 발악입니다. ^^
우... 역시 시간을 뒤섞어 버렸더니 시간대를 맞추기가 힘들군요. 내가 왜 이
랬을까나... 지금까지의 제 스타일은 사건 위주의 전개 였는데 갑자기 이렇게
되어 버렸군요.
서정적 환타지라고 해야 하나요.. 이걸? (저희 언니는 그러던데..^^)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
번 호 : 890 / 3334 등록일 : 1999년 07월 15일 00:13
등록자 : 까망포키 이 름 : 포키 조 회 : 202 건
제 목 : [연재] 흑룡의 숲 제 7장 十.
흑룡의 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