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장 역린(逆鱗)
十二.
아무말도 나오지 않았다. 아니, 사고 자체가 마비되어 버린 것이다.
머리속이 하얗게 변해 버린 듯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것도...
결국 이렇게 되었어야 한단 말인가.
어째서..... 어째서 이렇게 되어버린 것인가.
비가 살아온 시간들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이 시간이 오래도록 계속 되리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지만 이토록 빨리 끝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한 적이 없
었다.
순간 창백하게 굳어진 채 잠든 듯이 누워있던 성휘의 얼굴이 스치고 지나갔
다. 그리고 방금전에 비가 보였던 엷게 떠오른 미소가 훼이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아무말도 하지 않았지만 마지막 순간에 비가 보인 미소에는 훼이를 향한 많
은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자신이 지금 이렇게 떠나가더라도 부디 슬퍼하지 말라는. 그리고 먼저 떠나가
서 죄송하다는 의미가 담긴 그 엷은 미소가 머물러 있던 비의 얼굴을 훼이는
머리속에서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훼이는 마치 지금도 눈 앞에서 비가 엷게
미소짓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거짓말이다.... 이건 거짓말이야....
훼이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젓고 있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어 있었던 것일까.
오래전의 그 만남부터가 모든 것이 뒤틀릴 거라는 것을 말해주는 전조였나?
그건 아니다. 지금 이 순간도 절대로 후회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어째서 비는 지금 눈을 감고 있는 거지.....
왜 다시는 눈을 뜨지 않는거지.......
마음속으로 절규하듯 외쳤지만 훼이의 그 물음에 답해줄 이는 이 세상 어디
에도 없었다.
현실은 그렇게 다가왔다.
" ..........전하....... 전하.........."
아무런 움직임 없이 의자에 앉아있던 훼이를 시비는 안타까운 음성으로 볼렀
다. 물조차 입에 대지 않는 훼이를 옆에서 지켜보며 그녀는 지금의 훼이가 어
떤 심정일지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 역시 싸늘하게 식어버린 비의 모습을 보
고 얼마나 많이 울었던가. 하지만 훼이는 눈물 조차 내비치지 않은 채 그저
계속 침상위에 누워있는 비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마치 단 한순간이라도 눈길을 떼면 비의 모습이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기
라도 할 것처럼 훼이는 그렇게 비의 모습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 전하. 조금이라도 음식을 드셔야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시비의 음성을 듣지 못한 듯 훼이는 여전히 비의 모습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또다시 입을 열려던 시비의 손을 누군가가 잡으며 제지했
다. 갑작스레 자신의 손을 잡은자가 있다는 것에 놀라며 고개를 돌린 시비의
눈에는 뭐라고 할 수없을 만한 놀라움이 담겼다.
" 저......전.."
막 말을 내뱉으려던 시비를 또 다시 만류하며 그는 천천히 훼이쪽을 돌아보
았다.
최강의 흑룡족으로서 그리고 그 흑룡족의 왕으로서 지금까지 살아온 자연스
러운 위엄이 담긴 태도로 그는 몸을 움직여 훼이의 뒤에 섰다. 그리고 그는
가볍게 손을 들어 훼이의 어깨에 올려놓았다.
" 이제 만족하십니까. 인간의 피가 섞인 자는 당연히 이렇게 되리라고 생각
하셨습니까........"
훼이의 목소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낮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훼이는 말
했다. 그리고 훼이는 자신의 아버지. 흑룡왕이 방 안에 들어선 것을 알고 있
었던 듯 아무런 동요조차 없이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 단 한번도 할아버지라고 불러보지 못했던 제 아들이 이렇게 삶을 마감한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러 오셨습니까."
별다른 흔들림없이 울리는 목소리였지만 흑룡왕은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다른이를 원망해 본적 없던 훼이가 이토록이나
괴롭게 자신의 마음을 토로하고 있는 것이었다. 비록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려
고 하지 않은 담담한 어조였음에도 아버지라는 이름을 가진 흑룡왕은 그것을
읽을 수 있었다.
흑룡왕은 깊이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강인해 보였던 그의 어깨도 그때만큼은 외소하게 느껴졌다. 지금의 그는 이제
까지 다른이에게 명령을 내려오던 강력한 지도자의 모습이 아닌 그저 훼이의
아버지이자 비의 할아버지일 뿐이었다. 비록 그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던
그였지만 그것은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 훼이........"
흑룡왕은 안타까움이 담긴 음성으로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훼이가 스스로 흑
룡왕 후계자의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 거의 200년만에 부자는 서로를 마주대
하는 것이었다.
그 시간은 그리 오랜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 사이에는 마치 그보다 몇배는
더 긴 세월이 놓여있는 듯이 멀게만 느껴졌다.
" 훼이..... 네게 무슨말을 해야할지 모르겠구나......."
훼이를 바라보는 흑룡왕의 눈에는 진한 아픔이 배어 있었다. 자신이 조금만
물러섰더라도 지금의 결과는 생겨나지 않았을 거라는 깊은 자책과 함께.
너무나도 다른 듯 하면서 너무나도 닮은 두 부자는 오래전 처음으로 비를 데
려온 훼이가 흑룡궁에 들어섰을 때와 마찬가지로 각자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
다. 어쩌면 흑룡왕은 처음부터 훼이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를 예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 저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돌아가주세요......"
흑룡왕은 여전히 자신에게 등을 돌리고 앉은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어깨
에 올렸던 손을 내려 놓았다.
흑룡왕 역시 알고 있었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입장이 어떤 것인지.
흑룡왕 자신 또한 자식을 잃어본 경험이 있다. 그때의 절망감은 세상의 그 어
떤 말로도 위로할 수 없는 것이다.
흑룡왕은 성년식조차 지켜봐 주지 못했던 자신의 손자가 영원한 안식의 땅으
로 떠나버린 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단 한번도 자신의 손자라고 인정하지
않았던 훼이의 아들.
인간의 피가 섞여있긴 했지만 아이의 얼굴은 훼이와 흡사했다. 마치 어린 시
절의 훼이를 보는 것 처럼.
자신이 더 이상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가장 소중한 혈육을 잃은 자신의 아들에게 무슨말을 전해야 옳은가.
분명 훼이의 아들을. 자신의 손자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자신이었다. 그것
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그리고 이미 결과는 이렇게 바뀌어 있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갑작스럽게.
흑룡왕은 아직도 놀란 눈으로 자신과 훼이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는 시비의
곁을 지나쳐 방을 빠져나갔다.
" 훼이를 부탁한다...."
그리고 시비는 막 자신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간 흑룡왕의 음성이 왠지 슬프
다고 느꼈다.
훼이는 의자에 앉은자세 그대로 멍한 얼굴로 눈감은 비의 모습을 응시했다.
하지만 훼이의 그 눈에는 더 이상 비의 모습이 비치고 있지 않았다.
거의 이백년만에 자신을 찾은 아버지의 모습을 기억속에서 되살리며 그렇게
훼이는 온몸에 엄습해오는 무너질 듯한 절망감과 싸웠다.
용족에게 주어진 수명의 반 이상이나 살아온 자신이었지만 지금까지 이렇게
마음을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듯한 괴로움은 처음으로 느끼는 것이었다.
용족으로서 살아온 그동안의 시간들도. 자신이 해온 경험도 이런 종류의 감
정의 지배하에서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오래전 처음으로 마음을 주었던 여인 화연이 떠났고, 항상 입가에 슬픈 미소
를 떠올린 채 자신과 비를 맞이해주던 성휘도 떠났다. 그리고 이제는 유일한
자신의 핏줄. 화연과 자신이 서로 사랑했다는 증거였던 비도 세상을 떠났다.
" ............그냥 이렇게...... 끝나는 거냐..... 비......."
자신이 무슨말을 내뱉고 있는지도 모른 채 훼이는 허물어져가는 자신의 마음
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냥 이대로 부서져 버려도 상관없다.
아니, 오히려 부서져 버리는 편이 나을 것이다. 시간을 되돌릴 수 없을 바엔
차라리..... 산산히 부서지는 편이 나을 것이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그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제는 두 번다시 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봐주지 않을 아들의 모습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며 훼이는
그저 자리에 앉아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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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핫... 전 나쁜 사람이에요.
주인공은 슬픔에 빠져 있는데 전 웃으면서 언니랑 사촌 동생이랑 잡담을 나
누며 이걸 쓰고 있으니...^^ 미안해요. 훼이..
우엥....비가 죽어버렸군요. 흑... (죽인 주제에 말이 많습니다)
오늘 이야기에는 감정에 관한 것만 나왔죠? 그래서 대사도 별로 없구요.
(저는 성격이 음침한 지도 몰라요....)
그리고 잠시 다음편 예고를 드리져. 제 언니의 바램대로 다음편 (그 다음편
일수도)에서는 때려 부수는 장면을 넣기로 했답니다.
이 소설의 주제는 상실과 시간이라는 단어와 관련이 많이 있습니다. 나중에
끝나고 나면 무엇을 표현하려 했었는지 자세히 쓸테니 여러분이 그렇게 느끼
셨는지 판단해 주세요. 그리고 아니라면 가차없이 돌을 던져주세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주말되세용 ^-^
PS> 오프에 오시는 분 계시면 인사해 주세용.
번 호 : 998 / 3334 등록일 : 1999년 07월 20일 01:13
등록자 : 까망포키 이 름 : 포키 조 회 : 206 건
제 목 : [연재] 흑룡의 숲 제 7장 十三.
흑룡의 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