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룡의 숲-41화 (41/130)

제 8장 부정(不貞)

그것이 너의 선택이었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이걸로 네가 느낀 슬픔이

채워지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이것 뿐이구나.

..........미안하다.

一.

비록 하계에 있었던 화란이었지만 그녀는  간접적으로나마 비의 죽음을 전해

듣고 눈물을 흘렸다. 그녀가 가진 홍룡왕이라는 이름은 그녀에게 비의 장례에

참석할 시간조차 할애해 주지 않았다.

보좌관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찾아온 흑룡궁  별궁의 입구에서 화란은

들어서야 할 것인지 계속해서 고민하고 있었다. 더 이상  훼이에게 가까이 다

가 간다면 홍룡왕인 그녀의  이름에  누가 된다는 보좌관의   설명도 화란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사랑하는 아들을 자신의 눈앞에서 잃어버린 훼

이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가 아무리 강인한 자라고 해도  아들의 죽음앞에서 무너지지 않았으리라는

보장은 할 수 없었다.

가슴이 떨려오기까지 했다. 훼이는 과연 어떤 표정으로 자신을 맞이할 지....

" 어서오십시오. 홍룡왕 전하."

결심을 굳히고 별궁의 입구로 발을 들여놓자 낯익은 병사가 화란에게 인사를

건넸다. 화란과 동년배로 보이는 흑룡족의 청년.

변두리에 위치한 별궁의 병사인 자신의 직분에 무척이나 충실한 예의바른 청

년. 그것이 화란이 그에게서 받은 인상이었다.

화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병사의 인사에  답하며 정원을 지나쳐 궁 안으

로 들어섰다. 익숙한 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궁 내부는 생소한  느낌이 들었

다. 언제나 보아왔던 자신의 화천궁과 다르지 않은  구조였음에도 오늘따라

엷은 갈색의 나무판이 깔린 바닥이 생소했다.

얼마간을 익숙한 걸음으로 더 걸어 들어가자 훼이가 기거하고 있는 방의 문이

보였다. 별다른 장식조차 붙어있지 않은 수수한 문.

화란은 가볍게 심호흡을 하며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나서  천천히 문에 손을

가져갔다.

" 훼이..........."

방안에 앉아있을 훼이를 보기 전에 자신의 마음에 다짐이라도 하듯이 화란은

훼이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 헉....."

화란은 짧은 신음성을 내뱉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언제나 처럼 발목까지  길게 내려와 훼

이의 온몸을 감싸고 있는 깔끔한 검은 파오를 걸친 차림새도. 어깨를 타고 흘

러내린 검은 머리카락도. 입가에 떠오른 희미한 미소까지도 예전과 조금도 달

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나. 훼이의  눈빛만은 아무것도 담지 않은 채 그

저 검게 빛나고 있었다.

" 훼이........?"

화란은 자신도 모르게 떨려오는 음성으로 훼이의 이름을 불렀다.

" 괜찮아요. 훼이?"

계속 이어지는 화란의 말에 훼이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깊은 빛을 간직하고 있던 훼이의  눈동자에는 감정이라고 부를 수 있

는 그 어떤 빛깔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무감각하게 시간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긴 듯이 그렇게 훼이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            *            *            *

하계로 통하는 공간의 문이  열리자 마자 유에린은  온몸에 느껴지는 예리한

칼날과도 같은 기운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 이건......."

" 교룡의 기운이다. 용족의 생기를 빨아들인 교룡의 기운."

유에린의 질문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훼이는 빠르게 대답했다.

훼이의 눈은 이미 푸르고 흰 빛이 난무하는 숲을 향해 있었다.

" 강하다고 소문이 자자한 백룡족의 비도 고전하는 모양이군."

유에린의 눈에는 난무하는 두가지 힘의 충돌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

만 훼이는 멀리 떨어진 숲속에서 일어난 싸움의 상황이 보이는 듯 했다.

입가에 엷은 미소까지 매단채 훼이는 빠르게 숲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 봐두면 도움이 될거다. 그리고 네 몸은 네가 지켜라."

비록 유에린을 돌아보며 한  말은 아니었지만 유에린은  등을 돌린 훼이에게

대답을 건네고는 말없이 훼이를 따랐다.

숲으로 가까이 다가서면 설수록 공기를  찢는듯한 날카로운 바람소리와 안개

처럼 끈적하게 몸을 덮어오는 푸른 기운이 기분나쁘도록 강하게 느껴졌다. 머

리보다 먼저 몸이 두가지 기운에 대항하며 기민하게 움직였다.

훼이는 먹이를 노리는 매의 눈처럼 날카로운  시선으로 푸른 기운에 덮힌 교

룡의 사내를 응시했다. 그리고 미세하게 훼이의 몸이 멈칫했다. 비록 그 자신

이외에는 아무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미약한 움직임이었지만 훼이의 가슴 속

은 크게 두방망이질 치고 있었다.

이미 잊었다고 생각했다. 아니, 묻어두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훼이 혼자만의 착각 인지도 모른다.

이미 그 때로부터 두배도 넘는 시간이 흐른 후였지만 그때의 기억은 바로 조

금전에 일어난 일 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창백하게 미소짓던 비의 얼굴이....... 바로 눈 앞에서 푸른 기운을 흩뿌리고 있

었다. 얼굴가득 굳어진 슬픔과도 같은 표정을 떠올린 채.

훼이는 아예 동작을 멈춰 버렸다.

뒤에서 말없이 훼이를 따라오고 있던 유에린은 석상처럼 굳어진 훼이의 모습

에 깜짝 놀랐다.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모습. 그것은 어떤 상황에 놓여  있어도 유연하게 대

처해가던 훼이의 모습이 아니었다.

" 훼이...."

유에린은 조심스럽게 훼이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훼이는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흔들며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걸음은 유에린이 느

끼기에도 아까와는 달리 힘이 빠진 것이었다.

유에린은 갑작스럽게 변해버린 훼이에게 무슨  일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왠지

그래서는 안될 것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고개를 쳐들어 질문을 속으로 삼켰

다.

[ 광환(光環) - 시각을 마비시키는 주문 - ]

낮게 울린 훼이의 목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태양의 빛보다 더 강한 밝은 빛이

숲 전체를 가득 메웠다.

방금전에 훼이가 외친 주문은 모든 용족들이  사용할 수 있는 기초적인 주문

의 하나로 강한 빛으로  시각을 마비시키는 주문이었다. 하지만  역시 훼이가

가진 마력의 크기 때문인지 보통의 광환 주문도 커다란 효과를 발휘했다.

숲을 가득 메우고 있던 날카로운 기운들이 일시에 사라졌다. 그리고 희미하게

지친 기색을 떠올리고 있는 백룡왕비 챠렌과 훼이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얼굴

이 동시에 훼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 직접 와주셨군요."

지금까지 격렬한 싸움을 하고 있던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차분

하게 챠렌이 인사를 건넸다.

그런 그녀의 태도에 유에린은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소문으로만 들어온 보좌

관이자 비인 백룡족의 챠렌. 처음으로 직접 그녀의 얼굴을 마주대한 유에린은

소문이 틀리지 않았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유에린이 그토록이나 떨쳐버리기를 원하는 나약함과 망설임은 애초부터 그녀

에겐 존재하지 않은 것 같았다. 환하게 빛나고 있다고  느껴질 정도로 챠렌은

당당했다.

" 아닙니다. 명계와의 일은 제가 나서는 편이 훨씬  더 금방 처리되리란 건

누구나 알고있는 사실입니다."

보통때와 마찬가지로 별다른 감정이 섞이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유에린은 훼

이의 목소리에 섞인 미세한 흔들림을 읽었다.

" 저를 잊고 계신 것 같습니다. 두분은.........."

엷게 울려퍼지는 목소리를 들은 훼이의 몸이  눈에 띌 정도로 크게 꿈틀거렸

다.

그 목소리는 잊혀지지 않을 만큼 깊게  자리한 그리움을 훼이의 가슴 속에서

끄집어 내려 하고 있었다.

" 아직 기억하고 계시겠지요. 훼이......"

훼이는 아무말 없이 무너져 내릴 듯이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눈 앞에 선

교룡을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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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의 제목에는 두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한자의  뜻 그대로의 의미

와 동음이의어인 또 다른 단어. 읽다보면 깨닫게 되실 거에요. ^^

아마도 8장에서 그동안 가장 궁금하게 여기셨던 의문 하나가 풀릴겁니다.

그리고 미리 덧붙여서 숫자 계산은 사양입니다!

그리고 7장의 제목이었던 역린(逆鱗). 어때요? 7장 전체의 내용이나 분위기와

잘 어울렸나요? 최대의 약점.  훼이에게 있어서는 혈육에  대한 사랑이었겠지

요.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느끼고 있을 주변인에  대한 사랑. 흑룡의

숲에서 표현하고 싶은 하나의 주제입니다.

더운 여름 여러분께 홈매트 하나씩 드립니다. ^-^ 오늘도 감사해요.

번 호 : 1115 / 3334 등록일 : 1999년 07월 26일 00:03

등록자 : 까망포키 이 름 : 포키 조 회 : 183 건

제 목 : [연재] 흑룡의 숲 제 8장 二.

흑룡의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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