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장 부정(不貞)
二.
" 이젠 당신에게 질렸어요. 훼이!!"
그가 자신의 말을 듣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화란이었지만 그녀는
그렇게라도 외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다.
과연 저렇게 멍하니 앉아 있는 그가 자신의 마음을 송두리채 빼앗아간 바로
그 남자와 동일하단 말인가.... 믿을 수 없다. 아니, 인정할 수 없었다.
" 어서요. 어서 두눈을 움직여 날 봐요. 텅빈 시선이 아닌 당신만의 색이
담긴 시선으로 날 봐요! 훼이라는 남자가 이렇게 약했던가요? 현실에서 도피
할 만큼 그렇게 약했던가요?"
화란의 음성이 고요한 방안에 메아리 치듯 울렸다. 분명 밖에서도 그녀의 목
소리를 들었으리라. 하지만 화란은 개의치 않았다.
분명 입으로는 거칠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흘러내린 눈물이 그녀의 시야를 뿌옇
게 가로 막았다.
" 바보..... 당신은 바보에요........"
이제 흐느낌으로 변한 그 목소리로 화란은 계속해서 되뇌었다.
자신이 눈물을 흘리는 까닭은 곁에 있었음에도 소중한 훼이의 아들인 비를
도울 수 없었다는 사실과 훼이에게 자신은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사
실이 안겨주는 뼈아픈 절망감이 뒤섞인 때문이었다.
훼이가 조금이라도 털끝만큼이라도 화란을 생각했다면 지금 이처럼 멍한 눈
동자로 자신을 가두어 두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것도 아니다.......
자신은 훼이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 제발........부탁이에요.... 아무말이라도 좋으니까... 돌아가라는 말이라도
좋으니까 제발 입을 열어봐요......"
속삭이듯 작게 흔들리는 목소리로 화란은 훼이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하지만 훼이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 그토록이나...... 그토록이나 슬픈가요......? 당신의 아들이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이....... 혈육을 잃은 아픔이 어떤 건지 나는 잘 몰라요. 명을 다한 죽음
이외의 것은 본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하지만 훼이........ 당신의 곁엔 아
직도 소중한 이들이 많이 남아있다는 걸 왜 모르나요....... 당신에게 있어선 비
만이 전부였나요.....? 이제 먼지로 화해 흩어져 버린 인간 여인과의 사랑이 그
토록 소중한가요..... 그런가요?"
화란은 절망했다.
그 어떤 말로도 훼이를 현실로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이.
이제 확실하게 자신은 훼이의 곁에서 떨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뼈아프게 와닿았다.
화란은 한손으로 눈물을 훔쳐내며 몸을 꼿꼿하게 폈다.
가슴이 아픈 것은 사실이지만 자신에게는 해야할 일이 있다. 사랑하는 남자를
기다리는 여인이기 이전에 그녀는 홍룡족이라는 한 일족의 왕이었다. 왕은 언
제 어디서고 냐약한 모습이어서는 안된다.
슬픔은 이곳에서 모두 떨쳐버리고 다시 홍룡궁으로 들어설 때 그녀는 왕의
모습이어야 했다.
" 마지막으로 하나만 이야기 할께요. 비록.....지금의 내게는 당신을 되돌릴
수 있는 힘은 없지만..... 맹세할 수 있어요. 지금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화란
의 마음을 가져갈 수 있는건 당신 뿐이라는 것을요. 비록 혼인을 하고 아이를
낳게 된다고 하여도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어요. 홍룡왕 화란이라는 이름을
갖기 이전에 난 당신을 사랑하는 여인이었으니까요."
그토록 절망하고 절망했지만 화란은 강인한 여인이었다. 그렇게 말을 내뱉고
난 후의 화란은 언제 눈물을 흘렸었나는 듯이 말끔한 얼굴로 별궁을 나섰다.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는 시비들과 병사에게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하면서도
그녀는 표정 하나 흐트리지 않고 당당하게 걸음을 옮겼다.
비록 마음 한구석은 무너져 내렸지만. 지금이라도 당장 눈물이 흐를 것 같았
지만 화란은 결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그냥 기억하겠어요.
고고한 어둠에 녹아들던 당신의 모습을.
냉정한 얼굴 속에 담긴 따스함을.
가끔씩 보여주었던 부드러운 미소를.
검은 눈동자에 담겨 있던 깊은 이해를.
애타게 바라보았던 파오자락에 감싸여 있던 당신의 모습을.
당신과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검은 머리카락을.
굳어진 듯 하면서도 배려가 담겨있던 당신의 음성을.......
나는 그냥 기억하겠어요.
어느날엔가 당신이 정신을 차리고 날 찾는다고 해도 난 당신의 얼굴을 마주
대하지 않겠어요.
지금이 마지막입니다.
이렇게 당신을 떠올리며 추억하는 것도.
지금의 시간이 지나면 당신은 영원히 추억속에 묻힐거에요.
안녕....... 훼이........
* * * *
" ..........?"
챠렌과 유에린은 훼이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느끼고 있었
다. 그저 두 눈으로 상대방을 응시하기만 한 채 훼이도 교룡도 마치 굳어진
듯이 움직이지 않았다.
물론 두 여인도 눈 앞에 선 교룡의 모습이 놀랄만큼 훼이와 닮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교룡이 훼이의 핏줄이 아니라는 것 또한 알 수 있었
다. 훼이의 아들이었던 비라는 이름의 교룡은 오래전 영계에서 안식의 잠을
누리고 있음을 그들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누가......네게 그 모습을 허락했지?"
한동안의 침묵 끝에 얼음처럼 날카로운 음성으로 훼이가 입을 열었다.
흔들리는 듯이 보이던 훼이의 얼굴도 어느순간 본래의 냉막하고 차분한 표정
으로 돌아가 있었다.
" 생기....... 교룡에게 있어서 생기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알고 있었을텐데...."
훼이의 말투와 마찬가지로 교룡의 말투역시 어느새 날카로운 반어가 되어있
었다.
" 과거는 과거다......"
훼이의 말에 교룡은 냉소지었다.
" 과연 그럴까......"
말을 마침과 동시에 교룡의 몸에서는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못할 정도로
강한 푸른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챠렌과 유에린은 저절로 싸움의 범위 밖에서 물러난 자신들의 몸을 보며 의
아함을 감출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원인은 머지않아 깨달을 수 있었다.
이제는 완전히 푸른 기운에 가리워져 보이지 않는 저 숲속의 훼이가 자신들
을 밀어낸 것이다.
" 가까이에서 본 건 처음이에요."
" ...........?"
유에린은 잠시 말의 의미를 되씹었다.
하지만 챠렌의 시선은 분명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훼이와 교룡을 제외하고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자신뿐. 챠렌의 말은 분명 자신에게 향한 것이었다.
조금 의외였다. 챠렌은 자신과는 다른, 힘을 가진 높은 곳에 있는 여인.
한 일족의 비와 보좌관이라는 신분을 가진 그녀가 아무렇지 않게 평범한 자
신에게 말을 건 것은 의외라고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자
신에게 존대를 하는 그녀의 모습은 소문으로만 들어왔던 용감하고 당당한 여
인의 느낌과는 거리가 멀었다.
" 방금 전의 교룡의 모습은 비라는 이름이 가졌던 모습이겠죠?"
유에린의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은 아니었다. 잠시 유에린을 향하고 있던 그
녀의 시선은 어느새 푸른 기운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숲을 향하고 있
었으니까.
" 훼이는 약하지 않아요."
" 그걸 모르는 자도 있을까요?"
그리고 두 여인은 아무말 없이 같은 방향을 응시했다.
두 여인중 어느 누구도 훼이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까지 계속
이겨왔으며 어느 누구도 그를 어떻게 하지 못했다.
천상계도, 명계도, 천계도 그를 속박할 수는 없었다.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으며 자유롭게......
자신의 수명을 넘어서 오랜 시간을 영유해오며....
훼이는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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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그러고 보니 나도 모르게 두글자 제목을 또 썼군....--
흑룡 이전에 쓰던 같은 배경의 소설은 각 장의 제목이 전부다 두글자 였죠.
아무래도 그 영향을 받고 있는 듯.... 흐음....제목이야 아무렴 어때....--
8장을 끝낸 이후에는 좀 밝은 에피소드로 진행시켜볼까 해요. 지금까지의 분
위기가 너무 칙칙한 것 같아서.....
난 음침한 아이인걸까.....
헤헷...글구요. 화란의 모델은 제 언니에요(딱 한명한테만 말했었는데 ^^)
아...제 구린 문체를 좀 어떻게 뜯어 고치고 싶군요...
날씨도 더운데 문체는 늘어지고.....미치겠다.
이럴때는 먼가 화끈하고 때려부수는 이야기가 쓰고 싶어 집니다.
< 잠깐 설정 >
영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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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천상계--- 천계 --- 환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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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계
┕
명계
위에 있는 이상한 도식이 머냐구요? ^^
각 계간의 연결모식도 입니다.(에잉 구려라~~)
그니까 연결 관계대로 각 계간의 이동이 가능한 거랍니다. 어느 위치가 더
높고 이런건 없어요. (이해 못하시는 분은 없겠죠?)
읽어주셔서 감샤~~
번 호 : 1143 / 3334 등록일 : 1999년 07월 27일 00:15
등록자 : 까망포키 이 름 : 포키 조 회 : 192 건
제 목 : [연재] 흑룡의 숲 제 8장 三.
흑룡의 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