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룡의 숲-43화 (43/130)

제 8장 부정(不貞)

三.

훼이는 아직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것은 아직 그의 마음에 망설임이  남은 까닭이었다. 자신의 눈  앞에 선 채

온 몸에서 푸른 기운. 즉, 마력을 뿜어내고 있는 자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났다해도. 이미 기억 속에서 조차 지우

려고 했어도 사라지지 않은 혈육에 대한 이끌림은 훼이를 망설이게 만들었다.

분명 비는 죽었다.

그리고 눈앞에 선 교룡은 비가 아니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피어오르는  작은 바램은 현실을 거부하려  했다. 비록

비의 모습을 하고 있는 교룡이 비가  아닐지라도 훼이는 다시 시작하고 싶었

다. 다시한번 아들의 이름을 내뱉고 싶었다.

" 망설이는 건가? 당신답지 않군......"

아직까지 공격할 의사를 가지지 않은 듯  자욱한 안개처럼 주변을 가득 메운

푸른 기운만을 풀어놓은 상태로 교룡은 입을 열었다.

훼이에게 주어진 두갈래의 길.

하나는 마음속의 바램대로 따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눈 앞의 현실에 분노

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 훼이는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 요희의 짓이군......"

묻지 않아도 당연히 그녀가 일을 벌였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명계에서 살아

가는 자들이 다른 곳에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녀의 힘이 필요하다. 살

아있는 자들이 죽음의 땅인 명계에  들어서기를 꺼리듯 죽은자들은 살아있는

자들의 땅에 들어서길 꺼려한다.

명계의 모든 것들을 지배하는 요희라는 이름의 여인은 명계가 생겨났을 때부

터 그곳을 관리해온 자였다. 그녀가 얼마나 오랜 세월을 그곳에서 지내왔는지

는 어느 누구도 모른다. 명계가 언제 생겨났는지 확실하게 아는 자가 없기 때

문이었다. 물론 모든 것들의 수명을 관리하는 천상계의 천제라면 알지도 모른

다. 하지만 천제로서도 명계는 관리 밖의  영역. 각 계의 일은 계에서 해결해

야 하는 것이다.

" 요희라..... 확실히 명계의 모든 것은 그녀의 지배하에 있지...."

교룡의 목소리는 낮게 잦아들고 있었다.

" 하계로 나온 건 날 불러내기 위함이겠지?"

마찬가지로 답을 바라고 한 질문은 아니었다.

훼이의 물음에 교룡은 어딘지 모르게 멍한  기색을 담은 눈동자로 가만히 훼

이를 응시했을 뿐이었다.

" 너는......"

훼이가 막 말을 꺼내려 하자 교룡은 손을 들어 그것을 제지했다.

" 알고 있으면서 쓸데없이 시간 낭비할 필요는 없겠지. 진실이든 아니든 현

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그말을 내뱉은 후 교룡의 눈에 날카로움이 돌아왔다.

" 죽음을 방치한 것은  당신이야. 떠나간 후에 헛되이  모든 걸 파괴해봤자

현실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 알고 있잖아? 그래서  그토록이나 자신의 마

음을 묻어둔 거잖아. 나를 보면서 착각에 빠져있겠지?  다른 용족들에겐 외경

(畏敬)의 대상일지 몰라도 내게 당신은 현실에서 도피한 낙오자일 뿐이야."

훼이는 약간 굳어진 안색으로 교룡을 바라볼 뿐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 자, 어디 한번 해보시지? 다시  한번  그 손으로 날 죽여봐.  언제까지고

이 모습으로 되살아나줄테니....."

그리고 그 말을 듣는 순간 훼이는 마음을 정하고 있었다. 마음을 정하자 자신

도 모르게 입가에 엷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훼이의 손을 중심으로 검은 기운이 뭉쳐지고 있었다.  아무런 주문도 없이 눈

을 몇번 깜빡일 정도로 짧은 순간에  훼이의 손에서는 날카로운 기운을 품은

예기가 형태를 갖추어갔다.

싸늘한 칼날이 전해주는 섬뜩함과도 같은 기운을 품은채 의지를 가지고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처럼 검은 기운은 주위를 가득  메운 푸른 안개를 헤치고 교

룡을 향해 날아갔다.

숲에서 어느정도 떨어진 곳에서 줄곧 싸움의 경과를  기다리고 있던 두 여인.

챠렌과 유에린은 일순간 푸른 안개를 헤치고 뻗어나간 검은 기운을 자신들의

두 눈으로 확인하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멀리서도 피부에 와 닿을 정도로 강력한 힘. 저것이 바로 훼이가 가진 마력이

었던가.

유에린은 훼이가 직접적으로 그의 힘을 사용하는 것을 처음으로 보았다. 언제

나 훼이가 유에린에게 가르쳐 주던 것들은 청룡족이 사용하는 힘이었지 흑룡

족 본연의 힘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행 상생의  위치에 놓인 힘이기 때문에

훼이가 그토록이나 물의 힘을 잘 다루는지는  몰랐지만 늘 그런 훼이의 모습

만을 봐왔던 유에린에게는 강한 충격이었다.

흑룡의 힘....... 아니, 훼이의 힘......

문득 유에린은 자신이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현무족과 겨루기 위해 힘을 기

르고 있다는 사실이 무의미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 역시 대단하군요. 난 지금까지 저런 형태의 공격주문은 본 적이 없어요."

강한 자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을 담은 눈빛으로 챠렌이 말을 꺼냈다.

" 그는 훼이니까요......."

유에린은 낮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조금전에 방출한 마력의 기운이 채 교룡에게  닿기도 전에 훼이는 또 하나의

주문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더 이상 훼이에겐 주문이라는 형태로 마력을 방출

할 필요가 없었기에 그는  그저 힘을 내보내기 쉽도록  손 끝에 자신의 힘을

집중시켰을 뿐이었다.

반대편에 있는 교룡도 물론 훼이의 공격에 가만히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훼이의 공격주문이 자신을 향한 그 순간 교룡  역시 훼이에게 공격을 가했다.

주위를 감싸고 있던 푸른 안개가 소용돌이 처럼 하나의 거대한 줄기가 되어

훼이를 향해 내쏘아진 것이다.

훼이가 두 번째 공격을 시작하려 할 때  푸른 소용돌이는 눈 앞에 와닿아 있

었다. 하지만 훼이는 그것을 두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

고 완전한 어둠의 빛깔을 띤  한 마리의 묵룡(墨龍)을 교룡에게로  쏘아 보냈

다. 그와 동시에 훼이를 향해 짓쳐들어온 푸른  소용돌이가 훼이의 온몸을 감

쌌다. 그리고 잠시후.

훼이는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변함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교룡의 공격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은 듯 옷자락 하나도 찢겨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반대편에 선 교룡은 연달아  퍼부어진 훼이의 공격을  다 막아내지 못했는지

몸을 비틀거리고 있었다. 얼굴색이 조금 창백해지기는 했지만 여러 용족의 생

기를 흡수한 것 때문인지 금새 다시 몸을 추스렸다.

" 내 몸속에는 어린 용족들의 생기이외에도 오래전에 받아들인 당신의 소중

한 아들의 생기도 있지..."

무슨 생각인지 교룡은 훼이를 향해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훼이의 대답은 말이 아니었다. 언제 힘을 집중시켰는지 느끼지도 못할

만큼 짧은 시간에 훼이는 힘을 모았고  교룡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것을

쏘아보냈다.

아까의 묵룡보다 두배는 더 큰 백년된  아름드리 나무의 키만한 다섯 마리의

묵룡들이 날카롭게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내며 교룡에게 짓쳐들어갔다.

그리고 다른 이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훼이는 교룡의 몸이 바닥에 무

너져 내리는 것을 보았다.

*            *            *            *

시비들의 눈에도 훼이가 달라졌다는 것은 확연하게 보였다.

꼬집어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훼이의  전신에서 풍겨나오는 분위기는 예전의

그와는 확연히 다른 것이었다.

그리고 훼이의 얼굴에는 더 이상 예전처럼 부드럽고 편안한 미소가 떠오르지

않았다. 말수 또한 눈에 띄게 줄었다.

더 이상 그의 모습에서 과감하게 자신의  지위를 내던진 흑룡왕의 후계자 였

던 훼이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화란이 떠나간 이후로 더 이상의  방문자도 없는 조용한 별궁에서 훼

이는 세월에 묻혀가길 바라는 듯이 조용히 잠겨 있었다.

- 진정으로 이것이 내가 원하는 일인가?

훼이는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렇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지친 듯이 고개

를 숙이고 앉아 있는 모습은 스스로 느끼기에도 자신이 아닌 듯 했다.

- 언제고 일어날 일이 아니었던가. 나 역시 때가되면 세상을 떠나는  것은 당

연한 이치인 것을.

하지만 비는 수명을 다 누리지도 못하고 허망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200년의

시간도 살지 못한채 그렇게 스러져가야했다. 교룡인 비가 보통의 용족들에 비

해 짧은 수명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죽음을

맞이하리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 언제고 떠날 것을 알고  있었다면 왜 고이 보내지 않고  이렇게 마음 속에

담아두는 것인가. 산자의 집착은 죽은자의 안식을 방해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닌데도.....

그렇게 끝나지 않을 문답을 훼이는 계속해서 반복했다.

자신의 방 안에 틀어박힌 채 어떤  움직임도 없이 훼이는 끊임없이 떠올리고

또 떠올렸다. 언젠가는 잊어야 할 아들의 모습과 함께 했던 시간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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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은 길이가 짧은 편에 속하겠네요. 7장이 너무 길어서 그런지 긴 이야기 다

음에는 짧은 이야기를 쓰고 싶어져요. 너무 길어지면 지루하잖아요. ^^

흐음... 오늘 등장한 것은 개떡같은 전투장면 이었습니다. 생동감 없음. 묘사능

력  제로의 구린 장면--;;; 자, 돌 던지셔도 안 피할께요...

< 잠깐 설정 >

교룡이란 무엇인가?

본문 내용에도 예전에 언급 된 적이 있듯이 교룡은 인간과 용족 사이의 혼혈

로 태어난 자들을 부르는 말입니다. 강인한 용족과  짧은 수명을 사는 인간의

피가 섞였기 때문에 교룡들은  일찍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피는

용족 본연의 강인한 마력이 담긴 피를  흐리게 하기 때문에 용족들은 인간과

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는. 즉, 교룡을 탄생시키는 것을 금기시 해 왔습니다.

비 이전에도 교룡의 존재는 있긴 했지만 그것은 한손에도 다 꼽히지 못할 정

도로 작은 숫자이고 그들의  생은 무척 짧았거나  아니면 천계에도 하계에도

속하지 못한채 포악해 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아마 뒤에 등장할 에피소드 가운데 하나에  다른 교룡의 이야기도 나올 겁니

다. 그리고 본문에 자주 등장하는 내용  '교룡에게는 용족의 생기가 필요하다'

이것은 말 그대로 교룡이 용족의 생기(생명의 기운)를  흡수하게 되면 인간의

피가 섞임으로 인해 생겼던 마력의 불균형을  채워줄 수 있기 때문에 필요한

것입니다. 수명을 늘릴 수는 없지만 용족의 생기는  교룡에게 강한 힘을 내게

해 줍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다른 이의  생명을 뺏는 일이니 당연히 금기시

되겠죠. 그 때문에 교룡의 존재가 용족들에게 부정적으로 받아들여 지는 것인

지도 모릅니다.

읽어주신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저는 이만 휘리릭.

번 호 : 1176 / 3334 등록일 : 1999년 07월 28일 00:18

등록자 : 까망포키 이 름 : 포키 조 회 : 183 건

제 목 : [연재] 흑룡의 숲 제 8장 四.

흑룡의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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