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룡의 숲-44화 (44/130)

제 8장 부정(不貞)

四.

"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했지......"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희미하고 작은 목소리로 교룡은 입을 열었다.

" 아무리 그녀.... 요희가 강하다고 해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오랜 시간

을 살아왔다고 해도 그녀는 당신을 이기지 못해.  그녀는 명계의 땅을 떠나서

는 살아갈 수 없으니까.......그리고  나역시 용족의 생기를  흡수했지만 당신의

상대는 되지 못하지....."

어느 누구도 질문을 던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교룡은 말을 이어나갔다. 힘

없이 바닥에 쓰러진 그의 얼굴에는 조금전까지만 해도 싸늘하게 웃음을 던지

던 자와 동일인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온화한 표정이 떠올라 있

었다.

" 내가 교룡으로 태어난 건  내가 원해서가 아니야...... 어느 누구도  자신이

원해서 태어나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지금도 살아서 존재하고 있

는 날...... 날 낳아준 부모는 내팽개쳤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

만......... 그건 너무나 무책임한 행동이야....."

싸움이 끝남과 동시에 곁으로  다가선 챠렌과 유에린은  숨소리 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침묵을 지키며 교룡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곧 생명의 불이 꺼질 것처럼 교룡의  모습은 위태롭게 보였지만 얼굴에 떠오

른 온화한 미소는 너무나도 편안해 보였다.

" 그래서 세상이 끝날때까지 부모를 원망할 셈이었나......?"

나직한 훼이의 물음에 교룡은 작게 웃었다.

" 원망......? 원망이라고.......?"

" 그렇게 생각하는한 넌 영원히  요희에게서 그리고 명계에서도 해방될 수

없어."

" 지금의 당신이라면 우리를 이해할 수  있지 않나? 정해진 수명이 있다는

것. 죽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자신이  죽던 날로부터의 모

든 기억을 간직하고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자신을 잊을만

큼 그토록 시간속을 헤메여야 한다는 사실이 피를 말릴 정도로 끔찍한지...."

훼이는 고개를 저었다.

" 어떤 것도 직접 겪어보지 않고서는 확실하게 대답할 수 없지. 물론 나 역

시 오랜 시간을 살아오긴 했지만 그건  명계를 떠도는 자들과 비교하면 턱없

이 짧은 시간이지. 그렇지 않나?"

교룡은 훼이의 물음에 대답없이 웃기만했다. 어딘지 모르게 공허해 보이는 그

웃음 속에서 훼이는 세월에 지친자의  눈을 보았다. 천년을 뛰어넘은  세월을

살아온 훼이보다도 더 오랜 세월을 살아온 교룡. 그 역시 지금의 자신이 느끼

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간이 주는 무게를 느끼고 있을까.

그런 교룡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훼이는 문득 비는  행복하지 않았나 하는 생

각을 떠올렸다. 비록 오랜 삶을 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비에게는 죽음이라는

형태의 안식이 주어졌기 때문에. 훼이의 눈 앞에서 지나간 세월의  무게에 짓

눌린 채 고통스러운 어조로 말을 내뱉는 교룡은  언제까지고 안식을 얻지 못

할 것이었다.

" 돌아가라...."

훼이가 내뱉은 말에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교룡도  곁으로 다가선 두 여인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무언가를 물으려는 듯 교룡은 입술을 움직였지만 결국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

다.

" 직접 나서지 않는 이상 더 이상은  초대에 응대해 주지 않겠다고 전해주

겠나. 알고 있을게 뻔한데 왜 이렇게 번거롭게 일을 벌였는지 모르겠군."

그 말을 하고 나서 훼이는 여전히 놀란 얼굴을 하고 있는 유에린에게로 시선

을 돌렸다. 말은 없었지만 유에린은 훼이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알아채고는

곧 챠렌에게 고개를 숙였다.

" 만나뵙게되어 반가웠습니다."

" 저도 마찬가지에요."

유에린의 인사에 답한 챠렌은 훼이에게 말을 던졌다.

" 저 교룡은 이대로 돌려보내도 될까요. 지금 당신에게 패했다고 해도 저자

는 8명이나 되는 어린 용족들을 죽였습니다. 다른 용왕들은  납득하지 않을지

도 모릅니다."

" 납득하지 못한다해도 어쩔수 없습니다. 명계에서 살아가는 자들에게 죽음

이란 없으니까요."

챠렌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훼이의 말대로 명계에  속한

자들은 육체의 죽음은 있을지 몰라도 계속해서 다시 태어난다. 지금  저 교룡

을 죽인다고 해도 얼마후에 교룡은 새로운 몸을 가지고 태어나  있을 것이다.

어린 용족들의 죽음을 막지 못한 것은 신속한 결단을 내리지 않은 왕들의 잘

못이었다.

" 알겠습니다."

챠렌은 그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잠시 여전히 바닥에 앉아있는 교룡에게 시선을 던진  후 세명의 용족은 가벼

운 목례로 인사를 나누고 각자가 가야할 곳을 향해 떠났다.

그리고 그들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교룡은  공허한 미소를 떠올리며 몸

을 일으켰다. 분명 명계로 돌아가면 요희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 틀림없었

다. 하지만 그것은 그뿐이었다. 요희역시 그에게 죽음을 주지는 못한다.

명계란 그런 곳이다. 영원이라는 시간의 굴레를 짊어진 자들이 살아가는 곳.

*            *            *            *

그것은 분명 살아움직이고 있었다.

마력을 통해서 방출되는 힘의 덩어리가 아닌 장엄한 아름다움을 가진 위대한

생명체.

하계의 인간들에게는 신(神)이라 불리는 그것.

밤하늘을 뒤덮는 검은 빛보다 더 어둡고 아름다운 검은빛을 품은 용(龍) 이라

는 이름의 생명체는 그 장대하고 아름다운  몸체를 움직여 가며 하늘을 가로

질러 어느 한 곳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많은 용족들이 하늘을 가로지르는  그 흑룡의 모습을  보고 놀라움으로 크게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언제보아도 선연한 아름다움을 뿌리는 피빛  저녁노을에 시선을 던지고 있던

훼이는 갑작스럽게 온몸에 일어나는 전율에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심장의 밑바닥에서부터 느껴지는 떨림.  그것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기이한 느낌이었다. 훼이는 놀랄만큼 빠른 움직임으로 방에서 나서 정원을 향

해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훼이 역시 하늘을 가로지르며 다가오는 거대한 흑룡의 모습을 보았다.

머리위에 솟아난 두 개의 뿔과 반짝이는 검은 비늘로  둘러싸인 몸체. 그리고

깊게 잠긴 검은 눈동자. 흑룡은 분명 훼이를 향해 오고 있었다.

어느 순간 훼이는 흑룡의 커다란 검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영혼을 사로잡을 듯

한 커다란 울림이 훼이의 온몸을 감쌌다. 그리고 훼이의  몸은 어느새 하늘위

에 멈춰선 흑룡의 눈앞으로 떠올랐다.

훼이는 한동안 흑룡의 앞에서 아무말도 하지 않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

대로 말하려고 노력했지만 자신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 아버지............"

거대한 흑룡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한없이 깊은 빛을 담은 눈동

자로 훼이를 응시했다. 훼이는 그 눈동자를 바라보며 한없이 몸을 떨었다. 그

떨림은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일으킨 것이었다.

한동안 훼이를 지긋이 바라보던 흑룡은 천천히 몸을 움직여  갔다. 훼이는 흑

룡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멍한 상태로 몸을 떨고 있는 훼이의 몸 속으로 흑룡의 몸은 빨려들어

갔다. 어떻게 그렇게 거대한  존재가 작은 훼이의 몸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

그것은 정말 환상처럼 느껴졌다.

- 이것이 내가 네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사죄다.....

훼이는 온 몸에 피어오르는 기이한 열기 속에서 그런 말을 들은 것 같았다.

그리고 흑룡이 완전히 훼이의  몸 속으로 사라진 후  훼이는 눈을 감고 몸을

가득 채운 열기 속에 자신의 몸을 맡겼다.

온몸에 퍼져있는 혈관 하나하나 머리카락  하나하나에도 그 열기가 퍼져나가

는 듯 온몸이 달아올랐다.

그리고 흑룡의 기운을 완전히 몸안에 받아들인 훼이가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

섰을 때 흑룡궁 별궁앞에는  많은 수의 용족들이  모여들어 훼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경외감과 불신 그리고 혼란이 담겨 있었다.

" 대체 아까 그건 뭐였지? 내 착각이 아니라면 그건 분명...."

누군가의 말소리가 웅성거림 속에서도 선명하게  피어올라 훼이의 귓가에 파

고들어왔다.

사실이다. 웅성거리는 용족들의 짐작대로 훼이가 아버지라고 부른  그 흑룡은

훼이의 아버지인 현 흑룡왕의 생명의 형태였다.

마력이 아닌 용족의 생명의 기운이 뭉쳐진 형태. 이체  용족에게 주어진 천수

에 다다르고 있던 흑룡왕의  생명. 그것이 용이라는 생명체의  형태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훼이는 지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자신의 아버지가 지금 무엇을

했는지 지금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조차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심한 충격이 훼이의 온 몸을 감싸고 있었다.

훼이는 검은 눈으로 웅성거리는  용족들을 바라보고 나서  아무말 없이 별궁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런 그의 모습이 사라지고  난 후에도 여전히 웅성거

리며 모여있는 용족들을 돌려보내기 위해 병사와 시비들이 곤욕을 치루고 있

을 때 훼이는 고개를 숙인채 침상에 걸터 앉아 있었다.

지금 자신의 몸에 흘러넘치고 있는 것은 분명 아버지. 흑룡왕의 생명의 기운.

이것으로 흑룡왕이 세상을 떠났나는 것은 누가  말로 전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갑자기 아버지가 남긴 한마디의 말이 떠올랐다.

이것이 내가 네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사죄다.....

사죄....... 과연 무엇에 대한 사죄인가.......

훼이는 혼란스러워진 머리속을  털쳐버리려는 듯이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그것은 혼란을 더욱 가중시킬 뿐이었다.

단 한번도.... 아버지가 자신에게 보여준 적이 없던 모습.

지금까지 970여년의 세월동안 흑룡왕은 한결같이 흑룡왕이었다. 훼이가 막 세

상에 태어나 자신의 두 발로 걷고  마력을 키우고 후계자의 자리에 오를때까

지도 그리고 후계자의 위를 버리고 비와  함께 별궁에 거처하기 시작했을 때

도, 성휘의 죽음으로 인해 천상계에서 힘을 썼을때도, 명계의 반 이상을 힘으

로 날려버렸을 때도. 흑룡왕은 언제나 흑룡왕의 모습으로  훼이의 앞에 서 있

었다.

단 한번도 자애로운 아버지의 모습으로 훼이의 앞에 선 적은 없었다.

아버지.......대체 무엇을 전하고 싶으셨습니까..... 제게......

훼이는 자신의 두 손을 굳게 쥐며 마음속으로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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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룡과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지만 (내용도 너무 미흡하죠 ^^) 명계와

의 이야기는 아직 끝이 아니랍니다. 요희는 좀 끈질긴 여자거든요 ^^

그리고 9장부터는 분위기를 좀 바꿔보기 위해서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

른 에피소드를 전개하려고  합니다. 어차피 지금까지의  분위기가 어디

가진 않겠지만...^^

아...그리고 8장 아직 안 끝났어용...^-^

요새 무지하게 덥죠? 더위 조심하시구요. 오늘도 감사드려용 ^0^

번 호 : 1199 / 3334 등록일 : 1999년 07월 29일 00:12

등록자 : 까망포키 이 름 : 포키 조 회 : 191 건

제 목 : [연재] 흑룡의 숲 제 8장 五.

흑룡의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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