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장 부정(不貞)
五.
그때는 몰랐었다.
아버지가 넘겨준 생명력이 어떤 작용을 하게 되는지.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용족도 그런 일을 한 전례는 없었기 때문이었
다. 아무리 부모라해도 어느 누가 자신의 생명력을 다른 이에게 전해 주겠는
가. 아무도 그런 생각조차 떠올린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훼이는 천년이라는 용족에게 주어진 수명의 시간을 지나서도 자신이
살아있음에 마음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의혹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하계의
인간들과는 다르지만 분명 용족들에게도 노화(老化)는 있었다. 하지만 훼이는
아버지로부터 넘겨받은 생명력이 몸에 자리한 그 순간부터 겉모습이 변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약간의 의심을 하기는 했지만 자신이 수명을 거스르는 자가
될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 순간 훼이는 깨달았다.
더 이상 자신은 용족이면서도 용족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리고 아버지가 왜 자신에게 생명력을 넘겼는지를.....
아버지라는 이름이 전해주는 무게가 얼마나 큰지를 마음 속 깊이 깨달았다.
아버지라는 이름은 세상의 그 무엇보다 더 큰 무게와 깊이를 가지고 있었다.
어머니라는 자애로움이 주는 사랑과는 다른 아버지만이 줄 수 있는 그 깊이
있는 사랑을 훼이는 천년의 세월을 보내고 나서야 겨우 깨달을 수 있었다.
아버지..... 당신은 제게 이것을 말해주고 싶으셨습니까?
훼이는 하늘을 향해 마음속으로 외쳤다. 어디선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를 아버지를 향해.
그리고 훼이는 그동안 머물던 별궁에서 나와 천계 최북단이자 흑룡족의 영토
에서도 최북단에 위치한 숲에 자리를 잡았다. 분명 이전에도 그 숲에는 이름
이 있었다. 하지만 훼이가 그 숲에 자리를 잡은 이래로 그 숲은 흑룡의 숲이
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어느 누가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는지는 아무도 몰랐지만 자연스럽게 용족들
은 훼이라는 이름에 경외심을 품으며 훼이가 머물고 있는 숲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
* * * *
" 그건 너무 안일한 생각이 아닙니까?"
다른 용왕들의 표정이 차분한데 비해 홍룡왕 란은 화를 참지 못하고 격양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 어차피 그라고 하더라도 명계에 사는 자를 완전히 소멸시킬 힘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예상했던 일 아니었습니까? 우리가 그에게 도움을 청한 것은
쓸데없는 희생을 막기 위해서 였습니다."
파이론이 담담한 어조로 말하자 란은 눈썹을 치켜뜨며 고개를 돌렸다.
" 그렇다면 죽은 용족들의 목숨은 누가 보상합니까."
" 홍룡왕께서 책임지시겠습니까? 그건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그의 처사가
최선이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직접 교룡과의 싸움까지 겪었고 어린 용족들의 죽음에 가장 먼저 뛰어들어
조사를 했던 챠렌의 말이었기에 홍룡왕 란은 얼굴을 더욱 찌푸렸을 뿐 더 이
상 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의자에 앉은 채 조용히 회합에서 논의되는 사항들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라
이엔은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설마설마 하고 있었지만 홍룡왕 란의
태도는 오늘로써 더욱 명백해졌다. 그는 흑룡족에게 적의를 보이고 있는 것이
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훼이에게.
현 용왕들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것이 홍룡왕 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여전히 거칠었고 여전히 직설적이었다.
란이 훼이에게 적의를 보이는 이유는 단 하나. 란의 어머니이자 전대 홍룡왕
이었던 여인이 바로 화란이었기 때문이다.
* * *
" 흐음....그도 들려오는 말처럼 천계를 등진 것은 아닌 모양이다."
당대 청룡왕 리판은 마주앉은 후계자 리린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
다. 지난번에 유안에게 생긴 불미스러운 일 때문에 리린은 수천궁 밖으로 나
가지도 않고 수련을 하는데 전념해왔다. 다시 같은 일이 반복될 리는 없었지
만 교룡하나 막아내지 못했다는 것이 그녀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 것이 분명
했다.
" 솔직히 조금 의외라고 생각했어요. 지금까지 그는 숲으로 찾아간 어느 누
구도 받아들여주지 않았잖아요. 유에린이 그만큼이나 절실한 이유를 가졌던
걸까요."
리린은 얼마전에 전해들은 유에린에 관한 소식에 의문을 감추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훼이가 누구인가. 감히 용왕들조차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자가 아
니던가. 그가 불러일으키는 가장 큰 경외심은 수명을 벗어나 오랜 세월을 살
아왔다는 것에 있었고 그에게 경외심을 품게 만드는 그 세월속에는 보통의
아니, 용왕족이라고 해도 경험하지 못했을 많은 일들이 녹아 있었기 때문이
다. 어느 누구도 가보지 못했던 명계도, 약간의 거리를 두고 지내온 천상계도.
그리고 환계에서조차도 훼이를 함부로 대하지는 못했다. 훼이는 천년이 넘는
시간을 그저 살아오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 시간 동안 여러 곳에 자
신의 흔적을 남겼다. 이제는 용족이라는 이름에서도 벗어난 듯이 보이는 훼
이. 그 때문에, 그가 가진 자유로움 때문에 많은 이들이 그를 경외의 대상으
로 여겼다. 언제나 그렇듯이 보통을 초월한 자는 더 이상 자신들과 동류로 보
이지 않는 법이다.
" 훼이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행동을 했던 간에 그가 한일 덕에 천상계와
의 사이가 소원해진 것은 우리 용족으로서는 달가운 일이니까 말이다. 나는
그가 그때 이후로는 영영 천계의 일에 대해 관심을 잃어버린 줄 알았다."
아버지의 말에 리린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완전한 이해의 빛을 보이지는 않
았다.
" 사실 그의 삶은 개인으로 놓고 보자면 결코 행복했다고는 말할 수 없을
지 모른다. 그는 바로 이 천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많은 것들을 잃었으니
까."
" 하지만 그가 그렇게 많은 것을 잃고도 여전히 이곳에 남아있는 것은 천
계에 대한 정이 남아있기 때문일 거에요. 그가 숲에 들어가 버린것도 그때문
이 아닐까요. 지난번 유안과의 수행때 흑룡왕님을 만나 뵙고 조금은 알게 되
었거든요."
리판의 얼굴에는 약간의 호기심이 떠올랐다.
" 무엇을 말이냐."
리린은 라이엔과 유안. 그리고 미하의 모습을 보고나서 그리고 유안에게 훼이
에 대한 말을 듣고나서 생각을 달리하게 되었다. 그전까지는 훼이는 그저 먼
하늘의 별처럼 닿을 수 없는 어딘지 모르게 이질적인 존재라고만 생각해왔다.
하지만 그도 분명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곳 천계에서 발을 디디고 살아가는
한명의 용족이었다. 그리고 훼이는 남아있는 자신의 혈육들을 위해 그들의 곁
으로 다가서지 않는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혼자만의 추측일 뿐이었지만 리린은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고는 생각하
지 않았다.
" 적어도 그의 존재가 있는 한은 우리 용족들에겐 언제고 기댈 수 있는 의
지가 될 수 있으니까요. 이번일도 그래요. 그는 아무말 없이 하계로 내려가서
교룡을 돌려보냈어요. 어쩌면 유에린이라는 어린 소녀가 그의 마음을 다시 돌
리고 있는지도 모르죠."
청룡왕 리판의 얼굴에는 엷지만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 그런것까지 생각하고 있었느냐. 역시 너는 후계자가 될 자격이 있구나."
아버지의 흐뭇한 어조에도 불구하고 리린은 고개를 내저었다.
" 전 아직 어려요. 그리고 너무나도 부족하죠. 후계자이긴 하지만 백룡왕비
인 챠렌보다도 터무니 없이 약해요. 전 다른이들의 도움 없이도 혼자 설 수
있는 왕이 되길 원해요."
리린은 청룡족 중에서 왕으로서 이름을 남긴 여인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다른 용족들에 비해 왕이된 여인들의 수가 적기도 했지만 그녀
들은 그저 보통이었을뿐 뛰어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리린은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이전까지는 그저 자신의 의무만 다
하면 된다고 안일하게 생각해왔지만 지난번에 겪은 교룡과의 일 이후로. 그리
고 지금 훼이의 곁에서 마력의 운용을 배우고 있는 유에린이라는 이름밖에
모르는 동족의 소녀를 떠올리며 리린은 찾아냈다. 자신이 목표로 삼을 그 무
엇을. 그리고 자신의 마음속에 잠자고 있던 열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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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짧은 8장도 끝났습니다.
8장에서는 훼이가 어떻게 해서 용족의 수명을 초월하게 되었나를 보여드렸습
니다. 제가 생각했던 의도대로 표현을 못해서 무지 아쉽습니다. 그치만 능력
이 딸리는 건 저도 어쩔 수가 없군요.
점점 시시해지고 있는 느낌...^^;;; 하지만 원래 제가 이런걸요....
흑룡의 숲은 100편 이내로 써서 가을 쯤까지 완결을 낼 생각입니다.
매일 연재 길드를 만든 것도 저와의 약속을 잘 지키고 싶어서죠 ^^
음..아무튼 완결의 그 날까지 열심히 노력해서 쓰겠습니다.
앞으로의 이야기들은 몇 개의 에피소드들과 조금 얽힌 이야기들이 전개될 것
입니다.
음...무심코 그동안 쓴 글들을 살펴보니 220페이지 정도가 되는군요.
오...놀라워라...언제 이렇게 썼지... 용량도 이제 곧 300kbyte를 넘어갈
것 같아요. 오오..기뽀.. ^///^
더운 여름 건강 조심하세용. 감사합니당. ^-^
번 호 : 1221 / 3334 등록일 : 1999년 07월 30일 00:54
등록자 : 까망포키 이 름 : 포키 조 회 : 176 건
제 목 : [연재] 흑룡의 숲 제 9장 一.
흑룡의 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