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룡의 숲-46화 (46/130)

제 9장 미풍(微風)

모든 파랑(波浪)을 잠재우며

어둠이 찾아왔다.

낮게 흔들리는 갈대숲 사이로

선명히 떠오른 그것은

잊혀지지 않을 기억.

一.

그것은 맹수의 눈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고요했다. 푸른색의 인광을

발한다는 그 두 눈에는 잔잔한 호수와도 같은 적막만이 떠돌고 있었다.

다른이들의 말을 빌자면 오금이 저려서 손끝하나 까딱하지 못할 정도가 된다

고 하는데 지금의 자신은  그렇지 않았다. 정면으로 눈이  마주치기는 했지만

그 빨려들어갈 듯한 고요함에 잠시 놀랐을뿐.  몸은 굳어지기는커녕 보통때와

전혀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의 몸의 두배는  더 되어보이는 몸집을 가

진 백호를 보며 그는 문득 어떤 생각을 떠올렸다.

만일 자신이 저 맹수를 잡는다면 분명  그는 이 나라에서도 제일가는 사냥꾼

으로 인정받을 것이다. 아무리 만금을 가지고 천하를 호령하는 왕이라해도 저

고귀하고 용맹스러운 동물의 가죽을 가져간다면 크게 자신을 환영할 것이 틀

림없었다.

하지만 잠시나마 그런 불경스러운 생각을 떠올린 자신을 꾸짖으며 고개를 저

었다. 그리고 그가 고개를 저음과 동시에 자신과  눈을 마주대했던 맹수의 제

왕역시 고개를 돌렸다.

맹수가 자신의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도 그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선채 몸을 움

직이지 않았다. 사냥꾼으로서 20년 이상을 살아왔지만 두 눈으로 숲의 제왕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물론 보통의 호랑이라면  그도 본 적은 있다. 하지만 지

금 그와 눈이 마주친 것은 그런 호랑이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고

귀하고 당당한 위엄을 가진  동물. 그야말로 왕이라는 단어  이외로는 설명할

수 없는 모든 동물의 지배자. 겨울에 쏟아져 내리는 하얀 눈빛과도 같은 털을

온몸에 두르고 그 흰  색의 설원에 새겨진 길다란  검은 자욱을 가진 전설의

영수. 바로 백호(白虎)였던 것이다.

한참동안 몸을 움직이지 않고 서 있던 그는 문득 너털 웃음을 터트렸다. 오늘

은 아무것도 잡지 못해서 조급한 심정이었는데 그것은 자신에게 백호를 만나

게 해 주려는 하늘의 안배였던 모양이다.

" 좋아. 오늘 하루 굶는다고 죽는건  아니니까. 누가 또 백호를 볼 수  있겠

어. 천운(天運)이지.... 암... 천운이야..."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그는 발을 움직여 산길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아직 해가 떨어지지는 않은 시간이었지만 이제  얼마 지나지 않으면 해가 지

고 날이 어두워질 것이다. 산의 밤은 빨리 찾아온다. 그는 사냥꾼으로 지내온

오랜 경험으로 그것을 알고 있었다.

붉고 노란빛깔로 물든 가을의  산은 그냥 지나쳐  버리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너무나 아름다웠다.

사냥꾼인 한(瀚) 역시 온 산을 가득 메운 단풍의 고운 빛깔에 잠시 넋을 잃었

다. 매일 같이 질리도록  보아온 산이었건만 오늘은  유달리 아름다워 보였다.

아마도 그것은 조금 전에 잊혀지지 않을 경험을 한 탓이라 생각하며 한은 곧

발걸음을 빨리 했다.

그렇게 어느 정도를 걸었을까. 어느던 그는 산의  중턱을 지나선 것을 알아채

고 잠시 숨을 돌렸다. 가을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날은 더웠다. 아침 저녁으로

야 쌀쌀한 바람이 불긴  하지만 한낮의 열기는 아직도  땀을 흘리게 할 만큼

따가웠다.

휴..... 목이라도 축이고 갈까.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한은 자주 찾아가는 근처의 옹달샘으로 나 있는 소

로에 접어들었다.

한의 팔길이 정도 만한  작은 폭의 샘에서는 언제나  몸을 얼릴 듯한 차가운

물이 솟아나왔다. 그리고 지금까지 가뭄에도 마른 적이 없는 샘이었기에 샘을

찾는 것은 비단 그 뿐만이 아니었다. 작은  동물들을 비롯해서 커다란 동물들

이 그곳을 찾았다. 개중에는 맹수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동물적인 날카로운 감

각을 가진 그들은 인간의 기척이 느껴지면 곧 몸을 피하곤 했다.

한은 두 손가득 옹달샘의 물을 담아 목을 축였다. 가슴이 저며올 정도로 시원

한 그 감각에 한은 온몸에서 흘러나오던 땀이 다 식어버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목을 축이고 나자 다시 몸에  힘이 돌아오는 듯 기분이 상쾌해졌기에

그는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막 소로에  접어든 그때. 한은 전율과도

같은 기이한 감각을 느끼며 걸음을 멈췄다. 과연  그의 감각은 틀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갑자기 울려퍼지던 산새 소리가 죽은 듯이 멈췄다. 한은 주위를 세

심하게 둘러보았다. 그리고 곧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 요......용...?"

구름한점 없이 푸른 하늘을 가로지르며 움직이는 그것은 분명 용이었다. 확실

하게 형체가 보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검은  안개에 둘러싸인 듯이 보이는 길

고 장대한 몸체는 바로 전설 속에서나 들어온 용의 생김새와 흡사했다.

한은 정신없이 자신의 두 눈을 비볐다. 하지만 하늘에 떠올라 있는 그것은 여

전히 존재했고 점점 산 정상을 향해 몸을 낮춰오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순간. 그 검은 용의 모습은 꺼지듯이 사라졌다.

" ........!"

분명 용은 산 정상에 내려선 것이 틀림없었다.

언제부터인지 다시 산새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지만 호기심에 사로잡힌 한

의 귀에는 들려오지 않았다.

*            *            *

" 그대인가..... 날 부른 것이."

묻기는 했지만 훼이는 자신을 부른 것이 눈앞에 있는 백호의 모습을 한 청년

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저 확인을 위해 한 질문일 뿐이었다.

" 오랜만이로군. 백호족을 보는 것도."

훼이의 말이 떨어지자 그때까지 흰 호랑이의 모습으로 물끄러미 훼이를 바라

보던 그는 곧 자신의 몸을 변화시켰다. 엷은  흰색의 빛무리에 싸인채 백호는

청년의 모습으로 화했다.

훼이보다 더 희게 느껴지는 피부와 살짝 귀를 덥는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청

년은 도저히 아까의 백호라고는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유약해 보였다.

" 흑룡족인 훼이님 이시겠지요?"

훼이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 무슨 이유로 날 불렀지?"

" 동족들에게 당신이 하계에 머무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부탁을  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서 이렇게 잠시 방해했습니다."

너무나 깍듯하고 예의바른 청년의 태도에 훼이는 잠시 의문을 떠올렸다. 그가

알고 있는 백호족들은 호전적이거나 다른이와 대면하는  것을 꺼려했다. 하지

만 이 백호족의 청년은 달랐다.

도전적이지도 그렇다고 어둡게 가라앉은 것도 아닌 그저 심유한 눈빛.

" 그렇다면 이유를 들어볼까."

청년의 심유한 눈빛과 훼이의 공허함이 담긴 눈빛이 잠시 소리없이 마주쳤다.

" 제게 당신의 힘을 시험할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담담하게 말을 꺼낸 청년을 보며 훼이는 속으로 웃음지었다.

역시 백호족은 백호족. 청년은 지금 훼이와 싸우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훼이는 자신이 놀랄 정도로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 좋아. 장소는?"

" 이곳에서 바로 시작해도 괜찮겠습니까."

여전히 예의바른 태도로 백호족의 청년이 물었다. 하지만  더 이상 청년의 눈

빛은 심유하지만은 않았다. 엷긴 했지만 청년의 눈에는 투지가 차오르고 있었

다.

" 그럼 먼저 공격하겠습니다."

그렇게 말을 한 청년은 다시 백호의 모습으로  변화했다. 백호의 모습으로 변

화한 청년의 눈은 검은 색이 아니었다.  백호의 두 눈은 타오르는 투기(鬪氣)

때문인지 흰색의 털과 대조되어 선명한 푸른색으로 보였다.

모든 짐승을 호령하는 짐승의 왕답게 우렁찬  소리로 한번 울부짖은 후 백호

는 하늘을 날 듯이 높이 도약해서 훼이에게  달려들었다. 물론 백호족인 청년

이 그냥 발톱을 세우로 공격을 퍼부었을리는 없었다. 날카롭게 튀어나온 발톱

에서 공기를 찢어버릴 듯이 강력한 힘이 느껴졌다.

훼이는 가만히 서 있다가 백호의 몸이 자신을 향해 내리꽂히는 순간 두 손을

들어올려 한 마리의 묵룡을 쏘아보냈다.

콰광.

힘과 힘이 맞부딪히며 폭음이  울려퍼졌다. 그 소리에 놀란  산새들이 일제히

하늘로 날아올랐다. 지금의 상황과 관계없이 하늘을  향해 날개짓하는 새들의

모습은 장관이었다.

훼이가 자신의 공격을 막아내자 잠시 지면에 가볍게 착지했던 백호는 훼이의

모습을 탐색하듯 조용히 바라보다가 어느순간  번개처럼 빠른 몸놀림으로 다

시 훼이에게 달려들었다.

용족을 포함한 봉황, 기린, 현무, 백호의 영수족 가운데 유일하게 동물의 모습

을 진신(眞身)으로 가진 것이 바로 백호족이었다. 다른 영수족들이 그들이 사

용하는 힘의 형태를 동물의 형상으로 내보내는 반면 백호족은 백호의 모습으

로 있을때야 비로소 본연의 힘을 발휘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동물의

모습을 진신으로 가진 만큼 어느 영수족 보다도 호전적이었다. 용족 중에서도

가장 호전적이라고 여겨지는 홍룡족 조차도  백호족에게는 한수 접어줄 정도

로 그들이 가진 투기는 대단했다.

얕봐서는 안되겠군....

훼이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몸놀림으로 자신을 공격하는 백호족의

청년을 바라보며 보다 강한  주문을 준비했다. 그리고 그런  훼이의 눈에서는

어느새 공허함이 사라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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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제 글이 왜 무협적인가. 생각을 해 봤습니다.

아마도 문체상에 드러나는 무협의 냄새와 배경이나 구성 방식 자체가 무협의

느낌을 많이 전해주어서 그런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 딴에는 무협에서 많이

쓰이는 단어는 배제하고 쓴다고 썼는데 그래도 분위기에서 무협의 냄새가 팍

팍 풍기는 것 같습니다. (요즘 저희 아버지는 저한테 무협지 쓰라고 하시더군

요^^) 뭐....무협적이면 어때요...^^

8장까지의 전개가 너무 가라앉은 분위기에다가 지루하게 늘어지고 너무

시시해지는 것 같아서 9장부터는 조금 다르게 써 나가고 있습니다.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구요? (그럼 돌 던지세요....제가 그렇죠...뭐...흑..)

모두들 더위 조심하시구요. 읽어주셔서 감사해용...

번 호 : 1254 / 3334 등록일 : 1999년 07월 31일 00:43

등록자 : 까망포키 이 름 : 포키 조 회 : 167 건

제 목 : [연재] 흑룡의 숲 제 9장 二.

흑룡의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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