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장 미풍(微風)
二.
숨이 턱에 차 오를 정도로 빠르게 산 정상을 향해 달려온 한은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숨을 가다듬었다. 산을 타는데 이력이 난 한이 숨에 차 헐
떡거릴 정도라는 것은 그가 얼마나 급하게 정상까지 달려왔는지를 말해주었
다.
어느정도 숨쉬기가 편해지자 한은 달려오면서 보았던 검고 흰 빛들이 난무하
던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분명 무슨일이 있는 것이다. 한은 가슴을 가득
메운 호기심을 살짝 억누르며 주위에 있던 높게 뻗은 나무위로 올라갔다. 자
신의 짐작이 맞다면 분명 이곳에는 용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때문에 한은
일부러 어느 정도 거리를 둔 곳에 멈춰선 것이다.
익숙한 솜씨로 나무위에 오른 한은 산 꼭대기에 자리한 분지- 사실, 분지라고
말할 정도의 크기는 아니었지만 주위의 다른 곳에 비해 나무가 적고 길게 자
라난 풀들로 가득 메워진 곳이었기에 분지라 부르고 있었다-를 바라보았다.
한이 나무위에 오르기 전부터 조금전까지 보이던 검고 흰 빛들이 사라졌기에
한은 용이 어딘가로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닌지 걱정되었다. 하지만 그는 곧 그
생각이 기우였음을 알았다.
처음 분지위에 서 있던 검은 옷을 걸친 한 남자와 자신과 눈이 마주쳤던 백
호가 대치하고 있는 것을 봤을때만 해도 그는 왜 인간이 백호와 마주서 있는
지에 대한 의문을 품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검고 긴 머리카락을
특이한 복색의 남자의 손에서 뭉쳐진 검은 기운이 어느새 거대한 용의 형상
으로 변한 것을 보며 한은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설마...... 저 남자가 용......?
그에게 대답을 전해줄 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한은 남자가 용이라는 것을 확
신했다.
세상에..... 이럴 수가.... 나는 정말 엄청난 사실을 안 거야.
용들도 사실은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모습을 할 수 있다니!
그가 감탄하고 있는 사이에도 백호와 남자의 싸움은 계속되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른 몸놀림으로 백호가 남자의 손에서 뻗어나온 검은
용을 사라지게 만드는 것을 보며 한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역시..... 전설의 영물이라 다르군.
용과 막상막하의 대결을 펼치다니....
한은 자신에게 이런 경험을 하게 해준 하늘에 감사하며 계속되는 둘의 싸움
을 주시했다.
* * *
역시..... 왠만한 공격주문으로는 안되는군.....
이토록이나 간단하게 훼이의 힘을 막아내는 상대를 만난 것은 실로 오랜만이
었다. 훼이의 짐작으로 백호족의 청년의 나이는 고작해야 300을 넘겼을 것으
로 보였다. 백호족 청년의 나이가 그정도라면 그가 가진 힘은 정말 놀라운 것
이었다. 다른 영수족들의 힘이 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세상을 유지시키기 위해
필요한 오대 원소의 힘을 가진 용족들은 결코 그들이 만만하게 볼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기에 훼이의 놀라움은 더 컷다. 그리고 그 용족중에서도 훼이는
흑룡족이 아니었던가.
푸른 빛을 발하는 눈동자로 자신을 응시하며 공격에 대비하고 있는 백호를
본 순간 훼이는 자신의 마음 속에서 끓어오르는 투지를 느꼈다.
그것은 정말 놀라운 경험이었다. 이미 오래전에 사라진 것으로 여겼던 투지가
그토록이나 맹렬하게 자신의 가슴속에서 끓어 오르고 있다는 사실은 믿기 어
려울 정도로 신선한 감각이었다.
훼이는 그때서야 비로소 진심으로 백호와 대결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지금
까지는 그저 자신에게 도전해온 젊은 백호족의 청년이 어떤 힘을 사용하는지
에는 별다른 관심을 느끼지 않았다. 그저 청년이 도전해 왔기에 받아들인 것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훼이는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이며 탐색하듯 자신을 바라보는 백호를 향해 엷
게 미소지었다. 그리고 두 팔을 들어올리며 주문을 외쳤다.
[ 개문(開門) 람(嵐) 전(電) - 폭풍의 힘을 끌어내어 공격하는 주문 - ]
언젠가 본 적이 있었던 광경이었다.
언제 생겨났는지 검은 먹구름이 하늘을 메웠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먹구름이
몰려든 것은 훼이와 백호가 대치하고 있는 구릉지대 바로 위의 하늘일 뿐 다
른 곳은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푸른색이었다. 이제 서서히 노을지는 태양의
빛을 받아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지만.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처럼 검은 먹구름 사이에서 일순 주위를 밝게 비
추며 천둥이 쳤다. 하지만 여전히 비는 내리지 않았다.
백호는 이번 훼이의 공격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것임을 느꼈는지 온몸에서 흰
기운을 뿜어내며 훼이의 공격에 대비했다.
훼이는 백호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강한 기운을 느끼며 한손을 들어올렸다. 그
러자 먹구름 사이에서 묵룡 한 마리가 고개를 내밀었다. 지금까지 훼이가 쓴
공격주문들은 대부분 힘이 뭉쳐진 용의 형상. 즉, 묵룡을 통한 것이었지만 이
번은 조금 달랐다. 그다지 커다란 크기의 묵룡은 아니었지만 지금 훼이가 불
러들인 묵룡은 투명하게 속이 비치는 것이 아닌 암흑처럼 어두운 빛을 띄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훼이의 손에서는 묵룡의 빛깔과 같은 짙은 빛깔
의 덩어리가 뭉쳐지고 있었다.
[ 개(開)! ]
짧은 외침과 함께 묵룡은 섬전 보다도 빠르게 땅위에 있는 백호를 향해 쏘아
졌다. 그리고 묵룡이 움직이는 것과 동시에 백호역시 온몸에 흰 빛을 두른채
몸을 띄워올렸다.
* * *
백호가 비틀거리며 바닥에 내려선 후 어느순간 인간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을
보고 한은 또 다시 놀라움 때문에 거세게 뛰고 있는 가슴을 부여 잡았다. 그
런다고 해서 쿵쾅거리는 소리가 잦아들지는 않겠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
면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조금 전에 검은 먹구름 사이에서 빠져나온 검은 용과 정면으로 맞부딪힌 백
호는 처음에는 우세한 힘을 자랑하며 검은 용이 땅으로 내려오는 것을 방해
했다. 하지만 그 용을 조정하는 것이 분명한 검은 머리카락의 남자가 뭐라고
외치며 손을 휘두르자 손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덩어리에 의해 백호는 순식
간에 추락하고 말았다.
내심 백호가 이기기를 바라고 있던 한으로서는 무척이나 안타까웠다. 이제 백
호가 졌으니 분명 남자가 백호를 죽일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을 하며. 하지만
그것은 그의 괜한 걱정이었다. 백호는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데다 용이 분명한
검은 옷의 남자는 손을 내밀어 쓰러져 있던 백호 - 이제는 청년의 모습이 된
- 를 일으켜세운 것이다.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노릇이지.....?
무척이나 궁금했지만 한이 있는 곳에서는 둘이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움직임만으로 모든 것을 짐작해야 할 뿐.
무슨 이야기라도 나누고 있는지 두 남자는 계속해서 서로를 마주보며 서 있
었다.
가까운 곳으로 내려가서 엿들어 볼까.....
하지만 한은 곧 고개를 내저었다.
자신이 나무에서 내려가는 사이에 두 남자의 모습은 사라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막연하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백호였던 청년은 검은 옷을 입은 남자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다시 백호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빠르게 숲 속으
로 몸을 감춰버렸다.
검은 옷을 걸친 남자는 아직도 하늘에 엷게 깔려있는 검은 구름을 한번 올려
다 보았다. 그러자 무슨 조화인지 하늘에 걸려있던 먹구름들은 한순간에 씻은
듯이 사라져버렸다.
먹구름이 사라진 하늘은 붉게 타오르는 태양의 빛을 받아 금방이라도 불을
뿜을 듯이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검은 옷의 남자는 가볍게 손을 움직였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남자가
손을 휘두른 자리가 뒤틀리며 구멍같은 것이 생겨났다.
한은 지금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꿈이면 어떤가. 지금 자신이 평생 다시는 보지 못할 진기한 경험을 하고 있다
는 사실은 분명했으니까.
막 구멍 안으로 들어서려던 남자는 잠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시선은 정
확하게 나무 위에 있는 한에게 향해있었다. 한은 화살맞은 토끼처럼 깜짝놀라
나무를 붙잡고 있던 손을 놓을 뻔했다.
어느새 남자는 구멍안으로 들어서 있었다. 마치 조금전에 자신을 향한 시선은
거짓말 같았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니 남자의 얼굴에 언뜻 미소가 비친 것도
같았다.
잠시 생각에 빠져있던 사이 분지에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제 서녁
하늘로 저문 붉은 햇살대신 주위를 가득 채운 것은 어슴푸레한 어둠과 시원
한 바람이었다.
한은 조심스럽게 나뭇가지와 기둥을 잡고 바닥으로 내려섰다.
나무를 타고 내려오는 짧은 시간동안 산은 완연한 어둠에 감싸여 고요히 잠
들고 있었다.
산에서 밤을 맞이한 것이 얼마만인가. 한낯의 열기에서 빠져나와 부드러운 밤
바람을 쐬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었다.
" 이제 돌아가야겠군..... 오늘은 확실히 배고픈 밤이 되겠구나..."
한은 낮게 중얼거리며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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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이번 9장의 내용은 본 내용과 크게 관련이 있는 건 아니구요. 잠시 쉬어
가자는 차원에서 가볍게 써 봤습니다.
시간적 배경은 훼이가 아버지에게서 생명력을 넘겨 받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입니다. 이때부터 훼이는 오랜시간을 하계에서 생활하게 됩니다.
후훗....그리고 이번 9장은요. 제가 전투장면을 너무 못쓰기 때문에 연습 차원
에서 한번 써본 것이랍니다. 여전히 구리죠? ^^
요즘 저는 슬럼프 인가봐요. 글을 쓰는데 전혀 흥이 나질 않아요...흑... 마음도
무겁고..... 그치만 계속 써야죠...
점점 이상해 지는 제 글을 읽어주신 분들 감사해요 ^-^
번 호 : 1278 / 3334 등록일 : 1999년 08월 01일 00:53
등록자 : 까망포키 이 름 : 포키 조 회 : 175 건
제 목 : [연재] 흑룡의 숲 제 10장 一.
흑룡의 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