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룡의 숲-48화 (48/130)

제 10장 범람(氾濫)

어느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초유의 질서 시간은

어김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시간의 파도에 휩쓸린자에게

작은 자유조차 허용하지 않으며.

되돌릴 수는 없지만

되돌아 볼 수는 있는 것.

그것은 시간이 베푸는 유일한 자비.

一.

실로 오랜만에 홍룡왕 란의 얼굴에는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공간 연결주문인 천개의 주문을  써서 허공에 띄워놓은  붉은 빛을 간직한

평평한 거울 안에는 란과 마찬가지로 타오를 듯이  붉은 색의 머리카락을 늘

어뜨린 한 여인의 모습이 비춰져있었다.

여인은 특이한 외모의 소유자 였다. 그리 흔하지 않은 피처럼  붉은 머리카락

이 그랬고 기이할 정도로 날카로운 빛을 내뿜는 금빛의 눈동자가  그랬다. 피

부색은 너무 희지도 그렇다고 적당히 그을린 갈색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은 특출나게 아름답지도  청순하지도 않았지만 보통의  여인들이 가지는

아름다움과는 다른 특이한 매력이 있었다.

- 그렇게만 하면 되는 건가요?

묘하게 다른 이의 시선을 끄는 독특한 외모의  소유자 치고는 무척이나 평범

한 목소리로 여인이 말했다.

" 물론입니다. 영수족의 일원인 봉황족의 도움을 얻는 입장이니 그것만으로

도 감사를 금치 못할 따름입니다."

란의 목소리에서는 정중함이 느껴졌지만 그것이 그의 본의 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홍룡족이 가진 불같이 급한 성격 외에도  800년에 가까운 세

월을 지내오면서 쌓아온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에서 연유한 지식

이건간에 란은 세월이 안겨준 연륜을 가진 자인 것이다.

미소짓는 란의 얼굴을 금빛 눈동자로 가만히 주시하던  여인은 아주 잠깐 동

안이지만 의문을 떠올렸다. 하지만 곧  그것을 지우고 란에게 작별의  인사를

건넸다.

- 그럼 그때 뵙도록 하지요.

" 오늘은 정말 감사했습니다."

란은 얼굴 전체에 부드러운 미소를 떠올린채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

넸다.

[ 해제(解制) ]

그리고 나서 란은 허공에 떠올랐던 이공간 연결 주문을 해제  시켰다. 그러자

거울은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잠시 거울이 떠올라 있던 자리를 응시하던 란은 곧 책상에 가득 쌓여있는 문

서들로 시선을 돌렸다. 몇 개의 문서들을 읽고 인장을 찍는  절차를 반복하고

있을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전하. 하계의  분화에 관계된 일로  조사를 나갔던 수행원이  돌아왔습니

다."

" 들여보내라."

집무실의 문이 열리며 중간 길이의 파오를 걸친 청년이 들어섰다.

" 인사 드립니다. 전하."

란은 고개를 숙인 청년을 말없이 응시하며 문서에 올려놓았던 손을 떼었다.

일족의 청년을 대하는 란의 얼굴은 방금전까지 봉황족의 여인에게 보이던 미

소가 담긴 얼굴이 아니었다. 어느새 그의 얼굴은 홍룡일족의 왕이  가져야 할

위엄이 담긴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            *            *

[ 역궁(逆窮) 개문(開門) ]

심해와도 같이 깊은 푸른색의 눈동자를 가진 소년. 유안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정신을 집중했다. 지금 자신이 외친 주문은 공간을 여는  주문으로 아무리 왕

의 피가 흐르는 자신이라지만 성공할 확률이 극히 적은  것이었다.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유안은 조금이라도 힘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온힘을 다해

주문을 완성해내고 있었다.

" 성공이다!"

희미하고 작긴 했지만 그것은 분명히 공간이 열릴 때 생기는 일그러짐이었다.

유안은 기쁜 마음에 당장이라도 만세를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주문은 아

직 완성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드나들 수 있을 정도의 크기가 되기에는 아

직 많이 모자랐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을 완벽히 공간을 열기 위해 소비한

끝에 유안은 겨우 공간을 여는 주문을 완성시킬 수 있었다. 자신의 눈앞에 모

습을 드러낸 다른 곳으로 통하는 문을  바라보며 유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

었다.

" 유안."

막 공간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서려던 유안은  갑작스레 들려온 아버지 라이

엔의 음성에 흠칫하고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그 바람에 간신히 공을 들여 연

공간은 금새 닫혀 버리고 말았다.  아직 성인식을 치르지 않은  유안으로서는

공간을 여는 것 자체가 무척이나  많은 마력을 소모시키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흑룡왕의 후계자인 유안이라고 해도 채  100살도 넘기지 않은 나이에

공간을 여는 주문을 성공시켰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라이엔은 아들의 능

력에 감탄하면서도 그런 기색을 내비치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 지금 어디에 가려던 것이냐."

라이엔의 질문에 잠시 우물거리던 유안은 곧 낮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 백부님이 계시는 곳으로 가려고 했어요......."

" 갑자기 그곳에는 왜...?"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을 꺼냈던 유안은 아버지의 목소리에 별다른 감정이 배

어있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안심했다. 라이엔은 무척이나 자상한 아버지 였지

만 화를 내게 되면 누구보다 엄하고 무섭다는 사실을 유안은 잘 알고 있었다.

" 백부님이 명계에서 온 자와 싸웠다는 소식을  듣고 궁금한 게 많아서 직

접 여쭤보려구요..... 그리고 백부님께 힘을  이끌어 내는 방법도 배우고  싶구

요."

라이엔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유안의 존재는 훼이의 마음을 되돌릴 수 있을 지 모른다. 라이엔이 흑

룡왕의 자리에 오른 이후로-아니, 어쩌면 그 이전부터 였는지도 모른다. 그는

훼이가 다시 흑룡궁으로 돌아와 주길 바라고 있었다.

다른이들에게는 경외의 대상이 되는 훼이인지  몰라도 라이엔에게 있어서 훼

이는 그저 피를 나눈 형일 뿐이었다. 친 동생임에도 불구하고 같은 시간을 공

유했다고 말할 수 있는 나날들이 극히 적다는  사실은 라이엔의 마음 한구석

에 언제나 무겁게 자리하고 있었다.

훼이가 겪어온 지난 세월들이 가볍지 않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과거는 과거

일 뿐이라고 라이엔은 훼이의 앞에서 말하고 싶었다. 그것은 언제나  그의 바

램으로 남아있긴 했지만.

그리고 요즘의 훼이는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유에린이라는  청룡족의 소녀

를 받아들인 것도, 라이엔의 부탁이기는 했지만 천계의 일들을 해결하는데 도

움을 준 것도 그러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흑룡궁으로 돌아오라는 요구만은 받

아들이지 않았지만.

" 그래.... 좋다. 가보거라."

라이엔의 허락이 떨어지자 유안은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떠올리며 기뻐했다.

" 단, 백부님을 귀찮게 해서는 안된다."

" 네. 아버지."

라이엔은 환한 얼굴로 방을 나서는 유안의 모습을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떠

올렸다.

*            *            *            *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난 것일까.

훼이는 수십번의 계절이 교차하는 동안  계속 하계에 머물러 있었다.  시간의

경과는 중요하지 않았기에 그저 눈 앞에 보이는  것들만을 마음에 담으며 그

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훼이는 주로 하계에 있는 산들을 돌아다니며 그곳에서 한 계절동안을 머물렀

다. 벌써 셀 수 없을 만큼의 많은 산들을 돌아다녔지만 하계에는 아직도 많은

산들이 남아 있었다.

눈(雪).....

주위를 가득 채운 것은 눈부실 정도로 깨끗한 빛을 간직한 눈이었다.

겨울을 다스리는 흑룡족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본래의 색을

덮어버리며 쌓인 눈때문인지 모르지만 겨울은  보통때보다 더 편안한 마음을

가지게 해주는 계절이다.

훼이는 굵은 눈송이가 떨어져 내리는 어느 이름모를 산 정상에 선 채로 세상

의 모든 것들이 새하얀 눈으로 감싸여 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이것이 자유인가.....

훼이는 시야를 가득 채운 순백의 눈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제 모든 것이 떠나고 홀로 남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은 과연 자유인가. 아니

면 지나간 시간들을 되새김질  해야하는 기억의 잔재  속에서 허우적 거리는

것 뿐인가.

이제는 어렴풋이 희미한 윤곽만이 떠오르는 화연과 비영. 그리고 성휘.

그리고 애닯프게 남아있는 비의 모습도. 자신의 생명력을 넘겨주고 떠난 아버

지의 모습도 그저 기억이 되어있을 뿐이었다.

굳어진 조각상이라도 된 것처럼 훼이는 몇시진 동안  눈을 맞으며 그렇게 서

있었다. 그러던 훼이의 눈에 붉은 빛깔 하나가 들어왔다.

모든 것이 흰색의 눈으로 뒤덮여 있는 가운데 유일하게 선명한 붉은 빛을 발

하는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듯이 훼이의 시선을 잡아 끌었다.

훼이는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리듯이 그 붉은 빛을 향해 다가갔다.

동백인가......

그것은 눈을 맞으며 피어오르는 겨울의 상징인 붉은  동백꽃이었다. 조금전까

지만해도 눈에 띄지 않던 그것이 어째서 선명한  빛을 발하며 훼이의 시야를

가득 채웠는지는 모르지만 훼이는 선연한 피빛과도 같은 꽃잎에 손을 가져갔

다.

그 순백의 설원에 피어난 붉은 동백의 꽃잎을 보고 한 여인의 모습을 떠올린

것은 훼이 자신조차 짐작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지 못한지도 벌써 수백년이 흘렀다. 언제나 불쑥하고 얼굴을

내밀던 그녀는 어느순간 부터인가 훼이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어째서 그녀의 모습이 이런 먼 곳에서, 수백년의 시간이 흐른 후에 떠

오른 것일까.

훼이는 조용히 시선을 옮겨 동백나무 가지에  매달린 봉오리 중에서 홀로 꽃

을 피운 붉은빛의 꽃을 매만졌다. 그리고 그럴리는  없었지만 그 꽃에서는 희

미한 온기가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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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무언가가 시작되려는 10장 입니다...아...어느덧 10장이...

음..여전히 제 소설의 시간관념은 이상한 모양입니다. 이번 10장 부터는 좀 제

대로 깔끔하게 전개를  해 볼까요...^^ (그치만  지금까지 그래왔는데...에이 멀

라) 으음...여하튼 좀 정돈된  느낌의 전개를 해야겠습니다.  8장까지에서 제가

보여드리고 싶었던 감정의 조각들에 대한  이야기는 대부분 끝났거든요. 이제

부터는 앞으로의 이야기들을 위주로 전개를 하겠습니다. 저도 이젠 시간 섞이

는 거 너무 싫어요. ^^ (저도 머리 아팠는데 읽는 분들은 얼마나 머리  아프셨

을까요... 죄송합니다.)

이번 10장의 一편은 또 다른 이야기가 시작되기 위한 서막 정도로 봐주세요.

별다른 이야기는 들어가지 않았지만 암튼  10장부터는 뭔가 정돈된 느낌으로

써보겠습니다. (우...머리 아퍼....--)

감사해용....^-^ 즐거운 하루 되세용.

번 호 : 1296 / 3334 등록일 : 1999년 08월 02일 00:05

등록자 : 까망포키 이 름 : 포키 조 회 : 166 건

제 목 : [연재] 흑룡의 숲 제 10장 二.

흑룡의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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