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장 범람(氾濫)
三.
........꿈?
유안과 함께했던 소란스러운 하루를 보내고 나서 언제나 처럼 조용한 휴식을
맞이한 훼이는 머릿속을 스쳐지나간 영상을 떠올리며 속으로 되뇌었다. 아직
자신에게 다가올 시간의 강에 휘둘리기 이전. 아니, 그 속에 던져졌음에도 깨
닫지 못했던 그 시절에 항상 자신의 곁에 머물던 그녀. 이미 오래전에 삶을
마감한 그녀의 모습이 순간적으로 떠올라 훼이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녀에
게는 단 한번도 변변히 감사의 인사를 한 적이 없었기에.
하지만 그동안 기억의 깊은 곳에 잠겨있던 그녀의 모습이 왜 갑자기 떠올랐
을까. 그것도 꿈이라는 형태로.....
아직 해도 떠오르지 않은 희미한 어둠이 깔린 숲은 여느때와는 다르게 무척
이나 적막했다. 한낮에는 푸르게 잠겨있던 숲의 나무들도 새벽이 되자 회색의
그림자가 되어 주위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었다.
" 분명 그녀는........"
훼이는 낮게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진 말은 너무 작아서 들리지
않았다.
이제 이곳에서 떠나야 하나......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훼이는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이 숲에서 지낸지도 벌써
300여년. 반생을 지내온 북별궁에서의 시간들이 슬픈 추억으로 점철되었다면
이 숲에서의 시간은 언제까지 이어질 지 모르는 자신의 삶을 마감할 곳이라
고 훼이는 생각하고 있었다.
다 부질없는 생각이지..... 아무리 오랜 시간을 살아왔다지만 아직도 세상은 알
기 힘든 곳이니까.
벌써 몇 달째 함께 지내온 유에린 조차도 넓은 숲속에 무엇이 있는지는 다
알지 못했다. 아마도 완벽하게 숲을 꿰뚫고 있는 것은 훼이 뿐일 것이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훼이가 밤에 머무는 곳은 어느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않는
외진 곳이었다.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과거를 되새기는 일도 잦았지만
훼이는 자신 이외에는 아무도 없는 시간을 좋아했다. 그것은 300여년을 홀로
지내왔기에 굳어진 습관 인지도 몰랐지만 하루중의 반은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한참동안 아무 생각없이 옅은 어둠에 잠긴 숲을 응시하고 있던 훼이는 자리
에서 몸을 일으켰다. 눈을 붙인 것은 두시진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몸은 더
이상의 잠을 필요로 하지 않았기에 훼이는 이제는 눈을 감고서도 익숙하게
걸음을 옮길 수 있는 숲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얇은 가죽으로 만들어진 신발
을 통해 전해져 오는 땅의 감촉은 놀랄만큼 포근했다. 물론 실제로 손을 대어
본다해도 온기가 느껴질리는 없겠지만 적어도 지금의 느낌은 그랬다.
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새 훼이는 유에린과 유안이 머물고 있는 방 다섯 개
의 작은 모옥(茅屋) 앞에 도착해 있었다. 모옥이라고는 하지만 보잘 것 없이
작고 초라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천계에서 나는 나무를 비롯한 재료들로 지
었기에 고풍스러운 느낌을 주기는 했지만 모옥은 지어진 지 아직 10년 도 채
되지 않은 곳이었다. 모옥의 구조는 천계의 건물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하계의
집들과 비슷했다. 넓게 이어진 정원을 통과하고 나서도 커다란 문과 길게 이
어진 복도를 지나쳐야 하는 천계의 궁과 같은 구조가 아니라 오래전 화연이
머물고 있었던 집과 비슷했다. 어쩌면 집을 지으면서 훼이는 무심결에 그녀를
떠올렸을 지도 모른다.
오랜 시간을 숲에서 보내온 훼이였지만 특별히 몸을 눕힐 공간을 마련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옥 역시 가끔가다 숲을 찾아오는 라이엔을 위해 지은
것이었다.
모옥 앞에 멈춰선 훼이는 그 안에서 깊이 잠들어 있을 라이엔을 빼어 박은
유안과 별달리 많은 말을 하지 않는 유에린을 떠올렸다. 짧은 시간동안 이토
록 자신의 삶에 깊이 파고들어온 이는 숲에서 살아온 시간들동안 단 한명도
없었기에 지금 자신의 공간에서 함께 머물고 있는 둘의 존재는 무척이나 생
경하긴했지만 거북하지는 않았다.
스륵.
그때 나무와 나무가 맞부딪히는 소리가 울리더니 문을 열고 유안이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 피곤할텐데 왜 벌써 일어났지?"
" 어...... 백부님이세요....?"
아직 잠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닌 듯 유안의 목소리에는 몽롱한 기운이
배어 있었다.
" 아직 해도 떠오르지 않았으니 좀더 자두거라."
몇차례 눈을 비비더니 유안은 문을 활짝 열고 바닥으로 내려섰다.
" 아니에요. 이제 잠도 다 달아났으니 백부님과 이야기를 나눌래요."
안면을 익힌지 얼마 되지도 않은 유안은 마치 오랜 시간동안 훼이를 알아온
것처럼 친근하게 말을 건넸다. 그런 유안의 어딘가에서 오래전에 안식의 땅으
로 떠난 비의 모습이 연상되었기에 훼이 역시 온화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
다.
" 그래. 무슨 이야기를 나눌까?"
" 어떤 것이라도 좋아요. 백부님이 하시고 싶은 이야기를 들려 주세요."
훼이는 모옥의 앞에 울타리처럼 둥글게 둘러져 있는 돌 위에 유안과 나란히
않으며 말을 꺼냈다.
* * *
언제나 처럼 많은 문서들이 눈 앞에 놓여있었지만 라이엔은 그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 ..........하셨습니다. 흑룡왕 전하."
" 음....미안하네. 방금 뭐라고 했지?"
자신에게 막 한 장의 문서를 내밀며 말을 건넨 보좌관이 방금 무엇이라고 했
는지 놓쳐버린 라이엔은 자신을 질책하며 되물었다.
" 점심을 함께 하시고 싶다며 백룡왕 전하께서 찾아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곧 시간이니 일어 서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 아..... 그랬나...."
분명 어제 전해들은 사실이건만 보좌관의 입을 통해 나오는 그 말은 무척이
나 생소했다. 라이엔은 가볍게 고개를 털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 그러면 오늘은 이만 하는 게 좋겠군. 뒷정리를 부탁하네."
" 네. 전하."
아직까지 조금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려 애쓰며 라이엔은 집무실의 문
에 손을 가져갔다.
" 오랜만에 뵙는군요. 미하님."
간단한 치파오 차림을 한 챠렌은 밝은 얼굴로 미하에게 인사를 건넸다.
" 네. 오랜만이군요..."
" 미하님에게서는 언제봐도 기품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파이론 역시 목례로 인사를 하며 말을 건넸다.
" 별말씀을...."
미하는 언제나 처럼 온몸을 덮는 연한 복숭아 색의 궁장을 걸치고 있었다. 피
부가 하얗기로 소문난 흑룡족 만큼이나 새하얀 피부와 서늘한 푸른눈을 가진
미하는 이지적이면서도 가냘프게 느껴졌다. 당당하고 날카로운 느낌을 가진
챠렌과는 무척 대조적이었기에 파이론은 더욱 세심하게 미하를 바라보았다.
" 아니, 벌써 오셨습니까?"
미하와 백룡왕 부부가 인사를 나누고 얼마 지나지 않아 라이엔이 들어섰다.
집무실을 나서자 마자 급하게 달려온 시비 한명이 백룡왕 내외가 도착해서
사실에 있다는 것을 알렸기에 라이엔 역시 빠른 걸음으로 온 것이었다.
" 오랜만에 주위 풍경 감상도 할겸 천천히 걸어서 왔는데 예상보다 빨리 도
착했습니다."
" 그러셨군요."
라이엔은 백룡왕비 챠렌에게 인사를 건넨 후 미하의 옆에 앉았다.
" 그런데 어린 후계자의 모습이 보이질 않는군요."
" 유안은 지금 형님께 가 있습니다. 힘을 쓰는 법을 배운다며 이틀전에 숲
으로 갔지요."
라이엔의 말을 들은 파이론과 챠렌의 얼굴에는 잠시 놀랍다는 표정이 떠올랐
다.
" 훼이님이 직접..... 말입니까?"
" 네. 허락을 해주셨습니다."
" 그러셨군요."
파이론은 무언가 생각하는 듯이 시선을 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시비들이 음식을 날라오기 시작하자 대화는 잠시 끊겼다. 그리고 수
십가지는 되어보이는 음식을 먹으며 그들은 가벼운 화제의 이야기를 나누었
다. 식사가 끝난후 천계의 용족들이 즐겨마시는 천화주를 따라 나누어 마시고
있을 때 라이엔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틀간 깊이 생각을 해 보았지만
혼자서는 아무런 결론도 내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 혹시 천제가 보낸 사자가 오지 않았습니까?"
" 천제의 사자.... 말입니까?"
되묻는 것을 보니 예상대로 천제가 사사를 보낸 것은 자신 뿐인 듯 해서 라
이엔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
"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가라앉은 미하의 시선을 받으며 챠렌이 물었다. 천제에게서 온 서신을 미하도
읽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을 뿐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 그건 무리한 요구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언제나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 미하로서는 무척이나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깊이 생각한 뒤가 아니면 말을 꺼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라
이엔 이었기에 그는 다음에 이어질 미하의 말을 기다렸다.
" 지금의 천제는 자신이 6계의 정점에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수백년
만에 서신을 보내와서는 한다는 말이..... 수명부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자는
존재해서는 안된다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들은 파이론과 챠렌의 얼굴에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 용족에 대한 불만을 표시한 것이겠지요. 그것도 무척이나 돌려서."
신중하기로 소문난 미하로서는 드물게도 감정이 담긴 어조였다.
" 천제 답다고 말해야 할까요...."
챠렌의 입가에는 어느새 조소가 떠올라 있었다.
" 이건.... 명백한 도전이군요."
모두의 얼굴을 둘러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떠올리는 챠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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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T 눈물의 50회입니다.☆
신이시여!!! 제가 50편을 썼단 말입니까?
음...10장 부터의 전개는 지금까지 계속 되어온 과거 회상 위주의 전개에서 벗
어나고자 사건과 현실 위주의 전개로 쓰려 하고 있습니다. 음..갑자기 바꾸려
고 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내용이 지리하게 이어지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그것은 제가 너무나 어설프기 때문이겠지요...^^ (저도 인정합니다)
지금까지 이렇게 꾸준하고 성실하게 글을 쓴 적은 한번도 없었어요...
음...동아리 행사가 끝나고 나서 흑룡의 숲 모음집을 올릴 생각입니다. 이제 전
체 용량이 300kbyte 넘었거든요. 잡담빼면 좀 줄겠지만요...^^ 모음집에서는 문
장과 구성을 조금 고쳐볼 생각입니다. (과연 할 수 있을까 --) 리메이크는 제
성격상 무리구요. 암튼 심혈을 기울여 고쳐봐야죠.
50회가 되기까지 지켜봐 주신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소녀의 절을 받으시옵소서. ^-^
번 호 : 1343 / 3334 등록일 : 1999년 08월 04일 00:13
등록자 : 까망포키 이 름 : 포키 조 회 : 171 건
제 목 : [연재] 흑룡의 숲 제 10장 四.
흑룡의 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