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장 범람(氾濫)
四.
홍룡왕의 영지에서도 몇마리 밖에 보이지 않는 불꽃의 새 주작은 무척이나
드물게도 그 모습을 천계 최북단에 위치한 흑룡의 숲에 나타냈다. 살아 움직
이는 불꽃과도 같이 선명한 붉은 깃을 펄럭이며 날개짓하는 그 모습은 바라
보는 것 만으로도 탄성을 자아내게 할 만큼 아름다웠다.
그저 그 붉은 아름다움에 취한 유에린은 불꽃의 새 주작이 왜 자신과 상극이
되는 성질로 가득찬 흑룡족의 영지내에 모습을 드러냈는지 생각할 여력이 없
었다.
" 유에린! 빨리 이리로 와봐요."
하늘이라는 푸른색 천에 붉은 실로 수를 놓듯이 움직이는 다섯 마리나 되는
주작의 움직임에 흠뻑 빠져있던 유에린을 유안의 목소리가 현실로 되돌렸다.
유안의 아버지인 현 흑룡왕 라이엔의 요청으로 흑룡궁으로 잠시 떠나면서 훼
이는 유에린에게 자신이 없는 동안 유안을 돌보아 줄 것을 부탁했다.
" 뭔가 발견했나요. 유안?"
유에린은 빠른 걸음으로 수풀을 헤치고 유안이 서 있는 곳으로 향했다. 유안
은 소년다운 호기심이 가득 배인 얼굴로 덤불숲에 가리워진 무언가를 뚫어지
게 응시하고 있었다.
" 쉿! 큰 소리를 내면 안돼요."
그렇게 말하며 유안은 가볍게 손짓했다. 그리고 유에린이 가까이 다가오자 손
가락으로 무언가를 가리켰다.
" 새끼 새에요. 유에린."
유에린은 자신도 모르게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그것은 한눈에 보기에도 부모
새가 누구인지를 알게 해주는 붉은 깃으로 온몸을 감싸고 있는 손바닥 만한
작은 새였다. 온몸에 덮여있는 것은 아직 솜털에 불과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
아타오르는 불꽃의 빛깔을 내뿜는 깃털로 변화할 것이었다. 조금전까지만 해
도 유에린의 시선을 빼앗고 있던 커다란 주작과 마찬가지로.
" 무슨 새인지 알고 있나요. 유안?"
유안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아직 눈도 뜨지 못한채 작은 움직임으로
보이고 있는 새끼새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 붉은 깃을 가진걸 보니 주작인 것 같은데요?"
" 맞아요. 주작이에요. 잘알고 있네요."
" 정말 이 새가 주작이에요? 본건 처음인데....."
유에린은 순수한 유안의 행동을 보며 이 나이어린 흑룡족의 왕자님은 무척이
나 대하기 편하다는 생각을 했다. 가까이에서 왕족들을 접해볼 기회를 가진
것은 훼이 밑에서 힘의 사용법을 배우기 시작한 이후였기 때문에 그녀가 가
까이에서 보거나 이야기를 나누어본 왕족이라고는 훼이를 제외하고 챠렌이라
는 백룡왕비와 유안의 아버지인 흑룡왕 라이엔 뿐이었다. 왕족들은 자신과는
무척이나 다를 것이라고 은연중에 여겨왔던 유에린은 요즘들어 그 생각이 틀
렸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왕족이지만 숲에서 조용히 살아가는 훼이와 평민
인 자신에게도 경어를 사용하며 스스럼없이 대해준 백룡왕비 챠렌. 그리고 지
금 이 소년 유안. 다음 세대의 흑룡족을 이끌어 갈 흑룡왕 후계자라는 어마어
마한 신분을 가진 이 소년도 지금은 그저 세상에 갓 태어난 아기새와 같이
많은 것을 배워야 할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 주작은 어미새와 마찬가지로 커다란 몸을 가지기까지 2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하죠. 그리고 그 2년이 지나면 지금 하늘에 떠있는 저 주작들과 마찬가지
로 불꽃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요."
" 와. 많이 알고 있네요."
커다란 목소리로 감탄성을 내뱉는 유안을 보며 유에린은 엷게 미소지었다.
어린시절의 날 보며 오라버니도 이런 생각을 했을까......
밝게 웃는 유안을 보며 유에린은 문득 오라버니와 함께 했던 어린 시절을 떠
올렸다. 자신은 언제나 묻고 오라버니는 언제나 웃으며 답을 해 주곤 했던 그
때를.
" 저도 제 오라버니에게 어린시절에 들었던 말이에요."
유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 그런데 유에린. 새끼 주작을 한 마리만 데려다 기르면 안될까요?"
갑작스런 유안의 말에 유에린은 뭐라고 얘기해야 할지 난감해졌다. 숲속에 있
는 무언가를 가져오는 것은 유안의 자유이지만 과연 훼이가 그것을 마음에
들어 할런지는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에. 한참을 생각하고 나서 유에린은 유안
에게 말을 건넸다.
" 그건 백부님께 여쭤보고 결정하도록 하세요. 이곳은 그분의 땅이니까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도 유안은 작은 주작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 * *
전체적으로 날카로운 느낌을 전해주는 뾰족한 턱을 가진 남자는 책상위에 펼
쳐져 있던 길다란 두루마리를 접으며 입가에 보일 듯 말듯한 희미한 미소를
떠올렸다.
" 그래. 흑룡왕의 반응은 어떻던가...."
남자의 눈에는 흥미롭다는 감정이 여실히 떠올라 있었지만 그것을 얼굴 전체
에 나타내지 않는 신중함도 가지고 있었다.
남자의 앞에서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넨 것은 얼마전 천제의 사자
로 흑룡궁에 서신을 가져갔던 천군 소속의 궁내 부대장이라는 지위를 가진
자였다.
" 별다른 동요는 하지 않았지만 충분히 곤란해 하는 표정이었습니다."
" 과연.....그랬겠지......."
중얼거리듯이 말하며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완전히 다 말린 두루마리의 겉은 오래 두어도 변하지 않도록 특수한 유
약을 칠해놓은 상태였기에 반들거리며 윤이났다. 그리고 그 겉에는 수명부라
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 성질급한 누군가라면 당장에 천상계를 공격했을지도 모르지만 흑룡왕이
라면 지금쯤 내가 그 서신을 보낸 의도를 생각하느라 골머리를 썩히고 있겠
지."
지금의 그 말은 자신의 눈 앞에 있는 부대장을 향해 한 말은 아니었다. 누군
가를 향해 말했다기 보다 자신에게 들려준다고 하는 편이 더 옳았다.
" 혹시라도 용족들이 과격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을까요...."
한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고 서있던 부대장은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도
그럴것이 용족들이 가진 힘은 전혀 만만히 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천제는 얼굴에 싸늘해 보이는 미소를 떠올렸다.
" 그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던간에 내가 보낸 서신의 내용이 사실이라는 것
에는 변함이 없지. 안그런가? 분명 훼이라는 흑룡족은 여기 있는 수명부에도
기록되지 않은 삶을 이어가고 있으니까."
그렇게 말을 하고난 천제는 책상위에 놓여있던 빈 종이 하나를 펼쳐놓고 붓
을 들어 무언가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써 내려가던 천제는
붓을 내려놓고는 마지막으로 천제를 상징하는 인장을 찍었다. 그리고 나서 아
직 채 마르지도 않은 서신을 부대장에게 내밀었다.
" 이 서신을 명계로 보내주겠나?"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던 부대장으로서도 이번만큼은 놀람을 감출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침 삼키는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들려오는 것 같았다.
" .........명계에 말입니까.....?"
천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 오늘이나 내일 중으로 출발하도록 하게."
그렇게 말하고 나서 천제는 고개를 들어 부대장을 직시했다.
" 그럼 이만 나가보게. 아, 그리고 명계가 다른 곳에 비해 불가침의 영역으
로 여겨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천제인 나를 거스를 행동을 하지는 않을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도록 하게."
" 네. 상제 폐하...."
부대장이 할 수 있는 말은 그것 뿐이었다.
부대장이 방에서 빠져나가고 나서 천제는 얼굴에 비웃음을 떠올렸다.
" 천상계도 썩었군. 명색이 천군의 부대장이라는 자가 명계에 가는 것을 두
려워 하다니. 차라리 검선 중에서 하나를 뽑아서 보낼 걸 그랬나."
적어도 천상계의 정예라고 할 수 있는 검선들은 소수이기는 했지만 자신의
신변에 닥칠 위험 따위는 우습게 여기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들에게 패배라
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천제는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머리속에서 흘러넘치는 생각을 정리했다.
" 이번일을 성공시키고 나면 아무도 천상계를 우습게 보지는 못하겠지......"
어느 누구도 들어줄 리 없는 말을 천제는 계속해서 내뱉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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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회 축하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 천상계의 천제 >
오늘 잠깐 언급하고 넘어갈 것은 천상계를 다스리는 천제. 즉, 옥황상제입니
다. 보통 천제(天帝), 혹은 상제(上帝)라고도 불리는 천상계의 최고 지위를 가
진 그는 6계에 살아가는 모든 생명들의 수명을 관장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가장 중요하다고도 할 수 있는 수명에 관계된 책임을 가지고 있는 만
큼 천제의 지위는 높다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처음에도 언급했듯이 상제가
가진 지위는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상대적으로 높게 여겨지는 지위이지 실
제로는 6계의 어느 누구도 서열을 매기기가 힘들지요.
천제의 역할은 단지 수명의 관리자 일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해용.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번 호 : 1391 / 3334 등록일 : 1999년 08월 05일 23:53
등록자 : 까망포키 이 름 : 포키 조 회 : 180 건
제 목 : [연재] 흑룡의 숲 제 10장 五.
흑룡의 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