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룡의 숲-53화 (53/130)

제 11장  흩어지는 기억

잊으세요.

저의 바램은 단 하나입니다.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영원히 사는 것은....

행복이 아닙니다.

그저 스쳐지나가면 돌아오지 않을

바람처럼

흘러간 후에는 되돌릴 수 없는

물줄기처럼

시간속에 띄워 보내세요.

망각은 당신이 가진 단 하나의

자유입니다.

一.

꿈꾸듯 평안하게 생전에 간직했던 그 모습 그대로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러한 그녀의 죽음은 세상에 태어난 자라면 누구나  맞이해야 할 당연한 것

이었다. 모든 살아있는 자라면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만큼 그녀

의 자세 또한 담담했다.

슬픔은 없었다. 언젠가 이렇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만큼.

그녀의 죽음이 정해진 시간보다 빨리  찾아오긴 했지만. 그래서 그가  앞으로

많은 책임을 짊어지고 살아가야 할 시간들이 길어지기는 했지만. 그는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 담담함은 결코 그녀를 이해했기 때문에 나온 것이 아니었다.

*            *            *

" 잠시 자리를 피해 주겠나?"

보좌관은 집무실의 안쪽에 느껴지는 희미한 다른 기운을 느끼며 당혹감이 서

린 얼굴로 란의 얼굴을 바라 보았다.

자신의 감각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것은 분명 천계에 속한 기운은 아니었기에.

하지만 자신의 기우가 분명했다. 분명 그럴 것이다.

살짝 고개를 저으며 보좌관은 집무실에서 빠져나갔다.

[ 천개(遷開) 경(鏡) ]

보좌관을 비롯해 주위에 다른 일족들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다는 것을 확

인한 후 란은 주문을 외쳤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은은한 붉은 기운에

감싸인 거울이 허공에 떠오르며 거울 안쪽에  입꼬리를 살짝 들어 올리며 웃

고 있는 요희의 얼굴이 떠올랐다.

- 홍룡왕. 란. 당신의 말에는 찬성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인사를 생략하고 바로 말을 꺼내기는 했지만 요희는 무척이나 예의바른 태도

로 란에게 말을 건넸다. 평소에 보여왔던 그녀의 모습을 알고 있는 자라면 누

구나 혀를 내두를 만큼  그녀의 모습은 보통의 여인들과 다를 바가 없어보였

다. 하지만 어떤 모습을 하고 있던  간에 요희. 그녀가 명계의 주인이라는 것

에는 변함이 없었다.

" 이유라..... 자신이 하고 싶은 걸 행하는데 꼭 이유가 필요합니까?"

대답대신 란은 피식 웃으며 요희에게 되물었다.

- 후훗. 아무리 당신이라도 쉽게 이유를 밝혀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

는 것을 보니 아직 양심은 남아있는 모양이군요.

날카로운 요희의 지적에 란은 속으로 숨을 삼키며 여유로운 미소를 떠올렸다.

요희가 가진 붉은 눈동자에는 다른  이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칼날과도 같은

날카로움이 담겨 있었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를 마주 대할때마다 란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속마음이 드러나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그럴 리가 없지. 아무리 헤아릴 수  없을만큼 오랜 시간을 살아왔다고는 해도

세상에 존재하는 어느 누구도 다른 이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자는 없으

니.....

마음속으로 되뇌이며 란은 요희의  눈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움을 아무렇지 않

게 넘겨버리려 애썼다.

- 당신이 원하는 건 알고 있으니 그대로  해드리죠. 그리고 한가지를 더 전

하고 싶은데.......

요희는 잠시 말을 끊었다.

- 이미 알고 계실지 모르지만 천상계의  천제에게서도 서신을 받았지요. 그

것도 당신과 같은 목적으로....... 아니, 조금 다르지만...

란은 얼굴에 떠오른 놀람을 지우려 하지  않았다. 천제의 그러한 행동은 예상

하지 못했던 일이기에 란이 놀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우스운 일이군...."

요희는 란의 그런 반응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처럼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            *            *

확실히 훼이가 보기에도 유에린. 그녀의 힘은 눈에 띄게 자라나 있었다. 아직

성년식을 치루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왕족의 강한 피가 흐르는 유안의 공격에

서 저만큼이나 버티고 있다는 것은  괄목할 만한 성과였다. 그렇다고  그녀의

힘이 현무족을 상대로 배겨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마치 바람을 타고 움직이는 것처럼 유연한 몸놀림으로 유에린은 유안의 손에

서 뻗어나오는 정제되지 않은 힘의 덩어리들을 피해냈다.  처음에는 진심으로

그녀에게 힘을 쏟아부으려 하지 않던 유안도 자신보다  단지 몇살 많을 뿐인

유에린이 계속해서 공격을 피해내자 조금씩이긴  하지만 전력을 기울이려 하

고 있었다.

그 증거로 유안의 손에서 나오는 힘의 덩어리들은 점점 더 짙고 투명한 빛깔

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렇게 끊임없이 몸을 움직이며  쫓고 쫓기는 유안과  유에린의 모습은 마치

꽃 주위를 쉴새없이 맴도는 벌과 나비를 보는 듯 했다.

언젠가 그녀는 그런말을 했었지.....

막 용족의 수명에서 벗어난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가던 그때...

언제나처럼 붉은 꽃잎의 잔영과 함께 그녀의 모습이 스치듯이 머리속에 떠올

랐다 사라졌다.

훼이는 고개를 저으며 막 과거의 잔상속으로 떨어지려는 정신을 추스렸다. 요

즘에는 이상하게도 현실을 직시하는 시간 보다는 과거를 되새기는 일이 많았

기에 더 이상은 그렇게 감상적인 자신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 ......제가 졌습니다....."

거칠게 숨을 내뱉으며 유에린은 동작을 멈췄다. 그러자 유안의 손에 맺혀있던

검은 덩어리들도 마치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유안에게서 힘의 기운

이 사라짐과 동시에 유안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진지함도 사자져 버렸다. 그

리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아직은 어린 치기어린 미소를 떠올린 흑룡족의 소

년의 모습 이었다.

" 힘들죠. 유에린?"

" .......네. 역시 대단하시군요. 전 당해내질 못하겠어요...."

그리고 둘은 몇마디의 이야기를 더 나누었지만  훼이는 더 이상 그들의 대화

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언제 그렇게 친해졌는지  유에린은 마치 누이와 같

은 얼굴을 하고 유안과 나란히 개울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렇다. 모든 것은 시간의 흐름에 몸을 내맡긴채 변해간다. 하늘에 떠오른 구

름이 바람을 타고 흘러가듯이 쉴새없이 물줄기가 강을 향해 흘러가듯이 모든

것은 한곳에 머물지 않는다.

아이들은 태어나서 자라고 어른이 되고 또 늙어간다. 예전에는 어린줄로만 알

았던 동생 라이엔 역시 지금은 누구보다  사려깊은 흑룡족의 왕이 되지 않았

던가.

언제나 잊고 있는 일이지만 끊임없이 움직이는 세상 속에서 언제나 정지하고

있는 것은 자신 뿐이었다.

대체....왜.......

용족의 수명을 벗어난 이후로 언제나 품어왔던 의문.

아버지는 어째서 자신에게 생명력을 넘겨 주었는가. 그것이  아버지 나름대로

의 오랜동안 내버려 두었던  아들에게 전하는 감정의  표현이라는 것은 느낄

수 있었지만......

훼이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자신의  문제를 끄집어낸 천제. 그리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과거의 영상들.

자신을 찾아온 청룡족의 소녀 유에린과 그녀를 받아들인 자신.

분명 그것은 혼란이었다.

막혀있던 둑이 터져 한순간에 갇혀있던 물이 넘쳐 흐르는 것처럼 잠들어있던

여러 가지 일들이 한번에 얽히려 하고 있었다.

" 왜 피하려고만 하죠? 결국엔 당신의 손으로 풀어가야할 문제잖아요."

분명히 그녀라면 이렇게 이야기 했을 것이다.

당연한 일을 왜 고민하냐는 듯이.

" 그 숲이 언제까지나 당신의 은신처가 될 수는 없어요."

또다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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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훗... 제 스타일이 어디 가겠어요.  바꾸려다보니 또 이상해 지네요 ^^  그냥

쓰던대로 하죠. 뭐... 흑룡의 숲은 제가 처음으로 제대로 시도하는 중편이니까.

습작이 되겠네요 ^^ 글 쓰는건 언제나 습작 이겠지만요. 별 계획도 없이 무대

포로 글을 쓰다보니 원....  그냥 배째라가 되는군요. 여하튼  완결의 그날까지

읽어주시는 분들을 위해서 열씨미 쓰겠습니당. ^-^

그리고 설정 자료집을 만들면서 지금까지 쓴 걸 찬찬히 읽어보고 있는데요...

과연 이걸 내가 썼단 말인가...-- 왜 이렇게 새로운지 모르겠습니다.

역시 전 바보였어요..

마지막 잡담.... 오늘은 장장 10시간 동안 컴퓨터로 소설을 읽었습니다. 우욱..

목이 빠져 버릴 것 같아.... (원래 두편 올리려고 했는에 소설 읽다가..헤헷..)

간만에 글을 들고 나왔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 ^-^

번 호 : 1738 / 3334 등록일 : 1999년 08월 19일 00:02

등록자 : 까망포키 이 름 : 포키 조 회 : 153 건

제 목 : [연재] 흑룡의 숲 제 11장 二.

흑룡의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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