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장 흩어지는 기억
六.
그토록이나 갑자기 어머니가 눈을 감을 줄은 몰랐다.
왜 그토록 급히 계승식을 하냐는 나의 물음에도 그냥 빙긋이 웃음을 지을 뿐
이었던 어머니.
어쩌면 어머니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 ..........훼이..."
하지만 어머니가 최후의 순간에 부른 이름은 아버지의 이름도, 나의 이름도
그렇다고 어린 동생들의 이름도 아닌 다른 이의 이름.
용족이라면 누구라도 알고 있을 그 이름.
배신을 당한 기분이었다....
란은 차갑게 식어버린 눈동자로 눈앞을 직시했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많은 수의 사람들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와 마찬가지
의 태도로 오만하게 주위를 보는 훼이의 눈은 놀랄만치 차분한 빛을 띄우고
있었다.
지금까지 언제나 그의 눈에 떠올라 있던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가라앉은
빛은 여전했지만 그 속에 담긴 것은 더 이상 슬픔이 아니었다.
란은 두눈으로 직접 훼이를 대하자 그동안 쌓여왔던 많은 말중 어느것 하나
도 내뱉을 수 없었다. 어린 시절 이세상 그 누구보다 아름답다고 여겼던 어머
니. 아직도 그 모습이 눈에 선했다. 하지만 더 이상 그 기억이 아름답게 여겨
지지만은 않았다.
훼이라는 저 남자는 어째서 자신의 어머니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었는지.
어리다고 해도 좋았다. 자신이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고 있다고 해도 좋았다.
단지 훼이에게 묻고 싶었을 뿐이다.
왜 어머니에게 그토록이나 슬픈 미소를 짓게 만들었는지.
왜 단 한번도 환하게 피어오르는 꽃과 같았다던 예전의 그 미소를 보여주지
않게 했는지.
" 지금부터 시작인가요?"
란이 두손을 들어올리며 주문을 외울 준비를 시작하자 요희는 입가에 진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고요한 침묵속에 들려온 그녀의 목소리는 어느때보다 더 날카롭고 음산하게
울려퍼졌다.
" 이번엔 기대에 어긋나지 않을거라고 말해두지....."
그렇게 말하며 훼이는 바닥에 내려놓았던 검을 집어 들었다.
방어주문이 해제됨과 동시에 검을 멈추었던 검선들은 다시 유려한 몸놀림으
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평생을 검과 함께 살아온 검선들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만큼 능숙하고 안정
된 움직임을 보이며 훼이는 검을 휘둘러 자신에게 향한 은빛 검날들을 막아
갔다.
그리고 어느샌가 투명한 푸른빛깔을 자랑하던 하늘에 검은 구름이 뒤덮이기
시작했다.
[ 염궁(炎弓) 시(矢)! ]
하늘을 뒤덮어가는 구름은 폭풍우를 부르는 구름이었다. 그걸 알고 있는 란이
었기에 그는 재빨리 훼이를 향해 강하고도 빠른 주문을 외쳐 공격을 감행했
다. 굵은 빗줄기와도 같은 모양의 가느다란 불꽃들 수십개가 훼이를 향해 빠
르게 날아갔다. 그것은 마치 선연하고 아름다운 붉은 빛무리가 한곳을 향해
모여드는 것 같았다.
수십개에 달하는 불꽃의 화살들이 훼이와 검선들의 지척에 다다른 짧은 순간
갑자기 가느다란 물기둥 수십개가 바닥에서 솟아올랐다.
그리고 그 물기둥은 아주 적절한 순간에 훼이의 주위에 다가선 불꽃의 화살
들을 모두 사라지게 만들었다.
재빠른 훼이의 대응에 란은 그다지 놀란 기색을 떠올리지는 않았다. 별다른
반응 없이 재빨리 다음 공격을 준비했을 뿐이었다.
하늘을 짙은 검은 색으로 덮어버린 구름들은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듯이 잔
뜩 흐려져 있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조금 강해진 바람만이 불어올뿐 빗방울은
떨어져 내리지 않고 있었다.
[ 강뇌파탄(鋼雷破彈) 전(展) 륜(輪) ]
[ 폭염장벽(暴炎障壁) 전(展)! ]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불의 힘을 근본으로 하는 홍룡의 힘은 반감되기 마련
이었기 때문에 란은 속전속결을 결심하고 동시에 두 개의 주문을 외쳤다.
확실히 한 일족의 왕이 가진 힘은 그 크기 부터가 달랐다.
조금전 훼이의 방어주문을 와해 시키기 위해 썼던 주문과는 아예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대한 힘이 뿜어져 나왔다. 머리만한 붉은 불꽃의 덩어리
들과 하늘을 뚫을 듯이 거대하게 치솟은 불꽃의 장벽이 훼이에게 퍼부어졌다.
그리고 그와 때를 같이하여 그동안 아무런 공격도 하지않고 있던 요희의 손
에서도 끈적한 느낌의 푸르스름한 기운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란과 요희의 공격이 시작되기 전까지 훼이의 움직임을 묶어두고 있던 화선들
은 공격이 시작되자 마자 일순간에 훼이의 곁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훼이는 붉고 푸르스름한 기운에 둘러싸여 모습을 감췄다.
훼이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이 자리에 있는 어느 누구도 훼
이가 그대로 당했다고 생각하는 자는 없었다.
툭툭.
경쾌하게 지면에 부딪히는 소리가 울리며 굵은 빗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훼이를 감싸고 있던 두 개의 기운들은 하늘까지 치솟은
회오리 치는 물기둥에 의해 사라졌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끔
하게.
" 과연...... 날 무척이나 즐겁게 하는군요....훼이."
언제나처럼 날카로운 미소를 떠올리고 있는 입술과는 달리 요희의 눈은 차갑
게 식어가고 있었다. 지금까지 두 눈에 가득차 있던 흥분감은 훼이의 반격으
로 인해 씻은 듯이 사라진 후였다.
하늘에 솟은 물기둥은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점점 더 급격한 움직임을
보이며 소용돌이 쳤다. 그리고 곧 눈부시도록 투명한 수룡의 형상으로 화했
다.
" 더 이상 지체해서는 안돼겠지... 벌써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으니.."
훼이는 실로 오랜만에 진심으로 싸우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타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몸속에 웅크리고 있는 마력을 한껏 발산하고 싶은 욕
구. 그것은 마치 밀려오는 파도처럼 격렬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 것처럼 투명한 수룡은 폭우속을 자유롭게 헤엄치며
훼이에게 적의를 품은 자들을 공격했다. 휘몰아 치는 돌풍에 휘말린 듯이 훼
이를 제외한 모든이들이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특히 용족과 같은 마력을
가지지 못한 화선들은 대부분이 몸을 가누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훼이의 손짓에 따라 움직이던 수룡은 순식간에 하늘로 떠올랐고 이번에는 열
개로 나뉘어져 하늘을 떠돌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작고 가느다란 모습을 하고
있던 그것들은 폭풍우 속을 떠돌면서 점차로 처음의 수룡과 같은 크기를 갖
추어 갔다.
요희는 훼이가 주문을 운용하기 위해 잠시 방어에 소흘한 틈을 타서 푸르스
름한 안개를 뿜어냈다. 요희에게서 퍼져나온 안개는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 속
에서도 그 형태를 잃지 않고 빠르게 훼이의 몸을 덮쳐갔다.
촤락.
물살이 빠르게 움직이는 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하늘을 빠르게 유영하던 수룡
들이 일제히 하강했다. 하지만 수룡들의 하강속도보다 요희의 안개가 도달하
는 것이 조금 더 빨랐다.
피부에 달라붙는 듯한 끈적한 느낌의 안개는 일순 훼이의 감각을 마비시켰다.
요희 답군...
작은 실수가 패배로 직결되는 싸움 속에서도 훼이는 생각을 떠올리며 득의한
미소를 떠올리고 있는 요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빗줄기에 몸을 실은 수룡들은 순식간에 요희와 그녀의 호위들을 덥쳤
다. 훼이의 눈에는 그들이 거대한 압력에 눌려 바닥에 주저않는 모습이 비쳐
들어왔다.
푸른 안개의 효력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날카롭게 살아있던 훼이의 감각을
방해했다.
그때 '팟' 하는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 언제나 방심은 금물이죠. 아무리 강한 당신이라도."
숨이 막혀왔다. 가슴이 타버릴듯한 화끈한 통증.
훼이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주저 앉았다.
오늘의 대결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될 것이다. 자신을 이토록이나 벼랑
으로 몰고간 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
구름은 점점 더 굵은 빗방울을 퍼붓고 있었다.
훼이는 오른손을 들었다. 소용돌이치며 뭉쳐진 투명한 빗방울들은 훼이의 손
바닥 안에서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며 일직선으로 뻗어나갔다.
막 방어주문을 펼치고 있는 란을 향해.
그리고 수십개의 물줄기는 란이 펼친 방어주문을 뚫고 들어가 란의 몸에 적
중했다. 핏방울은 흩어지지 않았지만 란은 창백하게 표정을 굳힌채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쌔액.
또 다시 퍼져가는 날카로운 통증.
그렇다. 아직 그녀들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훼이의 손에서 또다시 가느다란 물줄기들이 뻗어나갔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
도의 빠르기로.
훼이는 다시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이제 몸에 감각은 돌아왔지만 몸의 곳곳에서 느껴지는 통증은 훼이가 자리에
서 일어서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다.
훼이 자신을 포함해서 아직까지 몸을 세우고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훼이
는 요희와 그녀의 호위를 억누르고 있는 수룡들 쪽을 바라보았다. 엄청난 압
력속에서도 요희는 여전히 날카롭게 웃고 있었다.
[ 역궁(逆窮) 개문(開門) ]
수룡들로 인해 얽힌 막힌 공간에서 검게 일렁이는 빛무리가 일어나며 공간의
문이 열렸다.
훼이의 힘에 의해 열린 공간으로 요희와 함께 명계에서 온 자들은 사라졌다.
여러개의 주문을 겹쳐서 사용해서인지 몰라도 호흡이 더 가빠져왔다. 확실히
공간이 닫힌 것을 확인한 후 훼이는 다른 모든 주문을 해제시켰다.
" 이건 대체...."
막 구름이 걷히고 개어가는 숲으로 또 다른 누군가가 들어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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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여전히 졸립니다..
밤이라서 그런거겠죠...
졸면서 자판을 두드리고 있자니 내가 뭐하고 있나라는 자책감이....^^
오늘은 어쩌다보니 많이 썼군요.... 오옷... 갑자기 왜 이랬지...
이제 11장도 끝나갑니다... 모두들 즐거운 하루를 시작하세요~~
번 호 : 1943 / 3334 등록일 : 1999년 08월 24일 00:12
등록자 : 까망포키 이 름 : 포키 조 회 : 158 건
제 목 : [연재] 흑룡의 숲 제 11장 七.
흑룡의 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