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장 바램...
六.
가화는 이를 악물고 검을 쥔 손에 힘을 집어 넣었다.
후들거리는 다리와 자꾸만 아래로 향하는 손은 이미 그녀의 체력에 한계가
왔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쓰러지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
은 아직 검을 쥘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그녀는 결국 오른손을 스치고 지나간
검고 날카로운 기운에 의해 검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졌다...
그 순간 그녀의 머리를 스치고 지난 것은 바로 그말이었다.
검선들은 손에 검을 지니고 있을 때 최상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그리고 반
대로 검을 떨어뜨리는 순간 그녀들은 보통의 여인들보다 강인하고 냉정한 사
고를 하고 있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 변해버리는 것이
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상대가 너무 강했다. 그녀들을 보통의
무기력한 여인으로 되돌려 놓을 만큼.
그들의 도움을 얻었다면 결말이 달라졌을까?
아니야..... 가화는 고개를 저었다.
비록 손에서 검을 떨어뜨리고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지치긴 했지만.
그리고 자신이 검을 놓음으로 해서 그녀의 주군인 천제는 더 이상의 보호를
받을 수 없게 되긴 했지만.
그녀는 지금 안도하고 있었다.
그들..... 죽은자들. 더 이상의 안식을 얻지 못하고 영원히 삶의 굴레에 묶여 시
간속을 떠도는 자들. 그들의 손을 빌리지 않고 자신들의 힘 만으로 지금까지
버텨냈다는 생각에 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적어도 난 천인으로서의 자존심은 지켰어......
자신의 선택이 비록 지금 천제를 위험에 처하게 만들긴 했지만 가화의 마음
은 가벼웠다.
패배보다 더 싫은 것은 자존심을 꺾이는 것이기에.
가화의 검이 바닥에 떨어지는 그 순간 다른 검선들 역시 손에서 검을 떨어뜨
렸다. 마치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절묘하게 그녀들의 손목을 쳐서 검을 떨어
뜨리게 만든 검은 기운은 그저 시큰거리는 통증만을 전했을뿐 지난번의 싸움
에서와 같이 몸을 부술듯한 고통을 주지는 않았다.
" 아....."
그녀들은 자신들을 스쳐 지나가 천제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서는 용족들을 보
며 깨달을 수 있었다.
방금전의 공격은 더 이상의 피해를 내지 않게 하기위한 훼이의 배려였다는 것
을. 덕분에 검선들은 피로가 누적되는 고통을 견뎌내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
흑룡족 청년들은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지 않게 되었다.
고마워요....
가화는 입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되뇌었다.
그리고 문득 자신의 마음속에 우상처럼 자리잡은 그녀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연화님처럼 검선이라는 이 굴레를 벗어던져버리고 싶지만 내게는 그런 용기가
없어. 내가 할 수 있는 건 단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이를 악무는 것 뿐....
오래전의 그녀는 그랬었다. 천제의 손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 사랑하는 이의
곁에 더 이상 머물 수 없음을 한탄하며 천상계를 떠났다. 그녀가 선택한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자신의 마음이었다. 그동안 한겨울의 얼음처럼 굳어져 있던
자신의 마음이 이끄는 대로. 그녀는 모든 것을 벗어던졌다. 비록 그 얼음을 녹
인 것이 슬픔이라는 이름의 이별이긴 했지만.
연화라는 전전대 검선의 장이 천제로부터 받았던 최후의 명령. 그녀가 천상계
를 등지기 전에 받았던 최후의 명령은 바로 조금 전 자신의 눈앞을 지나쳐간
훼이를 없애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명령을 수행하지 않았다. 대신 품속에서 검선의 장이라는
지위를 나타내는 검을 꺼내 바닥에 내던졌을 뿐이었다. 그리고 당당한 태도로
상천궁을 빠져나갔다. 그녀는 단 한마디의 말도 내뱉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빛
에는 말로 하는 것 보다도 더 많은 뜻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천상계를 떠나 하계로 내려간 그녀는 단 한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
다. 사랑하는 이의 친우였던 훼이의 앞에도. 그리고 가족들의 앞에도.
* * *
천제는 작은 동요조차 보이지 않은 채 여전히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분명
훼이를 비롯한 흑룡족들이 들어섰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텐데도 그는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천제의 모습을 바라보는 훼이 역시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
저 조용히 관망하는 시선으로 천제의 모습을 응시할 뿐이었다. 훼이와 함께
집무실 안으로 들어선 흑룡족의 청년들은 곧 훼이의 손짓에 의해 세명을 제외
하고 모두 밖으로 빠져나갔다. 비록 검선들이 물러나기는 했지만 천제를 호위
하는 것은 그녀들 뿐이 아니었다. 싸움을 할 때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
던 천군들도 분명 천제의 안위를 위해 나설것이 분명했다.
한동안 적막만이 방 안을 떠돌았다.
" 충분한 방비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보군."
여전히 바삐 손을 움직이면서 천제가 입을 열었다. 중후함도 그렇다고 깊은
위엄이 담긴 것도 아닌 묵직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 ......아버지를 닮았군."
훼이의 그 말에 천제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차가우면서도 단정해 보이는 천제의 외관은 분명 전 천제 였던 오현의 모습과
흡사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그 두눈에 떠오른 빛이었다. 지금 천
제의 눈에는 낮게 억제된 욕망이 내제되어 있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잔혹함이
라는 색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그리고 그의 할아버지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여성편력의 소유자였던 것처럼 그도 마음 밑바닥에서부터 꿈틀거리는 권력이
라는 이름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을 잠재우고 있었다.
" 훗..... 나는 누군가를 닮았다는 말을 가장 싫어하지....."
설사 그것이 아버지라고 해도.
천제의 다음말은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그저 속으로 혼자 되새겼을 뿐.
피식거리는 웃음을 지어보이며 천제는 말을 꺼냈다. 눈 앞에 선 것만으로도
자신의 존재감을 강하게 드러내는 흑룡족의 오래된 자. 훼이를 똑바로 응시하
며.
" 그대는 이미 죽었어야 할 자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곳까지 왔지? 설마
내게 직접 죽음을 전해달라고 온 것은 아니겠지?"
" 수명부에는 내 죽음이 언제라고 명시되어 있지?"
훼이는 대답대신 질문을 던졌다.
" 그걸 꼭 밝혀야 하나? 잊고 있나본데 모든 살아있는 자들의 수명을 볼 수
있고 또 그것을 관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나 뿐이지. 그리고 그것은 당사자
가 눈앞에 있다고 해도 예외가 될 수 없어."
" 대답을 회피하는 것을 보니 그대의 말은 거짓인가보군."
훼이는 깊은 빛을 담은 검은 눈으로 천제를 응시했다.
" 내가 거짓을 가지고 그대의 죽음의 정당성을 따졌을 것 같은가? 직접 확
인해 보는 게 어떨는지..."
그렇게 말하며 천제는 책상위에 놓여있던 몇 개의 두루마리들 중에서 하나를
골라냈다. 하지만 그는 집어든 그것을 바로 훼이에게 건네주지는 않았다.
"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 어떻게 할 것인지 약조 하는 것이 어때..."
" 약조라....."
훼이는 작게 중얼거렸다.
" 훼이. 그대의 수명이 수명부에 적힌 수명을 초과한 것이라면 그대는 순순
히 생명을 내놓아야 할거야. 그렇지 않으면 가장 오랫동안 천계의 땅에서 살
아온 그대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이 되겠지."
그렇게 말하는 천계의 표정은 지금 이 상황을 즐기는 듯이 보였다. 그것은 마
치 어린아이가 곤충을 가지고 장난을 칠때와 같은 순수한 잔혹함이었다.
" 내가 왜 그런 약조를 해야하지? 천제라는 이름이 그토록이나 대단하다고
생각하나?"
훼이가 당연히 동의한다는 대답을 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던 만큼 천제로
서는 그 예상과 어긋난 그의 대답에 당황하고 있었다. 물론 겉으로 그 표정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그의 평정심은 조금씩 흔들렸다.
" 그리고 나는 이름 때문에 오랜 세월을 살아온 것이 아니야."
대답을 건네는 훼이의 얼굴에는 작은 흔들림조차 보이지 않았다.
" 하지만 그대는 살아있음으로 해서 정해진 질서를 어기고 있다."
" 질서? 그 질서는 누가 정한 것이지. 그대가 정했나?"
날카롭게 반박해오는 훼이의 모습에 천제는 놀라움을 느끼고 있었다.
어째서 이자는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인가. 오랜 세월을 살아왔기 때문에 생
긴 자긍심 때문인가? 하지만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은 자신이다.
용족이 계절이라는 자연 순환의 질서를 책임지고 있는 것처럼 자신은 수명이
라는 살아있는 자들의 질서를 책임지고 있는 것이다.
" 직접 두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좋을거야.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길이를."
천제는 천천히 손을 뻗어 훼이에게 두루마리를 내밀었다. 오랜 시간이 지났음
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본래의 빛깔을 간직하고 있는 미색의 종이는 매끄러운
촉감을 전하며 훼이의 손으로 넘어갔다.
수명부(壽命簿). 살아있는 모든 자들의 수명이 적혀있는 생과 사의 집합서.
자신의 수명부를 받아든 훼이의 손은 무슨 이유때문인지 조금씩 미미한 흔들
림을 보이고 있었다.
===============================================================
우엥...오늘은 아르바이트 예정시간보다 한시간이나 초과하는 바람에 밥도 못
먹고 괴로웠어요. 역시 만화 이벤트 회사는 손님이 너무 많아서 탈이야....--
그런다고 돈 더 받는 것도 아닌데...우흑..
음...이벤트 마지막날이었는데 전부 8명이 응모해 주셨습니다. (예상보다는 많
은 분들이 참여해 주셨지만....) 음.. 그중에 맞추실 분이 계신 듯...^^ 발표때까
지 기다려 주세요.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꾸벅.
번 호 : 2178 / 3334 등록일 : 1999년 08월 31일 00:37
등록자 : 까망포키 이 름 : 포키 조 회 : 131 건
제 목 : [연재] 흑룡의 숲 제 12장 七.
흑룡의 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