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장 바램...
七.
훼이는 자신의 수명이 적힌 두루마기를 받아들고 한동안 그 무게를 느꼈다.
천상계의 천제들이 관리하는 일명 수명부(壽命簿)라고 불리는 그것.
그저 종이에 불과한 그것이 모든 살아있는 자들에게 구속을 안겨준다는 사
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 왜 펼쳐보지 않지? 진실을 아는 것이 겁나나?"
천제는 노골적인 비난이 담긴 목소리로 훼이에게 말을 건넸다.
하지만 훼이는 천제 쪽은 돌아보지 않은채 여전히 두루마기를 조용히 응시했
다.
용족에게 주어진 천년이라 시간은 이미 아버지로 인해 깨어졌다. 그리고 자신
은 더 이상 얽매인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이것. 종이에 불과한 수명부가 지금 자신을 다시 얽
어매려 하고 있었다.
" 나는 더 이상 과거속에서 살아가지 않아......"
나지막하게 울려퍼진 훼이의 말 속에 담긴 의미를 이 자리에 있는 어느 누구
도 이해할 수 없었다. 오직 그 말을 내뱉은 훼이 이외에는.
훼이는 천천히 들고 있던 오른손 위의 수명부에 왼손을 올렸다. 미끄러질 듯
한 매끄러움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거칠지도 않은 마치 비단과 포목을 섞어
놓은 듯한 감촉이 손끝을 타고 느껴졌다.
그리고 그 일은 미처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훼이가 내뱉은 말
의 여운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훼이의 손에 들려있던 두루마기가 날카로운
칼날에 잘린 것 처럼 조각조각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그것이 무슨일인지 알 수 없었다. 눈꽃처럼 잘게 부서진 종이조각만이 바닥에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 무...무슨 짓인가!"
한참이 지나서야 상황을 파악한 천제가 큰 소리로 외쳤다.
극도의 당혹감에 휩싸인 천제의 모습을 바라보며 훼이는 지금의 상황에 어울
리지 않게 웃음을 떠올리고 있었다.
" 보시다 시피... 수명부를 없앴을 뿐이지. 당신이 원했듯이 이제 난 세상에
서 사라진 존재가 되었어. 그렇지 않나?"
지독히 역설적 이었지만 훼이의 말은 맞는 말이었다.
" 대체....대체....."
천제는 무슨말인가를 하고 싶은 듯 했지만 결국 한 단어만을 반복할 뿐이었
다.
천년이라는 시간을 뛰어넘은 그 순간부터 나는 이렇게 하고 싶었는지 모르
지...
훼이의 시선이 닿은 집무실의 바닥에는 잘게 찢겨진 종이 조각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이제는 그 속에 무엇이 담겨져 있었는지 알 수 없게 되었지만
무척이나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이제서야 비로소 갇혀있던 자신의 마음이 진정한 자신의 것으로 되돌아 왔다
고 해야할까.
" 수명부를 없애다니........"
훼이의 행동이 그에게는 큰 충격이었는지 천제는 넋나간 사람처럼 텅빈 눈을
하고 있었다.
" 하고 싶은 대로 행한다. 그것이 이제 부터의 내가 걸어갈 삶이지."
천제는 훼이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최대의 무기라고 할 수 있었던 수명부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없
애는 자가 나타났다는 것은 실로 거대한 충격이었다.
" 어째서지? 어째서......"
" 이유를 묻나?"
수전증에 걸린 환자처럼 손을 떠는 천제를 바라보며 훼이는 나지막한 목소리
로 물었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수명부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지. 그 속에
는 한 사람이 살아가야할 삶의 길이가 정해져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 내용까
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닐테니까. 결국 자신의 길을 걷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본인 아니었던가?"
" 그건 괘변이야!"
천제는 집무실 전체가 울리도록 크게 소리질렀다.
" 물론 궤변이지. 하지만 난 딱딱한 질서보다는 자신의 생각대로 표현할 수
있는 궤변쪽에 더 마음이 끌리는데."
천제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바닥에 흩어져 있는 수명부의 조각
들을 긁어모으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정신나간듯한 행동을 모고 자리에 있던
세명의 흑룡족 청년들은 눈쌀을 찌푸렸다.
저런 행동이 과연 천상계라는 곳을 다스리는 천제가 할 행동인가....
분명 말로 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그 말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훼이는 흔들림없는 조용한 시선으로 그런 상제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 아무리 당신이 천제라 해도 사라진 것을 되돌릴 수는 없어. 설마 그걸 모
르는 건 아니겠지?"
" 그대는 죽어야 할 자다! 이렇게.... 이렇게 허망하게 그 증거를 놓칠 수는
없지."
분명 천제에게 누군가를 공격할 만한 힘이 있었다면. 아니 용족인 훼이를 이
길 수 있는 힘이 있었다면 그는 분명 훼이를 공격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런 힘을 가지지 못했고 다만 광기에 휩싸여 있을 뿐이었다. 그
것은 마치 장난감을 빼앗긴 어린아이의 투정처럼 볼썽사나운 것이었지만 천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은 오직 다른 이의 우위에서 명령을 내려오던 오만함 뿐
이었다.
" 나가지."
훼이의 말에 천제와 훼이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던 세명의 흑룡족 청년들은
자세를 바로 하며 훼이의 뒤를 따랐다.
뒤에서는 계속 천제의 움직임이 느껴졌지만 어느 누구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
다.
훼이가 문을 열고 천제의 집무실에서 빠져 나왔을 때 밖은 흑룡족 청년들과
천군들과의 팽팽한 대치상태가 유지되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공격을 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한치도 물러서지 않고 있는 그런
상황이었다.
천군들은 검선들조차 무릎을 꿇게 만든 용족. 그중에서도 흑룡족들을 상대해
야 한다는 중압감에 굳어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 감사합니다."
하지만 훼이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을 건넨 한 남자에 의해 그 상황
은 금새 깨져버리고 말았다. 보통의 천군들과는 다른 무복을 입고 있는 것으
로 보아 그가 가장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음이 분명했다.
" 그건 무엇에 대한 감사지?"
훼이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 남자. 천군대장 지인은 고개를 들고 훼이를 응시
했다.
" 상제께 새로운 시야를 열어 주신 것..... 그리고 검선들에게 배려를 해주신
것을...."
분명 집무실 안에서 일어났던 일을 직접 봤을리는 없었지만 지인은 마치 그
상황을 겪었던 것처럼 말했다.
" 이제 천상계는 변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좋은 방향이 될지 나쁜
방향이 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과는 달라지겠죠."
" 이제 두 번다시 천상계에 발을 들이는 일은 없을테지..."
그냥 흘려버리는 말처럼 훼이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 오늘로 나와 천상계를 이어주던 모든 인연은 사라졌으니까...."
그리고 나서 훼이는 흑룡족의 청년들과 함께 상천궁을 걸어나갔다. 스무명이
넘는 흑룡족들이 동시에 걸어 나가는 모습은 정해진 질서는 없었지만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지인은 다시 훼이의 뒷모습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조금전의 인사는
감사의 인사였지만 지금의 것은 오래된 자에 대한 최대한의 예우를 담은 것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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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멋지게 표현하려고 했는데 잘 안돼네요... 헤헷..^^
글발만 받쳐준다면 진짜 감동의 물결이 우러나게 쓰는 건데. 왠지 시시해 졌
습니다.
잠깐잠깐. 오늘이 끝은 아닙니다. 아직 13장이 아직 남아있어요 ^^
근데 이벤트 정확히 맞추실 분은 안계시네요. 대충 비슷한 분께 상품을 드려
야죠. 암튼 참여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오늘도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ps) 생각해 보니 제 독자분들은 20대 이상이신 듯 합니다. 우웃. 기분좋아 ^^
번 호 : 2201 / 3334 등록일 : 1999년 09월 01일 01:29
등록자 : 까망포키 이 름 : 포키 조 회 : 131 건
제 목 : [연재] 흑룡의 숲 제 13장 一.
흑룡의 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