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장. 廣 (도화)
二.
하계의 공기가 품고 있는 것은 익숙함.
분명 천계와 가장 비슷한 환경이라고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리시엔은 그 익
숙함이 신기하기만 했다. 처음 보는 절경들과 하계에서만 자라나는 나무와 풀
들. 눈은 새로운 것을 보며 놀라워 하지만 몸은 모든 것을 익숙하게 느낀다.
리시엔으로서는 처음 겪는 신비한 현상이었다.
" 그래. 하계에 처음 온 소감은 어떻지?"
자상한 목소리로 판유가 묻자 리시엔은 엷은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 신비롭다는 느낌이 들어요. 시간의 흐름이 다르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비
슷하면서도 확연히 다른 곳이기 때문일까요..."
리시엔은 잠시 말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옅은 푸른빛의 하늘에 떠도는
하얀 빛깔의 구름과 가끔씩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흔드는 나무들.
" 그래요... 인간들의 삶을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해요. 무엇을 바라보며 바삐
달려가야 하는지."
리시엔은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한 채 아련한 감상에 젖어
있었다. 처음으로 발을 디딘 하계와 자신과는 다른 존재들이 살고 있는 땅. 코
끝을 스쳐 지나가는 낯선 향기와 옷자락을 흔드는 바람. 모든 것들이 리시엔
을 반기고 있었다.
무엇을 목표로 달려가는가 라는 의문이 생길 정도로 하계의 시간은 너무나도
빠르게 흘러갔다. 이렇게 단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하
계와 천계는 확연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 하루의 길이도, 한 달의 길이도, 한
해의 길이도 하계는 마치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빠르고 천계는 용족이 가진
오랜 수명처럼 여유로움을 품고 있다.
" 빠르구나..."
리시엔은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계에 내려오고 나서 열흘의 시간이 지났다. 그 동안 리시엔은 판유에게 여
러 가지 주문들을 배웠다. 청룡의 힘이 더 능숙하다고는 하지만 판유가 쓰는
백룡족의 힘 역시 리시엔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하루의 삼분지
일 정도의 시간동안에는 판유에게서 여러 주문을 배우고 대련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지만 나머지 시간동안 판유는 앞으로 자신이 가지게 될 자리에 걸맞는
일을 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봄의 용족인 청룡족의 보좌관이 될 판유로
서는 바쁘게 움직이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한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리시엔은 조금 섭섭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오라버니 판유는 예전부
터 청룡왕의 보좌관으로 내정되어 있었지만 그 이전부터 자신과는 혈연으로
연결되어 있는 사이였다. 그런데 이제는 자신에 대한 비중이 확연히 작아졌다
는 것을 몸으로 느낄 정도가 된 것이다. 이런 투정을 하는 것은 자신이 어린
아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과 다를 바 없지만 그래도 리시엔은
섭섭했다.
언제가 되어야 오라버니는 자신을 돌아봐 줄까. 성년식을 치르고 나면 달라질
까? 그렇지 않으면 훨씬 오랜 시간이 지난 후가 되어야할까. 리시엔의 머리
속은 의문들로 가득 채워져 가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고민을 하는 자신이 우습게 여겨졌다.
오라버니의 자상함이 무엇에서 연유한 것인지는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는 따스하지만 그것은 사촌 동생에게 향한 당연한 감정일 뿐 리시엔이 가진
것과 동일한 감정이 아니다.
" 바보같이...."
리시엔은 중얼거렸다.
하늘을 올려다보자 아직 해가 떨어지기까지는 세시진 정도가 남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리시엔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높은 곳에 올라가서 탁 트인 공간을 내려다보고 싶다는 생각이 갑작스레 뇌리
를 점령했다. 천계에서도 항상 산에 오르길 즐겼던 리시엔은 그곳에서 풍경을
내려다보는 것을 좋아했다. 눈앞에서 보는 것과 멀리서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것은 느낌 자체가 달랐다.
' 그래.. 조금은 기분이 나아질지도 모르지.'
리시엔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아침부터 안개가 깔려있긴 했지만 그것은 산 정상을 향해 다가갈수록 점점 짙
어지고 있었다. 이른 아침에 피어오르는 새벽 안개는 아닌 것 같았다. 희뿌옇
게 사물을 가리는 안개는 아직 방향을 찾지 못하고 망설이는 자신의 마음처럼
모호한 느낌을 자아냈다.
" 다 왔다..."
리시엔은 일부러 큰 소리를 냈다. 안개 때문인지 목소리는 큰 울림을 가지지
않은 채 금새 묻혀 버렸다.
" 하...."
넓게 탁 트인 공간을 기대하고 있었지만 막상 산 정상에서 내려다보자 세상은
새하얀 구름과 안개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언뜻 언뜻 모습
을 보이는 굽이치는 산등성이와 넓은 대지는 푸르게 막 피어나는 새싹처럼 파
릇한 빛을 내뿜었다.
* * *
물안개처럼 흩뿌려지는 물방울. 바람을 타고 퍼져 가는 투명한 덩어리들은 햇
살을 가르며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엷은 가랑비가 내리듯이.
간단한 눈속임에 불과할 지라도 지금 자신의 눈에 비치는 광경은 진정 놀라운
것이었다.
" 어떻게 한 거에요..?"
리시엔은 아직 놀라움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물었다.
아무리 청룡과 백룡의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하지만 기본적으로 날씨를 조정하
는 것은 흑룡족의 힘이 아니던가. 비록 미약하기는 했지만 판유가 보여준 것
은 비를 뿌리는 광경이 아닌가.
"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판유는 잠시 말을 멈추고 웃음 지었다.
" 비를 뿌린 것은 아니다."
" 네..그렇다면?"
" 바람의 힘과 물의 힘을 이용해서 마치 비가 내리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
것뿐이다. 간단한 눈속임이지."
판유의 말에도 불구하고 리시엔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판유의 음
성에 담긴 웃음기를 읽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상관할 때가
아니다. 분명 굳어진 이상한 표정을 띄우고 있을 것이 분명하지만 리시엔은
지금 자신의 뇌리 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의문 때문에 미칠 것 같은 기분이었
다.
" 하지만..."
" 진정으로 비를 내리게 하려면 구름이 있어야하지. 그렇지 않니?"
리시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다면 너는 방금 구름을 보았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구나."
" 그건 아니지만..."
판유는 넓게 펼쳐진 들판으로 시선을 던지며 말을 이었다.
" 그저 내가 가진 두 개의 힘을 어떻게 쓰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만들어낸
작은 술수에 불과하단다. 물을 이곳으로 끌어내서 순간적으로 바람을 불러내
주위에 뿌린 것이다. 힘은 미약하지만."
리시엔은 순간적으로 판유의 말에 깃든 작은 감정의 조각을 읽어냈다. 그것은
정말 우연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판유의 음성에는 결코 그에
게는 어울리지 않는 망설임이 배어 있었던 것이다.
" 언젠가는 다른 어떤 이가 보아도 비를 뿌리는 것으로 보일 정도가 되었으
면 좋겠지만..."
어깨부근에서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곧은 검은 머리카락이 미미하게 흔들렸
다. 그리고 이어지는 희미한 한숨.
" 나도 더욱 강한 힘을 가지고 싶은데 말이야."
리시엔은 고개를 돌린 판유의 얼굴이 조금 전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에 안심
하며 일부러 토라진 표정을 지었다.
" 무슨 소리예요. 오라버니 나이를 생각 해야죠. 그리고 지금 오라버니 나이
에 보좌관이 된 이가 있는 줄 아세요?"
" 아직은 보좌관이 되지 않았다."
" 그게 그거죠 뭐. 이제 곧 그렇게 될텐데. 욕심은 과할수록 독이 되는 법이
에요."
판유는 웃음을 떠올렸다.
" 내가 너에게 이런 소리를 듣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 저도 조금 있으면 성년이라구요. 언제까지나 어린 동생이 아니란 말이에
요."
말투에 담긴 것은 장난스러움이었지만 말은 진심이었다. 판유는 알아채지 못
하고 있지만.
" 어제 발견한 좋은 장소가 있는데 함께 가실래요? 그곳에 가면 가슴이 탁
하고 트이는 기분을 맛볼 수 있을 거예요."
" 그래? 혹시 내가 아는 곳인지도 모르겠군.."
" 아닐거에요. 분명. 어서 가요. 가서 확인해 보는 편이 좋겠죠?"
리시엔은 판유의 대답도 듣지 않고 발걸음을 떼었다. 모든 것을 내려다본다는
느낌. 비록 자신은 용족이라는 무게 있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어디서부터가
시작인지 알 수 없는 커다란 세상 속에서는 다르다. 자신 역시 산 속에서 자
라나는 한 그루의 나무와 마찬가지로 세상을 이루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어머니는 늘 말했었다. 용족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품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
이 자만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리시엔은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길게 풀어둔 머리카락 사이로 서늘한 산
공기가 파고드는 느낌이 상당히 기분 좋았다.
" 저보다 늦게 오면 안돼요."
뒤로 돌아 큰 소리로 외치고 나서 리시엔은 발에 힘을 가했다. 거의 달리듯이
발을 빠르게 교차시키며 리시엔은 나아갔다.
[번 호] 6992 / 7153 [등록일] 2000년 03월 08일 22:43 Page : 1 / 11
[등록자] 까망포키 [조 회] 127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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