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룡의 숲-72화 (72/130)

제 2장. 黑 (그림자의 끝에서)

검은 어두움으로 뒤덮인 암담함 속에서...

그 침묵과도 같은 고요 속에서...

시간조차 숨을 죽인 적막의 바다가

조심스레 눈을 뜨고 세상을 본다.

一.

시냇물이 흐르는 소리. 산새들의 지저귐. 나뭇가지를 통과하는 바람. 그리고

침묵처럼 흐르는 고요. 또 다시 아침이 찾아왔다.

항상 아침을 맞이할 때마다 카이엔의 가슴에는  아련한 통증이 피어올랐다.

그것은 두 번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기억을 떠오르게 하는 동통이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자신의 하루는 차분하면서도 맑은 울림을 가진 어머니

의 목소리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머나먼  과거의 기억처럼 어렴풋이

그의 뇌리를 점령하고 있을 뿐. 지독한 한산함과  고요로 점철된 아침은 악

몽처럼 그를 따라붙었다.

-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카이엔이 직접 얼굴을 마주 대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을 꼽으라면  그

가 지금까지 살아온 20년의 세월을 통틀어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을 정

도의 숫자로 한정된다. 그것은 그의 부모님이 그를 낳은 후 머물게 된 곳이

인적이 극히 드문 깊은 산 속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이유이기도 했

다. 그렇지만 그것보다는 카이엔이 자신의 집을 떠날  생각을 하고 있지 않

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편이 옳았다.

그때로부터 벌써 몇 년이 흘렀고 자신은 스무 살이 되었지만 변한 것은 없었

다. 그때는 둘이었지만 지금은 혼자라는 사실만이 다를 뿐.

"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어..."

그는 버릇처럼 중얼거렸다.

낡은 문에서는 계속 삐걱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꼭 맞지 않는 문틈 사이로

조금씩 바람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아련하게 되살아나는 과거의 영상. 겨울

이면 어머니는 웃음 띄운 얼굴로 오래된 종이를 잘 접어서 그 틈안에 채워 넣

곤 했다. 그것도 지금에 와서는 하지 않고 있지만.

희미한 열기를 품고 있는 초여름의 바람은 이름만큼 따뜻하지만은 않았다.

지독한 외로움. 자신의 목소리조차 잊을 정도로 고요 속에 묻혀 지내온 시

간들. 또 다시 세찬 바람이 문을 한차례 흔들고 지나갔다.

*            *            *

"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어. 언제나 그랬듯이 아무 것도....."

" 어머니?"

카이엔은 윤기가 흐르는 길고 검은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어머니를 불렀다. 그렇지만 예상하고 있었던 것처럼 그녀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비록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그녀의 아름다운 머리카락뿐이었지만

카이엔은 어머니의 눈동자가 눈앞에 펼쳐진 진록의 숲이 아닌 자신이 볼

수 없는 먼 곳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도 들어서지

머나먼 하늘의 땅을 바라보는 지도 몰랐다.

" 미안하구나..."

한참동안을 그렇게 조용한 시선으로 어딘가를 바라보던 그녀는 온화한 울림

을 담은 목소리로 카이엔에게 말을 건넸다. 그리고 그녀는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 카이엔을 응시했다. 놀랄 만큼 단정하고 부드러운 얼굴이 카이엔의 눈

안에 들어찼다. 아무런 치장을 하지 않았음에도 하얗고 고운 용모를 간직한

그녀는 카이엔에게 자신의 그런 외모를 물려주었다. 얼굴을 한번이라도 대

한 적이 있는 이들에게는 온화함으로 기억될 그녀의 얼굴에는 몇 년전부터

그림자처럼 굳어진 희미한 슬픔이 배어 있었다.

" ......아버지가 그리우세요?"

카이엔의 물음에 그녀는 엷은 미소만을 떠올려 답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미소는 아름다웠지만 그것은 보는 이에게 처연함을 전해주는 아

름다움이었다.

카이엔은 항상 먼 곳만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되돌리고 싶

었다. 분명 아버지의 부재에서 연유했을 어머니의 텅빈 미소를 더 이상 보

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강한 바램의 한 구석에서 이미 깨닫고 있었다.

결코 자신의 힘으로는 그 어떤 것도 되돌릴 수 없음을. 입에서 피를 토해내

며 스러져간, 영원한 안식의 땅 영계에서 편히 잠들어 있을 아버지를 되살

릴 방도도. 더 이상은 마음 가득 채워질 정도로 온화한 미소를 짓던 어머니

를 볼 수 없을 거라는 사실도 카이엔은 알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카이엔은 더 이상 나이에 맞는 얼굴을 가질 수 없었다. 열 여덟의 나이에는

어울리지 않는 삶의 무게가 조금씩 카이엔의 어깨에 내려앉고 있었다.

어머니는 카이엔이 가슴 아프게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또

다시 텅빈 미소를 떠올렸다.

" 식사를 해야지. 카이엔."

어느새 어머니의 얼굴로 되돌아온 그녀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연한 옥

색의 광목에 감싸인 그녀의 몸은 예전에 비해 확실히 마른 것처럼 보였다.

카이엔은 그녀가 걸음을 옮겨 부엌으로 들어서는 것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

었다.

" 어머니......."

어머니는 자신의 변화를 깨닫지 못했다. 그녀만이 가지고 있던 의연함이 망

연한 공허로 바뀌었다는 사실도, 지금의 자신이 더  이상 예전의 그녀가 아

니라는 사실도 그녀는 깨닫지 못했다.

조금 전에 어머니가 바라보던  먼 곳을 카이엔도 바라보았다.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것은 높고 높은 푸른 하늘과 몇  개의 조각구름이 전부였다. 어머

니는 대체 무엇을 보고 있었던  것일까. 아버지가 쉬고 있을  영계? 그렇지

않으면 아버지와 보냈던 시간들을 되새기고 있었을까.  카이엔은 고개를 저

었다. 자신이 그녀의 아들이듯이 그녀도 자신의 어머니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아무리 이해하고 싶어도 자신은 어머니의  전부를 알 수 없

다.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직접 함께  지었다던 이 집은 조금씩 세월의  변화를

보여주듯 연한 빛깔로 퇴색되어 가고 있었다. 두 그루의 감나무가 자리하고

있는 작은 안마당과 무릎까지 오는 낮은 싸리나무 울타리. 그리고 방 세 칸

짜리의 초가집. 손때가 묻어 곳곳에 검은 얼룩이 배어있는 툇마루에서 몸을

일으키며 카이엔은 다시 두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높은 하늘을 바라보

았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바람에 흔들렸다. 분명 새하얀 빛깔이었던 문

풍지는 어느새 누렇게 색이  바래 있었다. 카이엔은 잠시  바람에 흔들리는

방문을 응시하다가 등을 돌렸다. 언제나 자신을 조용히 맞이해 주는 장소로

향하는 발걸음은 오늘따라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작은 옹달샘 하나와 한 사람이 편안히 몸을 눕힐 수 있을 정도의 공간.

1년이 가도 사람하나 오지 않는 외진 산 속에서도 나무들로 가리워져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이 장소를 발견한 것은  작은 우연이었다. 가끔 들짐승들만

이 작은 샘에 목을 축이러 올 뿐. 이곳에서라면 하루종일 어느 누구의 방해

도 받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에  잠길 수 있었다. 방해할  이가 없다는 것은

카이엔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곳은 카이엔에게 있어 가장

마음 편한 장소였다.

세상과 유리된 공간. 그리고 그 보다  더 깊은 곳. 멀리서 어렴풋이  자신을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쏴아아.

선선함을 품은 거센 바람이 나뭇가지를 한차례  흔들고 지나갔다. 초여름의

풋풋한 녹음을 가득 담은 바람은 가만히 손을 내뻗어 자신을 만지려던 카이

엔을 조롱하듯 쉽게 손안에서 빠져나가 버렸다. 단지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행동만을 계속하며 녹색의 풀 위에 누워서 하늘을 바라본지 얼마나  되었을

까. 푸른빛으로 물들어 있던 하늘은 어느새 깊은  어둠으로 물들어 검게 변

해 있었다. 그 속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별의 조각들이 마치 몽롱한 꿈처럼

희미하게 빛났다. 그와 함께 은근히 달아올라 있던  땅의 열기가 조금씩 밤

의 서늘함과 맞물려 식어가고 있었다.

하루종일 아무 것도 먹지 않았지만 배가 고프지는 않았다. 하지만 공복감 대

신 가슴속을 채우고 있는 것은 점점 무게를 더해 가는 고독이었다. 점점 범

위를 넓혀가고 있는 어머니와의 단절.  그리고 사람들과의 단절. 이제  다른

사람을 만나더라도 입술을 움직여 말을 걸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일부러 멀리 떨어진 마을로 내려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 속에 들어갈 생

각은  없다. 그들이 이방인을 낯설어  하듯이 자신도 그들의  생기에  가득

찬 시선을 낯설게 느낄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가

진 무언가를 바라보며 하루하루를 바쁘게 살아갔다.  누군가는 농사를 지으

며,  누군가는 물건을 팔면서, 또 다른 누군가는 어딘 가로 걸음을 옮기면서.

언젠가 보았던 마을의 광경은 카이엔에게 그렇게 깊이 다가왔었다. 결코 다

가서지 못할 두터운 벽과 함께. 세상은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  움직이는 세

상 속에서 카이엔은 정지되어 있었다. 태어났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한결

같이.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자신이 함께 있던 그 10년간의  시간만이 그

정체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유일하게 빛을 내며 움직이던 유일한 것이었다.

눈을 감아도 잠이 오지는 않았다. 그럴 마음은  들지 않았지만 이제는 어머

니와 단 둘뿐인 초가로 돌아가야 한다. 분명  어머니는 언제나 처럼 툇마루

에 앉아서 밤하늘을 보며 먼 곳을 그리워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이곳에

서 하루를 보내듯이 어머니는 그렇게 결코 되돌아오지 않을 무엇을  그리워

하고 또 그리워하며 후회로 채워갈 것이다.

한줄기의 바람이 긴 꼬리를 물고 떨어져 내리는 유성과 함께 카이엔을 스치

고 지나갔다.

==============================================================

음.. 회사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완전히. 그래도 얼마간은 다음사람한테 인수

인계해야할테니 나가야하지만... 그만두자마자 바로 코믹월드로 가야해요.

그쪽에서 직원으로 오라고 ^^; 반년동안 아르바이트 했었기 때문에 바로 오라고

하는군요. 제 적성에는 역시 이벤트가 맞는 것 같아요.

뭔가 속이 시원한 기분.

요즘은 글 쓰는데 갑자기 속도가 붙었습니다. 슬럼프가 오기전에 빨리 써야지

^-^

[번  호] 7026 / 7153      [등록일] 2000년 03월 09일 23:52      Page : 1 / 10

[등록자] 까망포키         [조  회] 115 건

[제  목] [흑룡의 숲 2부] 연(緣)... - 5 -

───────────────────────────────────────

< 흑룡의 숲 제 2부 >

연(緣)...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