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장. 黑 (그림자의 끝에서)
二.
" 카이엔."
고개를 돌려 바라본 어머니의 모습은 놀랄 만큼 달라져 있었다. 모양 좋게
틀어 올린 머리카락에는 밝은 빛을 뿌리는 금색의 용잠이 꽂혀 있었고, 그녀
가 입고 있는 옷 역시 평소의 수수한 광목이 아닌 화려한 문양이 수놓아진
비단이었다.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던 어머니의 이러한 모습은 카이엔의 마
음에 작은 혼란을 일으켰다. 어머니가 자신이 모르는 다른 누군가로 변해버
린듯한 기분이 들었기에.
한번도 물은 적은 없었지만 카이엔은 자신의 아버지도 그리고 어머니도 이
런 깊은 산 속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집을 짓고 살아갈 만한 인물들이 아니라
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슨 이유 때문에 외부의 다른 누구의 방문을 꺼려해
서 이런 깊은 산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확신할 수
는 없지만 그것은 분명 자신이 알지 못하고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신분이
관계되어 있을 것이다. 항상 병색으로 인해 초췌한 표정을 떠올리고 있기는
했지만 아버지의 몸에서는 결코 지울 수 없는 기품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를,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 음
식을 만들던 어머니의 손은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매끄럽고 고왔다.
하지만 물을 수는 없었다. 정확하게 꼬집어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묻고 싶
다는 마음 한편에 물어서는 안 된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
것보다 지금까지의 삶에 있어 부모님의 신분으로 인해 득을 본 일도 그렇다
고 손해를 본 일도 없었기 때문에 일부러 그 일을 끄집어 낼 필요는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도 이유중의 하나였다.
부모님은 어쩌면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혼인한 후 이곳으로 도피해왔을
수도 있고, 지병이 있던 아버지를 편안하고 조용한 곳에서 지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일부러 한적한 곳을 찾아온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단
지 짐작일 뿐 진실을 알고 있는 것은 어머니와 이제는 세상에 없는 아버지
뿐이었다.
" 카이엔.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지금 만큼은 어머니의 얼굴에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던 아버지로부터 연유
한 슬픔이 완전하게 사라져 있었기에 카이엔은 가슴속에 피어오른 의문과
혼란을 지운 채 그녀의 단 하나뿐인 아들이 되어 그녀를 응시했다.
" 네 아버지의 이름은 진 류선이라고 한다. 지금까지 네게 아버지의 일
을 말한 적이 없던 까닭은 그가 1품의 벼슬에 올라있는 진씨 가문의 3대독자
였기 때문이다. 비록 지병이 있기는 했지만 그는 주위의 많은 기대를 받고
있었고 그 기대에 충분히 부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것들이 부담
스러웠다. 자신을 향한 많은 이들의 시선도 염려하는 말과 걱정어린 얼굴.
그 모든 것이."
아주 어렸을 무렵 카이엔은 아버지에게 글을 배웠다. 집안에 있는 책들은
그리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아버지는 그 책들이 닳고닳아 색이 바랠 때까지
책장을 넘기며 탐독했고, 그것을 카이엔에게 가르쳐 주었다. 자상한 목소리
로 카이엔의 궁금증을 하나하나 풀어주던 아버지는 훌륭한 선생이었다.
언젠가 아버지의 이름이 무엇인지 물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아버지는 성은
이야기하지 않은 채 이름만을 말해주었다. 그리고 왜 자신과 이름을 쓰는
법이 다르냐는 자신의 질문에 아버지는 웃음을 지으며 답해주었다. 그것은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지었기 때문이라고. 보통 이름을 지을 때는 아버지쪽
의 성을 물려받거나 이름을 따르기 마련이었지만 아버지는 무엇 때문인지 그
렇게 하지 않았다.
- 그것은 네 어머니를 생각하는 내 마음을 담은 것이란다.
그 때도 지금도 아버지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이름을
짓는 간단한 일일뿐인데도 그 말을 꺼냈던 아버지는 분명 행복에 차 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 그리고 그토록 큰 무게에 짓눌려 있었지만 그는 아무 말 없이 나와 함께
나와 주었지. 자신에게 속한 모든 것을 버리고. 오히려 날 만나게 되어 다행
이라고 하면서... 그와 함께 지냈던 12년의 시간은 정말 행복했다. 그 어떤
것도 떠올리지 않아도 되었고 어떤 것도 거리낄 것이 없었지. 그와 나. 그리
고 네가 있었으니까."
그녀는 무척이나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현명하고 사려 깊은 아내
의 얼굴을 한 채.
" 하지만 나는 항상 알고 있었다. 내 마음속에는 과거에 연결되어 있는
끊을 수 없는 긴 줄이 남아 있음을. 그리고 그것은 그가 가지고 있던 병으
로 인해 항상 조마조마 해야했던 시간이 지나버린 지금. 날 다시 얽매이게
하는구나."
어머니는 손을 내밀어 카이엔의 손을 잡았다. 따스한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져왔다. 정말 오랜만에 서로의 온기를 확인한 두 모자는 동시에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떠올렸다.
" 네 이름을 부를 때마다 그가 내게 해주었던 배려가 되살아난다. 비록 내
바램대로 그의 성을 잇지는 못했지만 난 만족하고 있단다. 그도 분명 그랬
을거야."
그녀는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조금씩 물기가 배어나
오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나지막한 한숨.
" 한마디도 해주지 않는구나. 넌 어릴 때부터 말이 없는 아이였지..."
카이엔 자신도 무언가 말을 꺼내야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마음처럼
입술이 움직여주지 않았다. 완벽하게 달라진 어머니의 모습을 본 그 순간부
터 카이엔의 입술은 얼어붙은 것처럼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카이엔은 어머니의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를 다시 한번 확인하며 가볍게 고
개를 저었다.
" 그래. 그렇구나."
사실은 지금 왜 그렇게 좋은 옷을 입고 있는지, 왜 지금까지 한번도 들려주
이 않았던 과거의 이야기를 꺼내는지, 왜 이렇게 달라진 어머니를 바라보는
것이 불안한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굳어져버린 입술은 자신의 의지대로 움
직이려 하지 않았다.
" 식사를 준비했다. 요즘은 통 먹지를 않더구나."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고는 카이엔과 마주잡고 있던 손을 풀었다. 온몸에 퍼
져가던 온기가 희미한 향기만을 남기고 다시 떠나갔다.
짙어져가는 녹음(綠陰)이 숲에 음영을 만들어내며 사락거리는 움직임을 보
였다. 그리고 찢어질 듯이 높게 울려 퍼지는 매미 울음소리가 귓가에 파고
들어왔다. 그렇게 계절은 한여름의 속으로 깊게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탁하는 소리와 함께 작은 상이 툇마루 위에 놓였다. 김이 피어오르고 있는
흰쌀밥 두공기와 나물, 소채. 그리고 물 두잔이 상위에 놓인 채 주인을 기
다리고 있었다. 무척 간소한 차림이었지만 카이엔에게는 익숙한 것이었다.
" 먹도록 하자."
어머니는 카이엔의 맞은편에 앉아서 숟가락을 집어들었다. 카이엔은 고운
옷을 차려입은 어머니에게 왠지 지루할 정도로 한적한 집과 이 소박한 음식
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산나물은 싱거웠다. 약간의 소금 이외에는 다른 어떤 간도 하지 않는 어머
니다운 음식이었다.
" 미안하구나...."
대체 무엇에 대한 사과인지도 모를 그 말을 어머니는 며칠째 반복하고 있
었다. 지금까지는 어머니의 그 말에 대해 대꾸 한번 하지 않았지만 오늘 만
큼은 저절로 입술이 움직이고 있었다.
" 괜찮아요."
무엇에 대한 사과이며 무엇에 대한 대답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렇게 말하
고 싶었기에 카이엔은 어머니의 눈을 직시하며 대답했다.
날이 밝았다. 이른 아침의 희뿌연 안개 속에서 눈을 뜬 카이엔은 직감적으
로 무언가 달라졌다는 것을 느꼈다. 말을 많이 하지 않는 대신 다른 감각이
발달한 것인지도 모른다. 얇은 홑이불을 걷어내고 일어선 후 카이엔은 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문은 약간의 삐걱거림을 전하며 열렸다. 안마당 가득 들
어찬 안개 속에 감싸인 숲은 평소의 모습과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비밀스
러운 음험함을 흩뿌리는 숲은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듯이 고요했다. 조용
히 그 안개를 바라보던 카이엔은 조심스레 어머니의 방을 향해 걸음을 옮
겼다.
툇마루 위를 일곱 걸음 정도 걸어가면 카이엔의 방과 마찬가지로 바람소리에
발맞추어 삐걱임을 전하는 문이 나온다. 소리가 울리지 않도록 조심스레 걸
음을 옮기고 나서 카이엔은 문고리에 손을 가져갔다.
" 어머니......."
목소리는 안개에 묻혀버렸는지 금새 사그러들었다.
매일매일을 툇마루에 걸터앉아 무언가를 떠올리는 일로 보내는 그녀였지만
아침을 맞이하는 것은 빨랐다. 해가 뜨자마자 일어나는 카이엔보다도 그녀
는 항상 먼저 일어나 있었다. 그런 그녀가 오늘은 안개에 감싸여 있다고는
해도 해가 뜬지 한참이나 지난 지금까지 카이엔을 깨우지 않고 있는 것이었
다. 그리고 피부를 타고 올라오는 여름에 어울리지 않는 희미한 한기가 카
이엔의 기분을 가라앉게 만들었다. 그리고 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선 카이
엔은 잠시 모든 것을 잊은 채 망연한 얼굴이 되었다. 텅빈 방. 어머니가 쓰
던 서랍장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을 뿐 어머니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 어떤 말도 편지 한 장 남기지 않고, 그렇게 어머니는 마치 처음
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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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를 전하오며 ^-^
[번 호] 7055 / 7153 [등록일] 2000년 03월 11일 03:27 Page : 1 / 9
[등록자] 까망포키 [조 회] 121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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