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장. 黑 (그림자의 끝에서)
三.
혼자만의 생활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산에서 자라는 나물이며 열매를 따
기위해 산을 돌아다니기만 해도 어느새 하루의 반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그
리고 마음 편히 자신만의 장소에 앉아서 생각에 잠길 여유도 없었다. 처음에
는 그저 망연함에 잠긴 채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지만 현실을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잊고 생활에 전념해야했다.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그저 자신만의 세상 속에 빠져있다고 여겼던 어머니가 사실은 자신을 위해
여러 가지를 해주었다는 것을 카이엔은 지금에 와서야 깨닫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것을 깨달았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자
신은 혼자이고 이제는 누구와도 말을 나눌 수 없다는 사실은 굳어진 진실이
었다.
한여름의 열기를 품은 후끈한 바람과 오랜 잠에서 깨어 나와 울어대는 매미들
의 향연이 숲속을, 낡은 초옥을. 그리고 카이엔의 가슴을 가득 채워갔다.
"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어...."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카이엔은 어머니가 버릇처럼 중얼거리던 그 말을 그대
로 반복하고 있었다.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어머니가 어떤 마음으로 이 말을
되뇌었을지. 벗어 나려해도 벗어날 수 없는 그리고 지독할 정도로 한적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에. 포
기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거스르지도 않는다. 그저 아래로 아래로 순리에 따
라 흘러가는 물줄기처럼 그렇게 거대한 시간의 강줄기에 묻혀서 떠돌 뿐.
나이보다 한참은 어려보이는 외모와 달리 카이엔의 눈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가라앉은 침잠된 검은색으로 변해갔다. 그 눈을 마주 대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되돌아보게 만들 희미한 우수의 향기를 담은 채.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그저 존재할 뿐인 체념이 담긴 카이엔의 눈은 2년전에 어머니가
그랬듯이 드넓은 하늘을. 그 속에 담긴 눈에 보이지 않는 영상을 쫓고 있었
다. 그 속에는 점점 희미해지는 아버지의 기억과 마지막으로 보았던 어머니
의 아름다운 모습이 떠올랐다. 새하얗게 그대로 하늘 속에 녹아 들어갈 것 같
던 어머니의 얼굴이.
또 다시 혼자가 된 이후 맞이하는 두 번째의 여름이 따갑게 고개를 들고 있
었다.
스무해동안 지내왔던 천성산의 길들은 이제 눈을 감고도 걸을 수 있을 정도
로 익숙해졌다. 어디로 어떻게 가면 샘이 있는지, 맛깔스러운 열매가 열리는
나무가 있는지, 등을 기대고 편히 쉴 수 있는 오래된 노송이 자리하고 있는
지. 그리고 작고 검은 눈망울을 굴리며 나무에서 나무로 뛰어 다니는 들짐
승이 있는지.
발 아래에서 작은 소리와 함께 사그러드는 길다란 풀들을 헤치며 카이엔은
깊은 숲 속으로 들어섰다. 천연의 오지라는 것을 드러내듯 발걸음을 옮길 때
마다 숲은 점점 울창해졌고 나무들의 키도 점점 커져갔다. 그렇게 나뭇가지
로 햇빛마저 가로막힌 깊은 곳까지 들어서면서도 카이엔의 발걸음에는 막힘
이 없었다. 평지를 걸을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숲을 헤쳐가며 카이엔은 자
신이 목적하고 있는 장소로 들어서고 있었다.
벌써 반시진은 걸은 듯 했다. 카이엔의 표정은 처음과 마찬가지로 단정했지
만 이마에는 땀방울이 조금씩 배어 나오고 있었다. 익숙한 길이라고는 해도
더운 여름. 그리고 한낮의 열기는 무시할만한 것이 아니었다.
" 하...."
그리고 나서도 한참을 더 걸어간 끝에 이윽고 카이엔이 가고자 했던 장소가
나타났다. 천성산의 수십 개의 봉우리중 하나인 이곳은 해돋이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했고 산등성이마다 드리워진 운해(雲海)를 볼 수 있는 곳
이기도 했다. 그리고 카이엔이 사흘에 한번 꼴로 찾는 곳.
탁트인 봉우리 위에 올라서자마자 서늘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통과하고 지나
갔다. 덕분에 이마에 배어있던 땀은 금새 식어버렸다.
" 그래도 아직은......."
카이엔은 자신의 귀에밖에 들리지 않을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며 끝없이 펼
쳐진 산줄기와 그 사이사이를 채우고 있는 하얀 구름을. 그리고 진록으로
물든 거대한 봉우리들을 내려다보았다. 산줄기가 끝나는 곳에 깨알처럼 작
게 뭉쳐있는 마을의 정경이 내려다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카이엔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카이엔이 바라보는 것은 단지 막혀있던 가슴을 훤히 뚫어주는
끝이 보이지 않는 대륙의 모습. 그리고 조금 더 가까워진 하늘이었다. 손을
뻗으면 금방이라도 닿을 듯한 푸른색의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푸르게 빛났
다. 분명 저 하늘의 저편에 아버지가 편안히 몸을 눕히고 있을 영원한 안식
의 땅 영계가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그곳에서라면 분명 아버지도 병으로
인해 고통받지 않고 잠을 잘 수 있을 터였다. 피를 연상시키는 붉은 색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깨끗하고 맑은 푸른색의 땅에서 아버지는 미소짓고 있
을 것이 분명했다. 지상에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자신과 그리고 어딘가에서
분명 하늘을 응시하고 있을 어머니에게 나지막하게 웃어주면서.
- 카이엔. 하늘에는 말이다. 영혼의 안식처인 영계와 살아있는 모든 이들
의 수명을 관장하는 옥황상제가 살고 있는 천상계(天上界). 백호, 기린(麒
麟), 봉황(鳳凰)이 살고 있는 환계(幻界). 그리고 사방(四方)을 지키는 맹장
인 용족이 살고 있는 천계(天界)가 있단다.
항상 나직한 울림을 담은 목소리로 말하던 아버지가 어느 날 숲을 흔들고 지
나가는 바람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던 카이엔에게 말을 걸었다. 평소에 아버
지가 가르쳐주던 책자의 내용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었기에 카이엔은 흥미를
느끼며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재촉했다.
- 그래. 그럼 어떤 이야기를 해줄까?
아버지의 질문에 카이엔은 기다렸다는 듯이 용족이라고 답했다. 힘차게 대
답하는 카이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버지는 나지막하게 웃었다.
- 용족은 청룡, 황룡, 홍룡, 백룡, 흑룡. 이렇게 다섯으로 나뉘어지지. 각각
의 용족들은 물과 대지, 불, 바람, 대기의 흐름을 다스린단다. 용족들은 자신
들이 가진 그 자연을 다스리는 힘으로 사계절을 움직이고 또한 사방을 수호
하지.
- 그렇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은 바로 용족들의 힘으로 찾아오
는 거란다.
그 이야기를 들었던 때부터 카이엔의 마음속에는 용족에 대한 동경이 강하
게 자리잡았다. 인간인 자신과는 본질부터 다른 최강의 종족. 계절을 움직이
는 신비한 존재. 평생이 가도 그들의 그림자조차 볼 수 없겠지만 어린 아이
였던 카이엔에게 신화적이고 거대한 용족이라는 이름은 지워지지 않을 각인
처럼 깊게 새겨졌다.
" 용족........"
카이엔의 눈에 비치고 있는 휘어진 산등성이가 마치 거대한 몸을 지상에 눕
히고 있는 청룡처럼 보이고 있었다.
이제 막 인생의 문턱에 들어선 자신. 혼자서 첫발을 내딛어야 할 테지만 아
직은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자신은 계속 무언가를 잃어 오
기만했다. 아버지와의 결별, 어머니의 실종. 그리고 고독한 숲 속의 집에 혼
자 남은 자신. 그러한 외로움 때문에 눈물을 흘릴 자신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직 망설이게 만드는 무언가가 남아 있었다. 언제까지나 이곳에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은 어머니가 사라졌던 그날부터 깨닫고 있었지만 아직은. 아직
은 이 지독한 고요 속에 머무르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벗어날 수 없는지도 몰랐다. 단 셋뿐이었지만 그래도 행복했던 가족의 그림
자가 드리워져 있는 이곳에서. 과거를 회상하며 평생을 보낼 수 있다면 그
렇게 하고싶을 정도로.
골짜기 사이로 거센 바람이 움직였다. 그 여파로 인해 자욱한 안개처럼 산등
성이에 머물고 있던 구름들이 서서히 흩어졌다.
어머니. 몇 번을 불러도 되돌아올 리 없는 이름.
처음부터 아무 것도 이야기해주지 않았지만 그녀는 카이엔에게는 생이 끝날
때까지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남을 것이었다. 흐릿하게 흔들리는 아버지가
영원히 아버지이듯이.
카이엔은 등을 기대고 있던 나무에서 몇 걸음 떨어져서 아득한 먼 곳까지 펼
쳐진 대륙을 응시했다.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을 듯한 광활한 대지는 그
렇게 조용히 가라앉은 채 말없이 누워있었다. 카이엔은 바람에 흩날리는 머
리카락을 손으로 매만지며 천천히 풀밭 위에 앉았다. 촉촉하게 젖어있는 흙
의 감촉이 옷을 통과해 피부에 파고 들어왔다. 그리고 희미하게 올라오는 흙
의 내음. 카이엔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결코 다가설 수 없을 것처럼 한없이 넓고 깊은 하늘과 두 눈에 다 들어차
지않을 만큼 거대한 대륙. 두 개의 거대한 시류(時流)는 언제나처럼 고요히
잠겨 있었다.
늦은 밤이 되어 집으로 돌아갔을 때 툇마루에 앉아있는 낯선 이의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목덜미까지 닿는 잘 손질된 검은 머리카락과 선이 뚜렷한
얼굴. 끊임없는 수련으로 다져진 듯한 다부진 몸이 청색의 무복으로 감싸인
속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나 있었다.
" 이 집의 주인이십니까?"
그렇게 물어온 청년은 카이엔보다 적어도 다섯 살은 위일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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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정말 포지게(?) 놀아보자라는 결심으로... 그동안 열받은 것들 다 풀려고
^^ 3시까지 놀았습니다. 오락실에서 두시간. 노래방 두시간. 호프집 4시간.
음..그리고 커피숍도. 몸치인 제가 DDR 발바닥 4개까지 다 깼지 뭡니까..T^T
뭐든지 열심히하는 사람이 되자. 요즘의 표어입니다. ^-^;
[번 호] 7056 / 7153 [등록일] 2000년 03월 11일 03:28 Page : 1 / 11
[등록자] 까망포키 [조 회] 113 건
[제 목] [흑룡의 숲 2부] 연(緣)... -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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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룡의 숲 제 2부 >
연(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