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장. 花(만개)
그렇게 잊혀지도록
기억 깊은 곳으로 가라앉도록
바라고 또 바랬건만....
그러나 되살아나는 그것은
결코 의지로는 조정할 수 없는
한줄기 기억의 향기
一.
" 명계의 기운은 마주치는 순간 알게 된다고 했었지..."
리시엔은 입술을 움직여 말을 내뱉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보름에 한번 꼴로
내려오게 된 하계는 이제 천계 이상으로 익숙한 장소가 되었다. 천계에 비하
면 오대 원소의 기운이 미약했지만 하계의 기운으로도 충분히 용족들의 힘을
끌어낼 수 있었다.
리시엔은 이제 자유자재로 발휘할 수 있게 된 대부분의 중급주문들과 몇 개의
고급주문을 매일같이 반복해서 연습하고 있었다. 돌풍처럼 휘몰아치는 바람과
땀을 식혀주는 옅은 산들바람. 항상 주위에 있지만 느끼지 못하는 자연의 한
조각을 스스로의 힘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분명 색다른 경험임이 분명했다. 용
족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바람과 가을을 다스리는 자유의 용족 백룡. 백룡족으로 태어난 자신은 진정으
로 자신의 존재를 깨닫고 이해했는가. 리시엔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아직은 아니라고 답했다.
성년식을 치르고 난지 수년. 하루가 멀다하고 찾아온 하계와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된 자신의 힘. 많은 것이 달라졌지만 아직은 자신이 태어난 의미를
찾지 못했다. 그저 막연하게 설레임에 차오른 나날들을 보내고 있을 뿐.
명계란 어떤 곳일까...
리시엔은 주위를 둘러보는 시선을 멈추지 않은 채 생각에 잠겼다. 용족에게
있어서 제대로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유일한 장소라고도 일컬어지는 그곳. 가
라앉은 침묵과 기괴한 동물들이 사는 곳. 그리고 저주받은 자들이 영원이라는
굴레를 쓰고 살아가는 곳. 그곳의 공기에는 온몸의 기운을 빼앗는 독기가 숨
어 있다고 한다. 그것이 리시엔이 알고 있는 명계에 관한 전부였다.
항상 다른 곳을 침범할 기회를 노리고 있는 그들. 그곳에 살고 있는 자들은
천계에서 가장 오래된 자. 두 번의 생명을 살아가는 훼이 조차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랜 시간을 살아왔기 때문에 스스로의 존재를 잊었다고도 했다.
몇 번이고 되살아나고 또 다시 죽음을 맞이하는 육체와 시간의 무게에 견디지
못해 부서져 버린 정신.
나이 많은 이들은 항상 말했다. 가장 주의해야 할 곳은 다른 어느 곳보다 명
계라고. 그러나 그 말이 실감나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지금으로부터 500여년 전. 훼이는 천계까지 넘어와 자신을 위협하던 명계의
주인과 그 부하들을 깊이 상처 입히고 그들의 땅으로 쫓아보냈다. 그때 이후
로 그들은 무엇에 겁을 먹었는지 함부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침묵의 시간이 너무 길었던 것일까. 수백년이 지난 지금 그들은 서서히 그 동
안 준비해온 것들을 풀어놓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생각에 잠겨 걸음을 옮기는 동안 리시엔은 어느새 울창한 숲의 초입에 들어서
있었다.
숲의 내음을 담은 바람이 마치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움직인 것처럼 그녀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 .....!"
눈동자가 마주쳤다.
아무 것도 담지 않은 매끈한 검은색의 눈동자와 미미한 흔들림을 담은 검은색
의 눈동자. 같은 빛이었지만 품고있는 생각은 너무나도 다르다.
먼저 시선을 돌린 것은 리시엔이었다. 이름 모를 상대. 인간에 불과한 상대에
게서 느껴지는 이유 없는 끌림이 불안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자신은 이미 용족과 인간과의 금기를 어겼다. 인간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서는
안 되는 자신이 어떤 이유로든 인간과 마주친 것은 명백한 실수였다.
' 내가 이곳에 온 이유를 생각하자.'
리시엔은 재빨리 자리를 떠야겠다고 생각하고 마음속으로 다른 생각을 떠올렸
다. 오라버니 판유에게서 들었던 사실 때문에 이곳에 오지 않았던가. 그것도
자원해서.
" 요즘 명계쪽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예전의 일로 한
동안 움직이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들에게는 시간이 무의미할 테니
까..."
리시엔도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과거의 사건. 이제는 전설처럼 여겨지는 흑
룡족의 한 사람 때문에 명계는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 그럼, 제가 갈게요."
" 리시엔. 네가..?"
" 염려하시는 거예요. 아니면 절 믿지 못하시는 건가요?"
판유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 하긴.. 어차피 너 혼자만 가는 것도 아니니. 좋을 대로 하도록 해라. 어차
피 내 옆에서 일을 배우겠다고 한 이상."
" 꼭 무언가를 알아내서 돌아올게요."
그렇게 선언한 것이 벌써 언제였던지 잊을 정도로 리시엔은 하계에 내려와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어쩌면 짧은 시간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리시엔이 체감한
시간은 너무나도 길었다. 용족이 속해있는 것은 천계의 시간임에도.
' 누구일까...'
막 발걸음을 옮기려 하던 그 순간. 리시엔은 마음속에서 피어오른 의문 때문
에 잠시 망설였다. 보통의 인간이 저런 눈을 하고 있었던가. 아무 것도 담기지
않은, 그래서 슬퍼 보이기까지 한 눈을.
어쩌면 그 감정은 자신의 착각인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리시엔은 무감동한 검
은 눈동자에서 슬픔을 읽어냈다.
' 하지만 관심을 가져서는 안돼.'
리시엔은 빨리 이 장소에서 벗어나기 위해 걸음을 놀렸다. 주위의 풍경이 점
점 빠르게 뒤로 물러난다고 느꼈을 때 리시엔은 금새 다른 장소에 도착해 있
었다.
" 후...."
엷은 한숨을 뱉어내며 리시엔은 방금 전까지 자신이 머물고 있던 산 중턱의
한 지점을 응시했다.
기이한 울림은 잠시동안 이어지다가 멈추었다.
이름모를 낯선 여인과 눈이 마주친 후 자신의 마음은 평소의 자신이 되지 못
했다. 얼굴은 여전히 아무 것도 떠올리지 않은 채 였지만 마음속은 누군가가
크게 휘저어 놓은 것처럼 끊임없이 흔들렸다.
' 그래.... 그랬었군...'
하지만 잠시 후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바로 며칠 전에도 들었지 않은
가.
" 쿡쿡..."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그들은 자신을 알아채지 못하는데 자신은 그들을 느낀다. 그것도 다 자신의
몸 속에 흐르는 피의 힘인가.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준 생명의 기운 때문일까.
아무래도 좋다.
" 그래... 난 교룡이었지.."
누군가 자신의 말을 들어줄 이도 없는데 말은 계속 이어져나왔다.
" 분명 용족이었어... 용족..."
용족이라는 단어를 내뱉을 때마다 마음속에서 피어오르는 것은 온몸을 태울
듯한 열기였다. 자신에게 이런 저주받은 삶을 살게 만든 것도 그 용족의 피
때문이 아니던가.
처음부터 자신은 아무 것도 몰랐다고 변명해봤지만 결국 그것은 자기 위안도
되지 못했다. 알고 있었다고 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지
금처럼 무너질 듯한 절망의 무게에 허덕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알고 있
었더라면.
성년식을 치른 용족을 이토록 이나 가까이에서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생김새는 하계의 인간들과 별다를 바가 없어 보였지만 몸에서 풍겨 나오는 기
운은 그녀가 보통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분명 보통의 인
간이었다면 그녀의 그런 기운만으로도 위압감을 느꼈으리라.
" 용족....."
작은 되뇌임이 바람을 타고 흘러갔다.
* * *
어째서지...?
리시엔은 며칠이 지나도록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는 인간 남자의 모습 때문에
당혹감을 느끼고 있었다.
처음엔 그저 가까이에서 바라본 인간의 모습이었기 때문에 느끼는 당연한 감
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분명 그 검은 눈동자에 담긴 무감동함과 깊게 가라앉은 슬픔 때문일 것이다.
이토록 자신의 마음이 그 인간에게 향하고 있는 것은.
천계의 용족들과 마찬가지로 익숙한 검은 눈동자였을 뿐인데 그 속에 담긴 것
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침전된 감정의 흔적이었다. 그것도 너무
나 깊고 깊은.
용족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짧은 생을 살아가는 인간이 어째서 그런 눈빛을 가
진 것일까. 리시엔의 의문은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 잊자. 지금은 내게 주어진 일이 있잖아. 어차피 그는 그저 인간일 뿐이야.
나와는 다시 마주칠 일이 없는.'
리시엔은 계속 되뇌었다.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남자의 눈동자를 잊을 수 없
을 것 같았다.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지만 단 한번 마주쳤을 뿐인 검은 눈동자
는 지워지지 않았다.
흔하디 흔한 검은 눈동자였을 뿐인데도...
" 후..."
리시엔은 한숨을 내쉬며 피식 웃었다.
' 어차피 단 한번이야. 이젠 만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을 테니까.. 차차 잊혀
지겠지..'
인간과의 만남을. 관계 자체를 금기시 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도 다른, 그러
나 서로에 대한 이끌림을 내포하고 있는 둘의 존재 때문인지도 모른다. 오랜
시간의 길을 걸어가는 자와 타오르듯 짧은 생을 보내는 자의 이끌림. 꽃이 나
비를 부르듯이 그렇게 둘은 서로를 끌어당기는 것인지도.
" 판유 오라버니...."
리시엔은 다정하게 미소짓는 오라버니의 얼굴을 떠올려보았다.
지금은 분명 보좌관으로서 청룡왕의 집무실에 앉아있을 오라버니의 모습을.
[번 호] 7077 / 7153 [등록일] 2000년 03월 12일 00:00 Page : 1 / 10
[등록자] 까망포키 [조 회] 86 건
[제 목] [흑룡의 숲 2부] 연(緣)... -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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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룡의 숲 제 2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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