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장. 花(만개)
三.
" 인사 올립니다."
옅은 복숭아 색의 궁장을 입고 화려한 머리장식을 한 여인이 방안으로 들어섰
다. 의자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훼이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그
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평소의 그녀가 어떠한 성격인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를 잘 알고 있던
그조차 놀랄 정도로 그녀는 이제 자신이 가지게 될 신분에 걸맞는 모습이 되
어있었다.
" 시령..."
그녀의 뒤를 따라 방안으로 들어선 유안은 조금 당황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 저...백부님."
" 오랜만이다."
훼이는 자신의 방으로 찾아온 유안과 비가 될 백호족 여인 시령을 향해 희미
한 미소를 건네며 말했다.
" 몰라볼 정도로 달라졌구나."
" 저도 여자니까요."
담담하게 감상을 표현하는 훼이에게 시령은 지극히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
다. 늘 하나로 묶고 있던 머리카락을 황금색의 용잠과 뒤꽃이, 그리고 꽃으로
장식하고 옷만 궁장으로 바꾸어 입었을 뿐인데도 시령은 눈에 띄게 달라져 있
었다. 평소에는 그녀의 얼굴이 이렇게 여성스러운지 미처 깨닫지 못했었는데
지금은 어느 누가 보아도 흑룡왕의 비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그녀의 일족이 가진 지나친 자유분방함을 걱정하던 장로들도 지금의 모습을
본다면 그런 걱정은 다 버릴 것이 분명했다.
가늘게 뻗은 눈썹과 맑은 눈동자. 그리고 미려한 얼굴 생김새. 본래부터 품고
있던 우아한 분위기가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 혼인은 보름 후라고 했었지?"
" 네. 백부님."
유안은 시령에게로 향해있던 시선을 훼이에게 돌리며 차분하게 답했다. 푸른
눈동자에 담긴 옅은 설레임은 아직 예전의 어린 후계자였던 시절의 기억을 떠
오르게 만들었다. 늘 훼이에게 찾아와 거침없이 말을 걸고 자신이 원하는 것
을 요구했던 당돌한 아이. 23대 흑룡왕 라이엔의 차분함과는 다른 유안의 활
기는 훼이에게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만들었다. 이제 자신의 동생 라이엔도,
기린족의 황녀이자 흑룡왕비였던 고아한 여인 미하의 모습도 사라지고 지금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것은 그들의 아이인 유안. 그리고 이제 흑룡왕비가
될 시령. 둘이었다.
자신은 이미 두 번의 천년을 살아왔다. 아버지의 죽음과 형제들의 죽음, 아이
의 죽음, 친구의 죽음. 모든 것을 겪은 뒤의 자신은 다시 웃을 수 있었다. 상
처를 이겨내는 것은 결국 마음의 문제였다. 그러나 상처는 아물었어도 상처.
떠올리는 것 만으로도 가슴이 아릿하게 변하는 것은 더욱 긴 시간이 지난다
해도 고쳐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시간이 주는 풍상의 단면이었다.
" 그래. 혼인 선물로 무엇을 주면 좋을까..."
훼이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아무말도 하지 않은 채 벽에 걸린 족자의 한 부
분을 응시했다. 유안은 훼이의 침묵에 동조되어 그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족
자로 눈을 돌렸다. 자신은 알지 못하는 과거 속의 인물을 그린 듯 족자 안에
담긴 것은 낯선 남녀의 모습이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눈에 띄게 수려한 얼굴
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남자와 긴 머리를 하나로 묶고 한 손에 검을 든 여
인. 바람에 날리는 하얀 옷자락과 희미한 미소가 인상적인 여인이었다.
예전부터 훼이의 방에 올때마다 그 그림을 보고 누구인지 묻고 싶었지만 추억
에 잠겨 있는 훼이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에 유안은 일부러 묻지 않았었다.
두 번의 천년이라는 기나긴 시간을 살아오는 동안 그가 겪였을 무수한 일들과
과거의 기억은 자신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임이 분명했다. 각자가 짊어진
세월의 무게는 잴 수 없을 만큼 다른 것이기에.
" 둘에게 잘 어울릴 만한 것이 있는데..."
훼이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둘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리고 잠시 후 방안
에 일렁임이 생겨났다. 그것은 어떤 주문도 없이 공간을 여는 광경이었다. 처
음으로 훼이의 힘을 눈 앞에서 보게 된 시령은 놀람을 숨기지 못하고 유안의
손을 잡았다.
' 저것이 바로...'
시령의 눈은 그렇게 묻고 있었다.
훼이가 연 공간은 사람이 통과할 수 있을 정도의 큰 크기는 아니었다. 상반신
이 드나들 수 있을 정도의 공간. 그 속에 훼이는 손을 넣어 무언가를 꺼냈다.
' 공간을 저렇게 사용하다니...!'
시령의 놀람은 계속 사라지지 않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공간을 여는 술(術)에
관한 지식은 다른 곳으로의 이동을 위해 필요한 문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잴 수 없는 힘을 가진 존재. 훼이는 그것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사용하고 있
었다.
" 자, 내가 주는 선물이다."
훼이가 공간에서 꺼낸 것은 정교하게 만들어진 두 자루의 세검이었다. 화려하
지도 그렇다고 너무 투박하지도 않은 실용적인 모양새.
" 검을 쓰는 것도 꽤 재미있는 일이다. 배워두면 좋을거야."
손에 느껴지는 검의 무게는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았다. 유안은 가만히 손잡이
를 잡았다. 마치 처음부터 자신의 것이었던 것처럼 손에 익은 느낌이 들었다.
겁집을 붙잡고 쓸어내리자 기분좋은 묵직한 감각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져왔
다. 그러던 중 문득 시선이 닿은 곳은 손잡이 부분. 그곳에는 섬세하고 아름다
운 필체로 누군가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 비....."
유안은 천천히 그 이름을 읽었다. 그리고나서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어 훼이
를 바라보았다. 순간적으로 떠오른 무언가를 묻기 위해서.
" 백부님.. 이건.."
훼이는 자신에게 향해있는 두 개의 시선을 담담히 마주대하며 웃었다.
" 내 아들의 검이었다. 그리고 시령에게 준 것은 오래된 친구의 검이지. 사
용하지 않고 남겨두는 것 보다는 쓰는 것이 더 좋은 일이니 말이다."
유안도, 그리고 시령도 알고 있었다. 훼이의 과거에 남아있는 가라앉은 잔해
를. 인간의 여인을 사랑했고 그로인해 많은 것을 잃었던 훼이. 그럼에도 불구
하고 그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 인간 여인과의 사랑이. 잃어버린
아들과의 과거가 지금의 훼이를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친 혈육을 잃는다는
것은 그것이 어떤 상황이건 간에 슬픈 일임에 틀림없다. 수명을 다하고 죽음
을 맞이했거나, 불의의 사고나 병으로 목숨을 잃었거나, 죽음이 가진 무게는
동일하게 슬픔이라는 빛깔로 채색되는 것이다.
" 감사히 받겠습니다."
시령은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유안역시 뒤늦게 말을 꺼냈다.
" 감사합니다. 백부님..."
" 그래..."
지금의 훼이가 어떤 심정일지. 얼굴에 담긴 것은 희미한 미소였지만 분명 그
의 마음속에는 과거의 파편이 날카로운 조각이 되어 되살아 나고 있을지도 모
르는 일이었다.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오른 짙푸른 빛깔의 나무들.
오랜 옛날부터 존재해온 숲은 아주 미미한 햇살 이외의 것은 받아들이지 않은
채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그 언제였던가. 처음 이 숲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그때는 죽음을 맞이하는 그
순간까지 이 공간을 빠져나가지 않겠노라고 결심했었다. 더 이상 자신의 존재
가 나타난다면 어떤 일이 생겨날지 모른다는 자책감아닌 자책감이 사고를 지
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힘으로 경외의 대상이 되었던 그것으로 모든 것을 막아내지 못했
다. 소중한 이들이 하나둘 떠나가는 것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자신. 그리
고 자신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목숨. 잊혀지는 것이 최선이라 여겼었다.
자신의 기억속에 잠겨있는 추억들이 다른이들에게는 잊혀진 영상이 되었듯이
자신역시 그렇게 깊은 숲에 묻혀 잊혀지길 바랬었다.
그러나 시간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흐름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가슴아픈
기억도, 현실도, 미래도. 모든 것을.
이제 자신은 더 이상 숲속에 묻힌 과거의 존재가 아니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수명부를 없애고, 소중한 이들을 과거의 한편에 묻어두고 길을 걸어나간다. 언
제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는 미래로 향한 길을.
훼이는 어딘지 모르게 공허한 느낌을 자아내는 미소를 입가에 매단 채 숲을
거닐었다.
흑룡의 숲. 자신의 존재를 인간들이 믿는 전설처럼 여기는 용족들이 붙인 이
름. 용족에게 주어진 천년이라는 시간을 뛰어넘은 자신. 두 번의 천년을 보내
는 동안 그 삼분지 이는 과거를 새롭게 받아들이는 것에 나머지 삼분지 일은
새로운 길을 찾아내는 것에 썼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시간은 무엇에 써야 할
것인가. 마음은 예전과 달리 가라앉았어도 가슴속에 생겨난 구멍은 메꾸어지
질 않는다.
훼이는 조용히 걸음을 멈추고 희미한 빛이 새어들어오는 하늘을 응시했다. 옅
은 푸른색으로 감싸인 하늘. 문득 저 푸른 공간을 헤엄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었다.
" 그랬었지...."
훼이는 미미한 씁쓸함이 담긴 웃음을 지으며 두 손에서 힘을 빼고 눈을 감았
다. 그리고 생각했다. 드넓은 창공을 누비는 해방감을. 전신을 스쳐지나가는
바람의 상쾌함을. 그러자 몸 속에서 폭발할 듯한 기운이 빠져나와 전신을 감
쌌다. 암흑처럼 검은 빛도, 그렇다고 속이 비칠 정도의 연한 묵빛도 아닌 불투
명한 검은색의 구름이 훼이의 전신을 감싸며 점점 크게 변모했다.
파앗.
그리고 어느순간. 훼이의 몸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울창한 녹음을 헤치며
하늘로 솟아오르는 거대한 흑룡의 모습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머리
위에 솟아오른 두 개의 뿔과 밤하늘이 보이는 그것처럼 빨려들어갈 듯한 어둠
의 빛을 머금은 비늘. 길고 날렵한 유선형의 몸체가 끝없이 하늘로 솟아 올랐
다.
펄럭.
그리고 긴 몸체에 자리하고 있는 한쌍의 날개. 한껏 바람을 머금은 채 펼쳐져
있는 그것은 분명 날개였다.
누군가 그 모습을 보았다면 자신의 눈을 의심하리라. 용이라는 경이스러운 생
명체가 모습을 드러낸데다 등에 날개를 달고 있는 모습을 보면 자신의 눈을
비비며 꿈이라고 여길 것이었다. 아무리 용족이라고 해도 그것을 보면 분명
그같은 행동을 할 것이다. 백호족과 달리 용족은 진신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
다. 그러나 연륜있는 자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천년의 수명을 뛰어넘어 수천년을 산 용은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탄생한다고.
그것은 분명 응룡( 龍)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번 호] 7110 / 7153 [등록일] 2000년 03월 13일 00:55 Page : 1 / 10
[등록자] 까망포키 [조 회] 71 건
[제 목] [흑룡의 숲 2부] 연(緣)... -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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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룡의 숲 제 2부 >
연(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