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장. 靑 (초여름의 바람)
二.
서늘한 아침 공기가 문풍지 사이를 뚫고 방안으로 밀려들어왔다. 도수는 항
상 몸을 눕히고 있던 익숙한 이부자리가 아닌 조금은 뻣뻣한 감촉을 전해주
는 낡은 이불의 감촉을 느끼며 눈을 떴다. 깊은 산 속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아침 공기는 다른 곳에 비해 더욱 서늘하게 느껴졌다. 막 여름의 문턱에 들
어섰음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봄의 여력을 품고 있는 듯 공기는 한산한 바람
을 머금고 흘렀다.
잘 맞지 않는 문은 엷은 바람을 방안으로 들여보내며 조금씩 삐걱이는 소리
를 토해냈다. 그 지나칠 정도의 한산함은 도수에게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
오르게 만들었다. 명문가의 자제이기는 했지만 그에게는 다른 집안의 아들
처럼 모든 것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에게는 가문의 이름에 걸맞는 자리를
얻기 위한 투쟁으로 점철된 나날들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름뿐인
명문인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그는 식사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모든 시간 동안을 단련에만 쏟아 부었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주어지던 유
일한 휴식의 시간은 깊은 어둠이 내려앉은 밤. 그 시간뿐이었다. 그리고 어
둠이 깊은 무게로 내려앉은 고요 속에서 그는 비로소 진정한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떤 목적도 없이 필요에 의한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되는 태
어났을 때 그대로의 자신이. 그리고 지금의 이 낮은 바람소리만을 내포한
고요함은 그런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굳이 어린 시절이
라고 한정할 수도 없는 지금까지의 일상.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자신
이 달라질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아무런 특별한 것도 없
을 것 같았던 이런 깊은 산 속에 자신의 흥미를 끌만한 존재가 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쉴 수 있었던 유일한 시간을 되살리게 만드는 작은 연결고리
가 있다는 것. 그 두 가지의 이유만으로도 도수는 편안하게 웃을 수 있었다.
끼익.
문에 손을 대자 또 다시 삐걱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것은 귀에
거슬리는 소음은 아니었다.
아직 서늘한 새벽 안개가 머물다간 흔적이 툇마루에 남아있었다. 맨발로 갈
색의 매끈한 나무를 디디자 그 서늘함이 발끝을 타고 올라와 조금이지만
남아있던 잠의 여운을 확실하게 몰아냈다.
고개를 들자 아스라한 새벽의 어둑어둑한 공기를 거두어내며 여명이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 녹아든 듯이 몸을 세우고 있는 한 존재가
등을 돌린 채 조용히 먼동이 터오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의외였다. 무반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그리고 지금까지도 습관처럼 굳
어져 새벽에 눈을 뜨고 그 속에서 굳어진 몸을 풀던 자신이었는데 그런 자
신보다도 먼저 카이엔은 일어나 있었다.
" 일찍 일어나시는 군요."
카이엔이 자신보다 나이가 어리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말을
낮출 기분은 들지 않았다. 자신이 가진 지위 정도라면 보통 사람들에게는
말을 낮춘다고 해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질 텐데도 도수는 그렇게 하지 않았
다. 어쩌면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를 가진 카이엔이 도수에게 그런
느낌을 가지게 하는지도 몰랐다.
" 아... 습관일 뿐입니다."
카이엔은 짧게 답하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이 태연한 표정. 그리고 태연한 움직임. 이 지나칠 정도의 고요함이 카이엔
에게 태연함을 건네준 것일까. 절제된 움직임을 보이는 카이엔이 더 이상은
평범한 인물로 보이지 않고 있었다.
한동안 이른 새벽의 안개가 물러나는 광경을 보고 있던 도수는 문득 귀에
들어차는 조용한 음성을 잡아내었다.
" 길잡이가 필요 하시다고 하셨지요."
나이답지 않은 차분함을 지닌 목소리로 카이엔은 말을 건넸다.
" 받아들여 주시는 겁니까."
조금은 의외라고 생각했다. 거절을 한다해도 카이엔에게서 풍겨오는 분위기
는 그것을 당연하게 만들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카이엔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짧게 답하고 나서 카이엔은 조용히 먼동이 터 오는 광경을 응시했다. 어머니
가 떠나고 난 이후로 어떤 변화도 존재하지 않은 이 생활 속에서 카이엔은
작은 변화를 구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지금의 자신은 그 어떤 것도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지 않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자신이 무엇을 해야할 지
어떻게 될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이대로 영원히 이곳에 머물 수 없다는 것
만은 잘 알고 있다.
찬란한 햇살이 눈을 찌르며 저 아래의 어딘가 에서부터 솟아오르고 있었다.
카이엔은 눈부신 광휘를 견디지 못하고 눈을 살며시 감았다.
돌아가는 길은 처음과 달리 무척 발걸음이 가볍게 느껴졌다. 확실한 안내자
를 구한 것도 그렇지만 자신의 관심을 끌만한 누군가가 생겼다는 사실 역시
무척이나 그의 마음을 고무시켰다. 이런 일은 정말 오랜만이다. 삶 속에서
자신 이외의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힘찬 걸음으로 빠르게 산을 타 내려가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몸은 땀으로 젖
어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금새 산바람으로 씻겨 나가버렸고 도수는 다시 발
을 내딛었다.
사흘의 시간은 금새 지나가고 황제는 천성산을 사냥터로 선포하였다. 보통
때라면 너른 들판에서 노루나 작은 산짐승을 잡는 것으로 며칠을 보냈겠지
만 이번은 조금 달랐다. 무슨 생각에서인지 황제는 깊은 산 속에 살고 있는
호랑이를 잡겠다고 말한 것이다. 다른 황제들에 비하여 무(武)에 강한 황제
였지만 이번의 사냥은 보통 때의 그가 보여준 일면과는 조금 상반되는 점이
있었다. 무를 숭상하는 황제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그는 무척 대범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깊은 것까지 생각하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마음
이 내키는 대로 움직이며 행동할 뿐. 백성들의 큰 원성을 사지도 않았지만
성군이라는 칭호도 받지 못한 그는 그저 보통의 황제에 불과했다.
" 이곳인가..."
검고 늘씬한 자태를 뿜어내는 흑마 위에 올라탄 강인한 인상의 황제는 천성
산의 초입에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막 여름으로 들어선 천성산의 깊고
울창한 숲은 한껏 신록의 푸른빛을 내뿜으며 온 산을 싱그러운 향기로 가
득 채워놓았다. 이따금씩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는 잔가지와 나뭇잎에서
풍겨 나오는 숲이 가진 향기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풀어주는 특이한 기
운을 가진 것 같았다.
" 듣던 대로 무척 울창하군. 이곳이라면 분명 맹수의 왕이 살고 있겠지."
황제는 강한 힘이 담긴 시선으로 산을 둘러보며 자신의 양옆에서 조용히 말
을 달리고 있는 도수와 중년의 무반에게 말했다.
" 분명 안내자가 황제께서 원하시는 곳으로 길을 열어줄 것입니다."
황제의 사냥에 동원된 인원은 모두 오십 명으로 황제의 위세를 생각한다면
무척 적은 숫자다. 그러나 황제는 자신의 힘을 믿는 것인지 항상 오십이 넒
는 숫자를 움직이는 법이 없었다.
도수는 여린 인상과는 반대로 어떤 것에도 꺾이지 않을 만큼 깊은 표정을
가진 카이엔을 떠올렸다. 보통 사람의 이름과는 조금 다른 그의 이름과 나
이에 어울리지 않는 그의 태도. 마치 시간을 달관한 자가 보여주는 나른함
과 여유처럼 카이엔은 특이한 기운을 풍겨내고 있었다.
' 조금 늦어지는 게 아닐까.'
아직 카이엔과 약속한 오시(午時-오전 11시에서 오후1시)가 되지는 않았지
만 도수는 황제를 기다리게 만들 수 없다는 생각에 먼저 앞서 나가 카이엔
의 행방을 알아보려 했다. 그리고 그것을 막 행동으로 옮기려던 순간 카이
엔은 마치 기다렸다는 것처럼 정돈된 걸음걸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평평한
소매의 흰옷을 걸치고 있는 카이엔은 별다른 표정을 떠올리지 않은 채 황
제에게 고개를 숙였다. 지난번 그가 입고 있던 평범한 옷보다는 조금 더 산
행에 편한 옷을 입은 듯 했지만 험한 산을 안내할 사람의 복장으로는 보이
지 않았다. 짙은 청색의 무복으로 몸을 감싸고 있는 황제의 일행과 극히 대
조되는 모습이었다.
" 카이엔이라 합니다."
숙였던 고개를 들어올리며 카이엔은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목소리로 자
신을 소개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높은 신분의 인물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위축되거나 하지는 않았다. 옷이 조금 화려하고 얼굴에 떠오른 표정이 권위
적일 뿐 그도 보통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황제는 자신에게 인사를 건넨 카이엔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얼마 지
나지 않아 몇 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 천성산에서 오랫동안 살았다고 들었네만 호랑이를 본 적이 있나."
당연히 사냥이라고 하면 산에 살고 있는 동물을 잡기 위한 것이라는 게 뻔
함에도 불구하고 카이엔은 황제의 입에서 나온 호랑이라는 말에 잠시 의외
라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얼굴에 드러나지 않았다.
" 물론 있습니다.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면 호랑이가 살고 있는 굴이 몇
개 있습니다."
" 좋다. 그렇다면 그곳으로 안내하도록."
별다른 말없이 카이엔은 그의 말에 수긍하고는 높이 솟은 산봉우리로 시선
을 던졌다. 그리고 나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 이곳부터는 말이 다니기 힘든 곳입니다."
카이엔은 길을 안내하기 전에 우선 한곳에 말을 묶어둘 것을 권했다. 그러
자 도수의 옆에 있던 중년의 무반이 말에서 내리며 몇몇에게 지시를 내렸
다. 이곳에 황제가 기거할 막사를 짓고 말을 묶어두라는 것이었는데 막사를
짓기에는 조금 험한 곳이었지만 카이엔은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고 그들이 준
비를 마치기만을 기다렸다. 그들처럼 전쟁이나 기타 다른 경험이 많은 자들이
니 만큼 알아서 잘 처리할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조용히 병사들이 움직이는 모습을 바라보던 카이엔의 눈에 부지런히 몸을 움
직이며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도수의 모습이 들어왔다. 다른 중년의 무반
이 황제의 옆에서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과 반대로 도수는 무언가 자
신이 해야할 일을 찾아 돌아다니고 있었다.
' 성실한 성격이로군...'
그렇게 카이엔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보이지 않은 채 도수가 움직이는 모습
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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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라고는 동물원과 사진으로 본 것이 다인 제가.... 이런 장면을..하핫
요즘은 전투씬 보강을 위해 무협 비디오를, 생생한 묘사를 위해 동물의 소리
씨디를...^^; 전원일기까지 보고 있습니다.
잘 되면 좋겠어요.
[번 호] 6903 / 7360 [등록일] 2000년 03월 14일 00:02 Page : 1 / 11
[등록자] 까망포키 [조 회] 182 건
[제 목] [흑룡의 숲 2부] 연(緣)... - 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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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룡의 숲 제 2부 >
연(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