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장. 靑 (초여름의 바람)
三.
사냥이 시작된 지 사흘째 되는 날.
아침부터 산허리에 자욱히 낀 안개는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짙어
서 카이엔의 뒤를 따르고 있는 황제와 군사들은 애를 먹고 있었다. 아무리
매일같이 수련을 거듭한 자들이라 해도 익숙지 않은 험한 산 속을 헤쳐나가
기란 그리 쉬운 것이 아니었다.
바스락.
숲 사이를 빠져나가면서 나뭇가지를 스치는 소리가 울려 퍼지자 시선이 한곳
으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모두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황제조차 특유의 무덤덤하고 근엄한 표정을 떠올린 채 열심히 발걸음
을 놀렸다.
백수의 왕인 호랑이가 사는 곳은 산 속에서도 가장 험하고 가장 깊은 곳.
지금처럼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도 사실은 그 맹수의 신경을 거스르게
만드는 일이다. 어떤 작은 소리라도 동물들은 민감하게 알아차린다.
마음속의 생각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지만 카이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자신이 해야할 일은 그들을 안내하는 것이다.
지루할 정도의 침묵이 그들 사이에 맴돌고 있었다.
푸드득.
" .......!"
고요한 산 속에 울려 퍼진 새가 날갯짓하는 소리는 모든 이들의 신경을 일깨웠
다. 어느 누구도 소리를 내지는 않았지만 날카롭게 곤두서 있던 신경 때문인
지 표정의 변화는 뚜렷했다.
" 어쩌면 오늘은 힘들지도 모르겠군요."
산에 오르는 동안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걸음만을 옮기던 카이
엔이 처음으로 말을 꺼냈다. 그것도 산에 오르기 시작해서 거의 반나절이나
지난 후에.
" 무슨 이유입니까. 그것은?"
가까이에 있던 도수가 묻자 카이엔은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처음에는 떨어져 내린 나뭇잎과 흙 때문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얼마 지
나지 않아 도수는 어떤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무게감이 있는 무언가가 누
른 듯이 움푹 패인 땅과 둥그스름하게 찍힌 몇 개의 원.
" 발자국?"
" 네. 그것도 얼마 전에 지나간 듯한."
" 역시...그랬군."
" 그렇다면 오늘은 중턱에서 사슴이라도 잡아야겠군.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
아갈 수는 없지. "
갑작스레 그들의 대화에 끼여든 것은 중년의 풍부하고 절제된 음성이었다.
" 내일은 인원을 줄이는 것이 좋겠군. 지금은 너무 많지. 다른 것도 아니고
호랑이를 잡는 일인데 말이야."
그저 한가지의 일만을 밀고 나갈 것 같은 첫인상과 달리 황제는 무척 자유로
운 기질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 아직 늦은 시간은 아닙니다만."
도수와 같은 무반의 지위를 가진 이름 모를 중년 남자가 말을 건네자 황제는
소탈하게 웃어 보였다.
" 하하. 백수의 왕인 호랑이를 잡는 일인데 그리 쉽게 될 거라고 여겼나?
발자국으로 보아하니 오늘은 돌아오지 않을 듯 한데 말이야. 맹수들은 자신의
영역에 누군가가 침범하는 것을 꺼린다고 들었다."
그리고 대답을 기다리는 듯 황제의 시선은 카이엔에게로 향해 있었다.
" 그렇습니다. 분명 오늘은 돌아오지 않겠지요."
카이엔은 그간의 경험대로 황제에게 말을 전했다.
호랑이는 자신이 가진 위명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동물이었다. 사냥을 할
때는 어느 누구보다 재빠르고 용맹하지만 자신의 몸에 위험이 접근하면 작은
초식 동물들보다 더 조심스럽게 행동한다. 그러나 호랑이는 백수의 왕. 아무리
도망칠 수 없는 곳으로 몰아넣었다고 해도 그 이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궁지에 몰린 호랑이를 잡는 것은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다. 자신의 몸 어느 한
곳을 내주겠다는 각오가 없이는 잡기 힘든 것이 바로 호랑이.
" 그렇다면 오늘은 막사로 돌아가 내일을 위해 휴식을 취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니 모두에게 전하도록 해라."
" 예. 폐하."
중년의 무반이 정중하게 답하고 나서 몸을 돌리고 나자 황제의 시선은 카이엔
에게로 옮겨졌다.
" 오늘은 내가 식사를 대접하고 싶은데 어떤가?"
황제의 말은 카이엔의 양해를 담은 것이었지만 그의 얼굴에는 거절이라는 단
어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 영광입니다."
카이엔 역시 어떤 표정의 변화조차 담지 않은 얼굴로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
러자 황제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크게 소리내어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럼 함께 가도록 하지."
카이엔은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황제의 앞으로 나섰다. 사냥이 끝나기 전까지
자신의 신분은 길잡이. 자신에게 주어진 일은 확실히 수행하는 것이 성격인
카이엔은 먼저 길을 헤치며 발걸음을 옮겼다.
" 태어나서 계속 이곳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다른이를 만난 것도 이런 일을
하게 된 것도 이번이 처음입니다."
" 그렇다면 사람을 꺼릴만도 하지..."
황제는 카이엔의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은 어느
새 비워져 있었다.
" 얼굴을 보고는 아직 스물도 되지 않았다고 여겼었는데 내 착각이었군. 게
다가 성격은 그토록 차분하니."
첫인상에 비해 황제는 호탕한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보는 신분도 알 수
없는 길잡이와 함께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정도의 인물이라면
조금은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
카이엔은 술이 담긴 술잔을 손에 든채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황제 전
용으로 지어진 막사는 임시로 쓰는 장소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넓고 호화
롭게 꾸며져 있었다. 마치 궁안에 있는 방과 같이. 그 안에 자리하고 있는 것
은 황제와 도수를 포함한 무반 두명, 그리고 카이엔 자신이었다. 음식은 술 몇
병과 단촐한 안주 몇 가지가 전부였지만 카이엔은 한번도 접해보지 못한 생소
한 음식들이었다. 술 역시 단 한번도 마신 적이 없었기에 카이엔은 망설이고
있었다.
" 어서 들게나. 이 술은 내가 가장 즐겨 마시는 것이지. 길경주라고 하는 술
로 도라지로 담근 술이네."
" 술은 처음 접하는 것이라...."
카이엔이 답하자 황제는 큰소리로 웃었다.
" 지금까지 술을 마시지 못했다니... 그럼 더욱 잘됐군. 내가 오늘 여기서 술
을 가르쳐주지."
카이엔은 황제의 권유에 따라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술잔을 입술에 가져갔다.
술 특유의 향취 이외에 별 다른 향은 나지 않았지만 입술에 닿은 술의 맛은
알싸하면서도 깔끔했다.
혼자만의 삶 속에서는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 이외에는 필요하지
않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다른 이들이라면 무수하게 겪었을 일들
도 카이엔은 생소하고 낯설기만 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과 얼굴을 마주 대
하는 일 역시.
" 이런 인물을 찾아내다니 도수 자네의 안목도 대단하군."
황제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카이엔이 마음에 든 듯했다.
" 작은 우연입니다."
도수는 답하며 웃었다.
" 그럼, 오늘은 그 기념으로라도 거하게 마셔야겠군."
황제는 손수 비어있는 술잔을 채워주었다.
" 내일은 호랑이를 잡을 수 있다는 예감이 드는군."
카이엔은 황제의 말을 들으며 다시 술을 마셨다.
" 처음이라 들었는데 전혀 취하지를 않는군."
술자리를 접은 후 막사를 나서자 어느새 깊은 밤이 되어있었다. 촘촘히 박힌
별들이 보석처럼 빛을 발하는 밤하늘이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처럼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 글쎄요..."
카이엔은 도수의 말을 가볍게 넘기며 여전히 하늘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 내일은 화창한 날이 되겠군."
도수는 하늘 가득 박혀있는 별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별이 환한 것은 다음날
의 날이 맑다는 것을 나타낸다.
" 빨리 사냥이 끝났으면 좋겠군."
도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카이엔의 옆모습을 응시했다.
소년의 그것도. 그렇다고 성인의 그것도 아닌 모호한 생김새를 가지고 있었지
만 그런 외모만이 아니라도 카이엔이 특이하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깊은 산
속에서 다른 곳과 단절된 생활을 해왔음에도 몸에 배인 것은 야인(野人)들과
는 확연히 다른 무엇. 어쩌면 품위라고도 말할 수 있는 절제된 움직임.
" 좋은 성과를 얻을 수 있다면 좋겠지요."
여전히 어딘가로 향한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카이엔은 작게 중얼거렸다.
아직 사냥에서 잡은 것은 사슴 몇 마리 뿐이었지만 모든 이들은 기대감에 부
풀어 있었다. 밤하늘에 가득한 별빛이 마음을 가득 채우듯이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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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아무래도 시간 구성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 제 특기인 듯...^^;
그래도 흑룡의 숲 때보다는 안 복잡하죠. 그때는 저도 복잡하고 읽는 분들도
복잡했었는데...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렇게 장별로 시간전개가 다르다 보
니 유독 어떤 부분만 진도가 잘 나가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중간이 비었
어요... -_-;
하루 두편연재가 제 목표인데 큰일입니다.
[번 호] 6904 / 7360 [등록일] 2000년 03월 14일 00:03 Page : 1 / 10
[등록자] 까망포키 [조 회] 185 건
[제 목] [흑룡의 숲 2부] 연(緣)... - 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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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룡의 숲 제 2부 >
연(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