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장. 靑 (초여름의 바람)
四.
크르릉...
산을 울리는 거대한 포효소리.
카이엔은 상처 입은 야수가 내뿜는 살기가 얼마나 강한 기운인지 처음 알게
되었다.
자신은 호랑이가 포위된 곳에서 상당히 떨어진 거리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호랑이가 내뿜는 강렬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포효하던 호랑이는 갑자기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카이엔은 무수한 인간
들에게 둘러싸인 채 화살이 박힌 앞발을 들고 오연한 시선을 던지는 호랑이를
보며 마음 한 구석에서 일어나는 기이한 감정을 느꼈다. 한때는 숲을 호령하
는 제왕이었지만 이제는 한낮 미물에 불과한 존재로 격하될지라도 가지고 있
는 본연의 태도를 버리지 않는 당당함. 호랑이는 자신의 운명을 알고 최후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비록 목숨을 잃더라도 마지막의 기세는 버리지 않겠
다는 의지를 담은 채.
호랑이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서 있는 것은 도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자리에 황제가 서 있었다. 그는 호랑이의 눈을 노리며 활을 메긴 채
미동도 없이 적당한 때를 노리고 있는 것이었다. 숨막히게 이어지는 침묵과
함께 푸른 풀숲에 몸을 드러내고 있는 상처 입은 호랑이. 거대한 등줄기에 자
리하고 있는 검은색의 선명한 줄무늬가 시선을 잡아끌었다.
항상 그래왔듯이 제왕의 상징은 호랑이. 물론 용이라는 신화적인 생명체가 있
기는 하지만 그것은 단지 전설이나 신화 속의 존재일 뿐. 실재한다고 해도 인
간이 그 모습을 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실재하는 동물 중 가장 윗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호랑이는 제왕. 그 중에서도 황제를 상징하는 동물이
되어있었다.
" 더 이상 털가죽에 상처를 입혀서는 안 된다."
황제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주위의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자
신의 손으로 직접 잡은 흠집하나 없는 호랑이의 털가죽이지 피에 물든 미물의
껍질이 아니다.
소리 없는 공방은 계속 이어졌다.
활시위를 메긴 채 순간적인 틈을 노리고 있는 황제와 자신을 노리는 무수한
시선 속에서 탈출구를, 그것이 안 된다면 최후의 일격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노리는 호랑이의 침묵. 가끔씩 불어오는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만이 숲
속을 메우고 있을 뿐 숨쉬는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는 침묵의 공간에서 두 세
계의 제왕은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 호랑이는 절대 함부로 살생을 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말했었다.
호랑이가 모든 동물들의 상위에 선 이유를. 제왕이라 불리는 까닭을.
" 단지 자신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먹이를 얻기 위해,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영역을 나타내기 위해서만 존재를 드러낼 뿐이다."
카이엔이 호랑이를 본 것은 산 속을 돌아다니며 먹을 만한 풀을 뜯고 있을 때
였다. 아직 다 자란 호랑이는 아니었지만 커다란 개만한 몸집과 날카로운 발
톱을 가진 호랑이와 눈이 마주쳤을 때, 카이엔은 아버지의 말을 이해할 수 있
었다. 가장 우위에 선 자. 관망하는 시선을 가진 자가 가진 무게를.
호랑이는 두 눈에서 푸른 광망을 뿜어내며 도약할 준비를 했다. 순간적으로
뿜어져 나온 호랑이의 살기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기운이었다. 그리
고 황제 역시 활시위를 놓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기다림의 순간은 짧으면서도 길었다. 어느 순간 호랑이의 몸이 하늘에 떠올랐
다고 느꼈을때.
쌔앵.
그와 동시에 황제의 손에 들려있던 화살 역시 활 시위를 떠났다.
크릉.
괴로운 듯이 몸부림치는 호랑이의 거대한 몸집은 황제의 바로 몇 발자국 앞에
서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그 몸짓은 잠시에 불과했다. 정확하게 호랑이의 눈
에 박힌 화살은 얼마 지나지 않아 호랑이의 몸부림을 멈추게 만들었다.
숲 속의 제왕으로 군림하던 당당한 태도의 호랑이는 그렇게 생을 마감했다.
자신과는 다른 또 다른 곳의 제왕에 의해서.
참담한 결말이었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카이엔 뿐인 듯 했다. 병사들은
호랑이가 바닥에 떨어져 내린 그 순간 커다란 환성을 질러댔다.
" 역시 전하의 활 솜씨는 따를 자가 없군요."
황제를 수행해 온 또 다른 중년의 무반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 이것으로 원하던 것을 또 하나 손에 넣었군. 이것처럼 그 땅도 하루빨리
손에 넣어야겠지."
" 물론입니다."
몇 명의 병사들이 호랑이에게 다가가 완전히 숨이 끊어졌나를 확인하고 조심
스레 화살을 뽑고 들고 갈 준비를 마치는 동안 황제는 도수와 중년의 무반과
함께 크게 웃으며 이야기를 교환하고 있었다.
이상했다. 왜 갑자기 가슴 한 구석이 텅 비어버린 듯한 느낌이 드는지. 이 감
정은 어머니가 어느 날 모습을 감추어버렸을 때도 느끼지 못했던 허탈한 상실
감이었다.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잃어버린 채 영원히 되돌아 올 수 없는 길을 떠난
숲의 제왕은 병사들의 손에 의해 운반되고 있었다.
" 수고 많았네. 역시 뭐니뭐니해도 자네의 공이 크지."
언제 다가섰는지 황제는 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카이엔에게 치하하는 말을 전
했다.
"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카이엔은 담담하게 말을 받았지만 가슴속에서는 기이한 공허감이 사라지지 않
은 채 가라앉고 있었다.
거의 산 정상에 올라와 이루어진 호랑이 사냥. 아직 황제가 선포한 사냥터로
서의 날짜가 남아있었지만 황제는 호랑이를 잡은 것에 만족했는지 오늘 돌아
가겠다고 말했다. 단 며칠간의 경험이었지만 많은 이들과 만나고 그들에게 길
을 안내해주며 며칠간 함께 생활했던 카이엔은 희미한 안도감을 느꼈다.
아직은 혼자 있는 것의 익숙함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많은 사람들을 대하는
것은 부담스러운 면이 많았다. 혼자 있을 때는 거의 할 필요 없는 말도 여러
사람들의 앞에서는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게다가 카이엔은 다른 이들과의 대
화에 익숙하지 않았다. 어떤 순간에 어떤 말을 해야하는지 어떤 표정을 지어
야 하는지 난감할 때가 많았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다행히도 카이엔의 표정
이 그다지 많은 변화를 품고 있지 않았기에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드러나지
않았다.
" 황제께서 답례를 하고 싶어하는데."
이제 길잡이의 역할에서 벗어난 카이엔은 조용히 행렬의 맨 뒤에서 걷고 있었
다. 그런 카이엔에게 다가선 것은 도수였다. 시종일관 자신의 일을 묵묵히 수
행하는 도수 역시 이번 사냥의 성과에 만족하는지 활기찬 표정을 떠올리고 있
었다.
" 괜찮습니다."
언제부터인지 말을 놓게 된 도수에게 카이엔은 처음과 마찬가지로 경어를 사
용했다. 도수가 자신보다 나이가 많기도 했지만 어린 시절 아버지의 가르침이
깊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 그냥 받아두는 것이 좋아.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야."
카이엔은 약간의 의아함이 담긴 시선을 도수에게 던졌다.
" 황제께서는 자신의 뜻에 거스르는 자를 가장 싫어하니까.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그것을 제외하면 정말 호탕한 분이시지만."
카이엔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다면... 받아야겠군요. 하지만 산 속의 삶에서 필요한 것은 작은 것에
불과합니다."
" 그냥 기념으로 가지고 있는 것도 좋겠지."
한 동안 둘은 아무 말도 없이 행렬의 맨 뒤를 걸었다. 시선을 앞으로 향하자
중앙에서 자신이 잡은 호랑이를 가리키며 중년의 무반과 이야기를 나누는 황
제의 모습이 보였다.
" 전쟁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카이엔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도수는 잠시 당황했는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얼굴 표정만을 바꾸었다.
" 전쟁이라면 전쟁이라고 말할 수 있지. 대외적으로는 본래 우리의 영토를
되찾는 당연한 일이라고 말하지만."
솔직하게 답하는 도수의 얼굴에는 자신의 어떤 생각도 담겨 있지 않았다.
" 어떤 일이든 내가 할 것은 황제폐하를 지키는 것. 그리고 모든 것을 승리
로 이끄는 것이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도수가 하는 말이 진심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카이엔이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은 투쟁과 전쟁이라는 말이었다. 책으로 읽고
아버지에게 들어서 알고 있지만 무언가를 얻기 위해 싸운다는 감정을 카이엔
은 알지 못했다.
그럴 것이다. 다른 사람이 카이엔을 특이하다고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카이
엔 역시 그랬으니까.
" 후... 이제 이곳에서 소란을 피울 자도 없어졌으니 다시 한적해지겠군."
카이엔은 그의 말에 소리 없는 웃음으로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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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사무실에서 밤을 새고 오늘 아침 11시 경에 잠을 자서 1시가 되기 전에
일어났습니다. 굉장합니다. -_-
잠이 모자름에도 불구하고 쌩쌩한 것 같았지만 오늘은 하루종일 바보짓을 하
고 말았습니다. 이런... 부끄러워라..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의 절을 올리며...
[번 호] 6937 / 7360 [등록일] 2000년 03월 15일 00:08 Page : 1 / 11
[등록자] 까망포키 [조 회] 163 건
[제 목] [흑룡의 숲 2부] 연(緣)... - 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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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룡의 숲 제 2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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