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룡의 숲-82화 (82/130)

제 5장. 窮(막다른 길)

망각의 강은

핏빛 향기와

검은 늪의 침묵으로..

침전된 애상으로

나그네의 발을 묶는다.

一.

잠시동안 내려앉은 침묵의 끝에는 낮은 경탄성과 두려움이 담긴 시선이  있었

다. 자신들이 가지지 못한 힘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과 거부. 그것은  인간이

라면 누구나 가져야할 감정이었지만 그것을 직접 몸으로 느끼고 있는  카이엔

으로서는 달갑지 않았다.

나직하게 해제의 주문을 외치며 천천히  자신이 풀어놓았던 마력을 해제하자

그것은 곧 보통의 바람이 되었다. 조금 전까지  칼날처럼 적들을 파고들던 바

람은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그렇게 사라진 것이다.

자신이 보여준 힘으로 인해 환(晥-하계의 천성산 부근에 자리한 나라. 주위의

나라들을 차례로 치고 가장 큰  땅을 차지한다)을 위협하던 변방의  무리들은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인간이 아닌 자가 가진 절대적

인 힘은 인간을 한낱 인형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저 바람이 날리면 그것

을 타고 날아가는 작은 잎새들처럼 가볍게 그들은 목숨을 떨구었다.

그들은 죽는 순간까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들의 몸을 찢던 날카로

운 바람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왜 그 힘이 자신들의 육신을 찢어놓았는지.

힘은 지난번 보다 더 강해졌다.  다른 이들의 생명이 그에게  준 것은 갈증의

해소만이 아니라 힘을 키우는 역할이었다. 처음에는  그것을 몰랐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몸 안에 담긴 마력이 커져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할 만큼 카이

엔은 둔감하지 않았다.

결국 이렇게 또 한발 멀어지고 말았다.

이제 더 이상 자신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 때도  되었건만

몸은 그것을 이해했어도 마음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 수고했다."

오랜 과거에 자신과 함께 사냥을  나섰던 황제의 몇 번째 후손인지는  기억할

수 없지만 그때의 황제와 닮은 얼굴이 자신을  향한다. 이번의 간단한 승리가

믿기지 않는 듯 그의 얼굴에도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옅은 당혹감과 함께 승리

의 기쁨이 담겨 있었다.  카이엔은 황제의 인사를 무감동한  눈으로 받아들인

후 시선을 옮겼다. 그가 가진 힘을 본 이상  아무리 황제라고 해도 그에게 함

부로 대하지는 못한다. 아무리 카이엔이 무례한 태도를 취한다 해도.

' 있을 리가 없지....'

카이엔은 희미하게 고소를 머금으며 황제의 오른쪽에  있는 무관을 응시했다.

이미 그때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났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시

간. 그러나 자신은 여전히 어제의 기억처럼 뚜렷하게 그를 떠올리고 있다.

그가 있었던 자리에 서있는 것은 오랜 동안을 전장을 누비며 경험을 쌓은 듯

이 보이는 백발의 무관이었다. 과거의 그처럼 젊고  건강한 얼굴도 의욕에 가

득찬 눈빛을 지닌 것도 아닌. 백발의 무관에게는 그가 겪었을 무수한 삶의 관

록이 주름처럼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의 눈은  모든 것을 관망하듯이 깊고

흔들림이 없었다.

" 그럼..."

카이엔은 작게 말하고 나서 대답도 듣지 않고 몸을 돌렸다. 이제 자신은 다시

돌아가야 한다. 그 암울하게 가라앉은 땅으로.

모두다 자신의 선택이었다. 모든 것을  알았을 때 선택할 수  있었던 길은 단

두 개. 고통스러운 죽음을 기다리는 것과 다른 이의 생명을 먹고 계속 살아가

는 것. 그리고 자신이 택한 것은 수치스러운 삶을 이어가는 것이었다.

이미 자신이 알고 있던 모든 이들은 다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데도 무엇

에 미련이 남은 것일까. 과거의 어느 날 자신을 떠나버린 어머니의 모습을 다

시 한번 보고 싶었던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늘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자신에게 글을 가르치던 아버지가 이 땅에 묻혀있기 때문이었을까. 이유는 알

수 없다. 카이엔 자신도 스스로의 마음이 움직인 것을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그 어느 날이었던가.

자신의 몸이 더 이상 나이를 먹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당혹해하던 그때.

자신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타오르는 듯한 갈증 때문에 혼란스러워 하던 그때.

오랜 친구였던 무반 도수가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던 그때.

그때 처음으로 자신이 교룡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토록 동경했던 용족의 피를

이어받은. 그러나 처음 느낀 것은 기쁨이 아닌 불안과 불신.

그리고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는 허탈함. 그것이었다.

교룡은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이단자가 아니던가. 인간의  눈으로 보면

강한 힘을 가진 두려운 존재이지만 용족의 눈에는 피를 더럽힌 괴물에 지나지

않는다. 완전하지 않은 존재. 혼란스러운 존재. 그리고 다른 이의 생명을 마시

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

수십 번의 계절이 바뀌는 동안 카이엔은 이곳  저곳을 옮겨다니며 살았다. 점

점 몸과 정신을 침식해오는 갈증을 벗어날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믿으

며. 몸을 찢을 듯한 통증 속에서도 인내하며 참아냈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점점 깊어지는 갈증의 바닥에서  허우적대는

자신 뿐. 해답을 제시해 줄 이도, 이끌어 줄 존재도. 아무 것도 없었다.

어쩌면 미쳐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혼자라는 외로움이, 막막한 암흑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등뒤에서 풍겨오는 비릿한 혈향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이제 시작일 뿐이니

까. 앞으로 자신이 만들어내야 할 피의 강. 그것의 일부에 지나지 않으니까.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자신이 선택한 길이다.  자신의

목숨을 구걸하는 대신 다른 이들의 목숨을 빼앗는  것. 그것이 인간이던 동물

이던 상관하지 않고. 먼 과거에 자신이 백수의  왕 호랑이를 잡도록 안내했듯

이 이제 다른 이들을 죽음의 강으로 안내한다.

[ 역궁(逆窮) 개문(開門) ]

나직한 목소리가 울리고 눈앞에 어두운 회색의  뒤틀림이 생겨났다. 지독하게

차가운 기운을 가진 남자가 가르쳐준 공간을 여는  주문. 이것이 바로 용족들

이 쓰는 주문이라 했다. 자신은 결코 다가서지 못할 그들이건만 허울만이라도

그들을 따르고 싶은 마음. 어쩌면 지금 어머니가 있을지도 모르는 천계.  하늘

위의 그 어딘가에 잠시 시선을 던지며 카이엔은  공간 안에 발을 들여놓았다.

명계의 암울한 공기가 하계와 맞닿아 옅은 안개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 돌아왔군."

막 쇄락한 건물 안으로 들어섰을 때 영원히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은 낮은 소

리가 들려왔다. 길게 쏟아져 내려 무릎까지 닿는  검은 머리카락과 창백할 정

도로 하얀 얼굴. 그리고 한없이 암울한 빛을 담은 검은 눈.

카이엔은 굳어진 눈동자로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고 나서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와는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다. 다른 이들에게는  보이고 싶지 않은 자신의

마음을 그는 모두 읽어버린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 그럼, 약속대로 보상을 해야겠지."

카이엔은 여전히 그의 눈을 바라보지 않았다. 시선이  닿은 곳은 잿빛 먼지에

뒤덮인 탁자와 빛 바랜 병풍. 그리고 자신이 쓰고 있는 침상과 희미한 갈색의

의자였다. 아무리 닦아도 사라지지 않는 먼지는 카이엔의 가슴에 쌓인 감정의

퇴적물 같았다.

남자는 가볍게 손을 움직여 공간을 열었다. 그리고 들려오는 가벼운 신음소리.

카이엔은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 .......용족..?"

남자는 입술만을 움직여 웃음을 지어 보였다.

겁에 질린 듯이 흔들리는 옅은 갈색 눈동자. 그리고 명계의 독기 때문에 가누

지 못하는 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연중에 풍겨  나오는 용족 특유의 당당한

기운. 카이엔은 아직 성년을 넘기지 못한 용족과 마주 대하고 있는 것이었다.

" ......그.."

미처 입을 떼지 못하고 있는 카이엔을 향해 남자는 더욱 깊어진 미소를 보여

주었다.

" 맞아. 용족이지. 어떻게 잡았느냐고 묻고 싶은 듯한 얼굴이군."

남자는 소리내서 웃으며 독기에 물든 채 가쁜 호흡을 내뱉고 있는 어린 용족

소년을 카이엔에게 넘겨주었다. 소년의 몸에서 퍼져  나오는 떨림이 카이엔에

게 전염되었다.

" 내가 말하지 않았나. 교룡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용족의  생기(生氣)라고

말이야. 그리고 아무리 용족이라고 해도 성년을 치르지  않은 이상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하기는 힘들지.  보통의 용족이라해도  지금은 별  상관없지만 말이

야..."

남자의 말은 그다지 큰 어조가 아니었지만 쇄락한 건물에 가득한 텅 빈 공기

때문인지 말은 막힘 없이 들려왔다.

" 그대에게 주는 최상의 선물이지..."

카이엔은 잔 떨림을 가득 담은 소년의 눈을 응시하며 잠시 망설였다.

" 황룡족의 아이다. 오십살 정도밖에 되지 않은 나이야. 어릴수록 네가 받을

수 있는 개화되지 않은 힘도 클테니... 도움이 되겠지."

지금까지의 자신이 받아들인 것은 인간의 것. 그 기운은 잠시 동안 갈증을 채

워줄 정도의 것 밖에 되지 못했다. 그것도 잠시 동안의.

카이엔은 망설임을 거두어 들였다. 눈앞에 있는 것은  그저 용족 소년일 뿐이

다. 이제 자신의 목마름을 채워 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카이엔은 접어

두기로 했다. 그 소년을 낳았을 부모의 애정과  소년이 앞으로 자라나서 걸어

갈 길 모두를 자신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카이엔은 서서히 소년의 머리위로 손을 가져갔다. 이마에 닿는 감촉이 서늘하

다.

' 순수한 용족에게는 명계의 공기가 독이 된다고 했었지....'

카이엔은 작게 웃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카이엔의 손에서 퍼져 나온 백색의 기운이 소년의 몸을 감

싸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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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슬픕니다. 바로 다음 부분을  (5장은 아니지만..) 안 쓴  관계로 두편을 못

올리게 되었습니다. 왜 뒷편만 잘써지는 걸까요. T^T

오늘은 간만에 늦잠도 자고 비디오도 보고 좋았습니다. 그래서인지 글은 조금

밖에 못 썼지만 정말 얼마만에 이렇게 논 것인지... 행복했습니다.

낼부터는 다시 지겨운 곳으로...

화이트데이였죠. 저는 의리사탕을  받았습니다. ^^; 다른  여성 분들은 어땠는

지... 모두들 좋은 하루 보내시길 바라며.

[번  호] 6974 / 7360      [등록일] 2000년 03월 16일 00:19      Page : 1 / 11

[등록자] 까망포키         [조  회] 208 건

[제  목] [흑룡의 숲 2부] 연(緣)... - 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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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룡의 숲 제 2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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