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룡의 숲-84화 (84/130)

제 5장. 窮(막다른 길)

三.

없애고 싶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을 없애고 싶다.

끓어오르는 마음과는 반대로 카이엔의  얼굴은 차갑게  식어갔다. 마치  얼음

속에 묻힌 시체의 그것처럼.

" 약속하지 않았나...."

카이엔은 미동도 없이 처음과 같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 그대가 우리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대신.... 우리는 그대에게 생명을  주기

로."

소름이 끼칠 정도로 뒤틀린 목소리. 음성 자체는  귀에 거슬리지 않았지만 그

속에 담긴 깊은 의미를 카이엔은 알고 있었다. 몸서리 쳐질 정도로 깊이.

철컥.

차갑고 마른손이 카이엔의 얼굴에 닿았다. 그리고  귓가를 스치는 낮은 목소

리.

" 잊지는 않았겠지. 그대는 교룡이다.  살기 위해선 우리의 말을 듣는  것이

좋아..."

손발을 구속하고 있는 묵직한 족쇄만 아니었더라도 카이엔은 그의 손을  치웠

을 것이다. 그만큼 그의  손에서 퍼져 나온 기운은 카이엔에게  짙은 거부감과

분노를 가져다주었다.

" 알고 있나... 두 개의 경계에 선 존재는 어느 쪽에서도 달갑지 않은 자라는

것을... 결국 교룡이 있을 자리는 단 한곳뿐이다."

쿡쿡 거리는 웃음소리와 함께 남자의 손이 떨어졌다. 그러나 카이엔은 결코 지

워지지 않을 상처자국처럼 얼굴에 달라붙어  있는 차가운 감촉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 아니야.... 결코 그것은 사실이 아니야...'

마음속의 외침은 잦아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스쳐 지나가는 어머

니의 얼굴.

한없는 쓸쓸함만을 담은 채 미소짓던 어머니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어째서 어느 누구도 자신에게 진실을 가르쳐 주지 않았던 것일까.

결국엔 이런 식으로 알게 될 일이었음에도.

교룡이라는 말은 간단한 의미로 묶어버릴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깊은  뜻을

가지고 있었다. 금지된 사랑. 그리고 금지된 행위의 부산물. 영원히 용이 되지

못한 채 연못 속에서 웅크리고 있어야 하는 이무기. 자유로울 수 없는 삶.

" ........!!"

또 다시 끊어질 듯한 통증이 몸 속을 내달렸다. 이것은 목마름의 징조.

따스한 온기를 갈구하는 가슴속의 열망.

이미 금단의 샘에 길들여진 자신의  몸은 선명하게 그 감각을 기억하고  있었

다. 다른 이의 생명이. 그 따스한 온기가 몸 속으로 파고들 때의 기쁨을. 그 환희

를.

" 네가 우리의 말을 듣는다면 더 이상의 고통은 없을 것이다. 더 이상의 목

마름도 없겠지."

카이엔이 느끼고 있는 고통을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남자는 여유로운 미소를

얼굴 가득 떠올리고 있었다.

" 그렇다면..."

남자는 잠시 말을 멈추고 입술 끝을 틀어 올렸다.

" 대답은 들은 것으로 하지."

고통을 참아내기 위해 잔뜩 굳어진 카이엔의 얼굴을 비웃음 섞인 시선으로 훑

어 내리며 남자는 속삭이듯 말했다.

" 넌 교룡이야. 나와 같은..."

곧 등을 돌려버린 남자의 말에 카이엔은 놀란 나머지 모든 사고가 정지해 버

린 듯한 감각에 빠져들었다.

그랬었나...

그 역시 교룡이었나.

하지만 단 한번도 생각한 적이 없는 일이었다. 아니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저

토록이나 강인하고 소름끼칠 정도로 차가운 자가  교룡이라니. 자신과 마찬가

지로 버려진 삶을 산 자라니.

" 다음에 이야기 해 주지. 용족의 수명을 벗어난 자. 인간을  사랑했고 교룡

인 아들을 가졌지만 결국은 구하지 못한 채 홀로  살아남은 자... 훼이의 이야

기를 말이야."

남자의 마지막 말은 카이엔은 더욱 거센 혼란 속으로 밀어 넣었다.

' 용족의 수명을 벗어난 자.... 훼이...?'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자신. 용족의 피를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용족은 커녕 인간에 대한 것도 알지 못한다.

오랫동안의 격리. 세상과 동떨어진 삶은 카이엔을 무지한 자로 만들었다. 그것

은 어쩌면 그의 부모가 바라고 있던 일인지도  모른다. 교룡이라는 사실을 알

고 괴로워하며 살아가기보다는 아무 것도 모르는 채로 살아가는 것이 더 행

복한 일이라고.... 하지만 아니다.

결국은 과거의 기억까지 다 부정할 정도로 괴로운 현실만이 남지 않았던가.

지금의 카이엔이 품고 있는 것은 모든 살아있는  존재에 대한 불신이었다.

*            *            *

소름끼치는 붉은 색의 눈동자.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푸른색의 머리카락.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붉은 눈동자를 들어올렸다.

회색 빛의 하늘은 암울함을 뿜어내며 먼 과거에서부터 굳건하게 존재하고  있

었다. 세상의 시간이 정지한 듯한 느낌.

" 어떤가..."

그녀의 입술이 작게 움직이며 말을 토해냈다.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어

조였지만 듣는 이의 귀에는 세상의 어떤 소리보다 더 싸늘하고 소름끼치는 울

림을 담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 뜻대로 움직일 것입니다."

여인의 입술이 웃음을 띄운 모양으로 변화했다. 그러나  그 미소는 싸늘한 표

정을 더욱 가중시켰을 뿐 기쁨의 미소로 보이지는 않았다.

" 오백년의 침묵은 너무 길었지...."

그녀의 목소리는 무언가를 되새기듯 낮게 잦아들었다.

자신의 기억의 폭은 얼만큼 넓은지 아니면 반대로 얼마나 좁은지 스스로도 알

지 못한다. 기억하던 과거의 어느 순간부터 자신은 명계의 지배자였고 앞으로

도 그럴 것이다. 세상이 끝나지 않는 한.

" 훼이....."

그런 자신에게 강렬한 태양의 빛보다 더 강하게  자리잡은 존재. 자신의 뜻을

막아버린 존재.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세월동안 자신의 뜻을  거스를 수 있는

것은 어느 누구도 없었다.  모든 살아있는 이들의 수명을  관장하는 천상계의

옥황상제조차도 자신에게 접근하지 않았다. 예전에 자신과 같은 뜻을 품고 손

을 잡은 적은 있지만 그것은 단지 한순간의 일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남자

만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손에서  벗어났고 명계의 일부를 파괴하기까지

했다. 그토록 소중히 여기던 친 혈육을 잃었음에도 무너지지 않았다.

어째서.... 어째서... 그렇게 강한 마음을 가질 수 있지...?

요희의 마음속에 이토록이나 강렬히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 자가 있었던가.

모호하기만 한 과거를 뒤집어 보아도 떠오르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그 남자. 흑룡족 남자 훼이만은. 영원토록 지워지지 않을 각인(刻印)처럼 뚜렷

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결판을 내려야겠지..."

" 이번에는 아무리 그라 해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요희는 진정으로 기쁨에 가득찬 웃음을 지었다. 비록 그것이 타인에게는 소름

끼치도록 날카로운 것으로 비춰졌을지라도.

" 이번에는 서두르지 않을 테니까..."

싸늘하게 웃으며 요희는 걷기 시작했다.

먼 과거에서부터 자신이 몸담아온 자신만의 세계. 비록 회색으로 둘러싸인 부

서져 내릴 듯한 쇄락한 공간일지라도 그녀에게는 어느 곳 보다 편안한 자신의

영역이었다.

머리카락을 장식하고 있는 황금의 봉잠은 회색 빛의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 환

한 빛을 내뿜었다. 그것은 수묵화에 검은색 이외의 것이 끼어든 것과 같은 이

질감이었다.

요희는 어깨를 타고 흘러내린 푸른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본

래 자신이 가지고 있던 머리카락은 검은 색이었다. 그러나 언제였는지 기억할

수는 없지만 오랜 과거에 그녀의 머리는 세상 어느 누구도 가지지 않은 푸른

빛으로 바뀌었다. 가고 싶어도 결코 닿을 수 없는 하늘의 색처럼.

' 과거 따위는 이제까지처럼 다 지우는 편이 좋아...'

요희는 머릿속에 떠오른 어떤 이의 얼굴을 지우며 생각했다. 닮지  않았는데...

전혀 닮지 않았는데....

요희는 피식하고 웃었다.

자신에게 과거를 회상하는 것은. 그 속에 담긴  추억을 되새기는 것은 사치에

불과하다. 자신은 명계의 지배자. 다른 모든 이들과 마찬가지로 뒤섞인 기억과

끝없는 삶에 지친 자가 가지는 한숨에 잠겨있어야 한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 자신은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  지배자에게 주어진

당연한 능력인지도 모른다. 그녀에게는 불필요하기만 한.

' 이걸로 모든 것이 지워질 테니까...'

걸음을 내딛음에 따라 머리카락 역시 흔들렸다.

" 하계로 가서 어린 용족이나 영수족들을 찾아라. 발견하면 어떤 방법을 써

서라도 데려오도록."

" 알겠습니다."

걸음을 옮기면서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말에 기이하게도 대답이 돌아왔다. 어

느 곳에도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음에도. 더군다나  그것은 한 개의 목소

리가 아닌 네 개의 울림.

" 실패는 용납하지 않는다."

요희는 표정처럼 굳어진 미소를 떠올리며 자신의 처소를 향해 걸어나갔다.

바람조차 머물지 않는 명계의 땅은 숨이 막힐 듯한 고요와 함께 그녀의 그림

자가 되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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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입니다.

지금 판타리아의 뱀파이어 언니가 저희 집에서 머물고 있기 때문에 같이

술마시다보니 어느새 새벽 6시가 되었네요. 전 아침 9시에 회사가야 하는데...

뭐..잠 좀 안자면 어때요 ^^;

내일부터는 두편 연재로 되돌아갈 수 있을까... 에잇..

될대로 되라. 나도 천리안에서 작가대전 하고 싶지만 다른 작가친구들이

안끼워준다고 합니다. 제가 그동안 흑룡과 은의 왕국을 연재하면서 매일 연재

기록을 세웠기 때문이죠... 쳇, 그래도 내기 하고 싶다... 나도 좀 끼워줘!

모두들 즐거운 하루를 맞이하시와요. 꾸벅..^-^

[번  호] 7022 / 7360      [등록일] 2000년 03월 18일 00:58      Page : 1 / 11

[등록자] 까망포키         [조  회] 160 건

[제  목] [흑룡의 숲 2부] 연(緣)... - 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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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룡의 숲 제 2부 >

연(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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