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룡의 숲-85화 (85/130)

제 6장. 夢(안개의 길)

스쳐 지나가는 순백의 흩날림

냉기를 머금은 싸늘한 미소와도 같이

가슴에 남은 서늘한 향기

흔들리는 시선

흔들리는 기억

꿈꾸듯 감은 눈동자 속에는

소용돌이치는 눈발이

가득 메워져 있다.

一.

일상처럼 굳어져버린 오후의 일과. 그것은 어머니가 그랬듯이 먼 하늘을 응시

하며 생각에 잠기는 것이었다.  특별히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지  않고 멍하니

있을 때도 많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아버지와 함께 지내던 시간을  되새기는

것으로 보내는 때가 많았다.

완연한 병색이 새겨진 얼굴이었지만 단  한순간도 사라지지 않았던 아버지의

기품. 그것은 어쩌면 이런 삶을 선택한 아버지가 보일 수 있는 최후의 선택이

었는지도 모른다.

" 잘 지냈나보군."

활기에 가득 찬 음성이 갑작스레 울려 퍼졌다.  카이엔은 자신만의 장소에 찾

아든 남자의 정체를 생각하기  이전에 의아함을 먼저 느끼고  있었다. 어째서

저녁이 되어 가는 이 시간에, 숲의 한적함을 깨는 목소리가 들린 것일까. 그것

도 이곳의 침묵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활기를 가진 자가.

" 이제 혼자만의 생활에서 벗어나는 것이 어떤가?"

카이엔은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처음과 변함없이 차분한 검은 눈동자가 자신

을 향하고 있었다.

" 당신의 생각입니까...?"

황제가 떠난 때로부터 꽤 시간이 흐른 데다 이제 지금까지와 변함없는 생활이

이어질 것이라 여기고 있던 카이엔에게 도수의 말은 분명 의외의 것이었다.

" 보통 사람들의 삶을 겪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거야."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말을 거는 도수의 음성은 잔잔한 물살처럼 귓가에 내려

앉았다. 오랜 수련으로 단련된 다부진 몸과 어린  나이에 무반의 지위에 오를

정도로 뛰어난 능력. 그리고  그런 것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만하지 않는

태도. 카이엔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도수에게 끌림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그의  온몸에서 느껴지는 자신감이, 소리  없는 당당함이

카이엔을 잡아 끄는지도 모른다.

" 앞으로의 세월을 이곳에서 보내는 것은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나?  아무리

주위 경관이 아름답다고 해도 말이야."

분명 한달 전이었다면 카이엔은 도수의 말을 거절했을  것이다. 아니 듣는 그

순간 바로 돌아갈 것을 권유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얼마 전 사냥의 길

잡이라는 형태로 많은 사람과 접촉한데다 혼자만의 생활이 아닌 다른  누군가

와 맞추어 나가는 일이 그리 나쁘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물론 아직까지 많은

사람과 대면하는 것은 적응이 되지 않지만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

었다.

스무 해 동안 살아왔던 숲 속을 벗어나 다른 이들이 살아가는 것처럼 커다란

마을 속에서 함께 숨쉬며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 한번에 결정하기 힘들다면 한달, 아니  보름이라도 좋으니 사람들 속에서

지내면서 그들의 생활을 겪어보고 결정하는 것도 괜찮을 거야."

카이엔이 망설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일까. 도수는 한결 풀어진 미소를

떠올리며 말을 건넸다.

" 어째서....입니까."

카이엔은 작게 울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더 많은  말을 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어떤 말부터 꺼내야할지 알지 못한다. 마음속에서 뒤섞여  가는 여러 가지 생

각들만이 점점 커져갈 뿐.

도수는 싱긋 웃었다. 그것은 아무런 사심도 담겨있지 않은 순수한 미소였다.

"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짧은 한마디에 불과했지만 도수가 꺼낸 말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들어보지 못

한 설레임을 품은 말이었다.  다른 이들에게는 아무런 감흥도  가져오지 못할

흔하디 흔한 친구라는 말이 이토록이나 커다란 존재감을 가지고 다가오리라고

는 카이엔 조차 생각하지 못했다.

" 대답은 내일까지 기다리도록 하지. 그 대신..."

카이엔은 가만히 도수가 뒷말을 이어가기를 기다리며 그에게 향한 시선을  고

정시켰다. 검은색의 깔끔한 무복이 흠잡을 데 없이 잘 단련된 도수의 몸을 감

싼 채 흐린 햇살아래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도수의 몸

은 정말 부러울 정도로 단단해 보였다. 오랜 노력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는.

도수는 카이엔이 앉아있던 툇마루에 털썩 주저앉았다.

" 여기서 하룻밤 묵을 수 있겠지?"

말없이 도수의 얼굴만을 응시하던 카이엔은 한순간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보

였다.

그리고 그것이 카이엔과 도수의 긴 인연의 출발점이었다.

*            *            *

자신의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소란스러운 거리.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의 소리조차 크게 들릴 정도로 한적한 숲에서의  생활

에 익숙해져있던 카이엔에게 소란스러운 거리의  모습은 믿어지지 않을 만큼

놀랍게 느껴졌다.

" 곧 익숙해질 거야."

카이엔은 잠시 도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사람

들의 물결을 응시했다. 온 나라안의 사람들이 이 안에 모여있는 것 같았다.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흘러 넘치고 무언가를 향해

끊임없이 걸어가며 움직인다. 카이엔은 아직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향해 걸어가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아버지와 함께 지내던 시절에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을 귀에 담기에 바빴고, 그  후 어머니와 함께 지

내던 시절에는 그저 몇  마디의 짧은 대화를 나누면서도  고민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홀로 지낸 2년의  세월은 카이엔을 조금이나마  바꾸어놓았다. 일부러

의식하지 않으면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입술조차 움직이지 않았고 식사도 제때

하지 않았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하는지, 삶의  목표조차

제대로 서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저 하루하루를 보냈을 뿐이었다. 그러나 평생

을 그렇게 보낼 수 없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거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색색깔의 옷이었다. 그저 하얗고 깔

끔한 무복이나 장포만을 옷의 전부로 알고 있던 자신에게는 진정 놀라운 체험

이 아닐 수 없었다. 몇 번 보았던 가까운 마을 사람들의 옷도 자신의 것과 별

반 다르지 않았기에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옷의 색은 몇 개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남자들의 옷은 그나마  몇 가지로 제한되어 있었지만

여자들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다. 귀족의 신분으로 보이지 않는 보통 여인들

도 화사한 빛깔의 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리고  머리카락에 장식된 여러 가지

장신구들 역시 눈을 현란하게 만들었다. 언젠가 어머니의 머리에서 보았던 금

색의 용잠 만큼 정교하고 아름다운  것은 눈에 띄지 않았지만 대개의  것들은

그리 하품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한참동안 번잡한 길을 지나쳐가자 이제는 길게 이어진 관도가 나타났다. 우마

차나 마차의 바퀴자국이 길게 이어져 있는 짙은 황토 빛의 길.

" 후..."

많은 사람이 있던 곳에서 벗어나자 카이엔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뱉었다.

" 이제 좀 숨이 트이나보군."

" 아....네.."

조금 뒤늦게 카이엔이 답하자 도수는 빙긋하고 웃었다.

" 친구사이에는 말을 높이는 게 아닌데...."

지나가는 말처럼 슬쩍 말을 내뱉자 카이엔은 드물게도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 아직은 익숙치 않아서...."

" 금새 익숙해질 테니까."

카이엔은 정색하며 답했다.

" 이십 년의 버릇이 그리 쉽게 고쳐지리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도수는 다시 웃음 지었다.

황제와 함께 있을 때의 도수는 한순간도 굳어져  있는 얼굴을 풀지 않았었다.

보통 때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그와는 다르게 여겨질 정도로. 아마도 그

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무반이라는 직책 때문일  것이다. 책으로만 보았던 관

직이라는 것을 가진 사람을 본 것은 도수가 처음 이었지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더군다나 도수는 나이에  비해 가진 직책이 무겁기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황제의 곁을 지키거나 전쟁이 일어났을 때 병사들을 지휘하는 자리가

바로 무반이 아니던가.

" 무반의 자리.... 힘들지 않습니까..."

한참동안 말없이 걸음을 옮기던 도중에 카이엔은 생각해 두었던 질문을  꺼냈

다. 그러자 도수는 의외라는 듯이 카이엔을 응시했다.

" 과거에는 당연히 해야했기에 힘겨워도 견뎌냈지만 지금은 내게 잘 어울리

는 자리라 생각하고 있지. 그런데 왜 그것을 물었지?"

도수는 아직 표정을 바꾸지 않은 채 되물었다.

" 제가 생각하던 것과는 조금 달라서요."

" 어떤 점이...?"

" 글쎄요... 중압감이 느껴지지 않았다고 할까..."

도수는 카이엔이 한 말의 의미를 되씹었다.

중압감이라. 과거에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주위의  어떤 시선에도 굴하

지 않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고, 그만한 경험도 했다.

문득 옆을 돌아보자 무슨 생각에 잠겨있는지 아련하게 잦아든 눈동자로  길을

걷는 카이엔의 옆모습이 보였다. 모호한 무관심이 담기지 않은 카이엔의 눈동

자는 그야말로 막 세상에 태어난 작은 새의 모습 같았다. 세상의 어떤 더러움

도 알지 못하는 순수한 빛이 그 안에 가득 채워져 있었다.

" 자, 이곳이 내 집이지."

도수의 말에 고개를 들어올리자 자신이 이제껏 살아왔던 집과 별반 다를 것이

없지만 크기는 다섯배 정도로 보이는 집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는 푸른색의

기와로 덮여있는 본채 하나와 그보다 작은 두  채의 건물. 그리고 초가하나가

사이좋게 자리하고 있었다. 생각하던 것보다는 작았지만 도수의 성격에 잘 어

울리는 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어머님께 인사를 드리고 네가 지낼 방을 골라주지."

" 네... 감사합니다."

먼저 대문 안으로 발을 들여놓으며 도수는 말했다.

" 그 인사는 보통의 생활에 적응 한 다음 받도록 하지."

편안해 보이는 도수의 뒷모습을 따라 카이엔도 갈색의 대문을 지나쳤다.

[번  호] 7023 / 7360      [등록일] 2000년 03월 18일 00:59      Page : 1 / 10

[등록자] 까망포키         [조  회] 161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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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룡의 숲 제 2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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