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장. 微(잔향)
二.
온 몸을 지배하는 끝없는 광기는 카이엔의 정신을 흐트려 놓았다. 한번 용족
의 생기를 흡수하자 인간이나 그 밖의 생기로는 몸을 유지할 수조차 없게 되
어버린 것이다.
오직 용족의 것만이 자신을 움직이고 정신을 올바로 되돌려놓을 수 있었다.
명계의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인간의 전쟁에 끼여들어 힘을 쓰고, 때로는 전
쟁처럼 커다란 싸움이 아니더라도 어떤 이들의 투쟁에 상대를 위협하는 도구
로서 힘을 쓰기도 했다. 마치 자신은 아무런 의지나 행동력도 가지지 못한 채
그저 자신을 조정하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움직이는 것처럼.
명계에 몸을 담고 있지만 아직 자신은 명계에 대한 많은 것을 알지 못한다.
처음 자신을 그곳으로 데려가고, 괴로운 진실을 알려주고, 힘을 쓰는 법을 가
르쳐 주고, 이제는 명령을 내리는 그 남자의 이름이 천오라는 것과 그의 모습
이 창백하게 마른 모습이라는 것. 그리고 단 한번 스쳐 지나면서 보았던 명계
의 주인 요희의 모습은 소름끼칠 정도로 냉랭한 느낌을 풍기고 있다는 것이
전부였다. 그들 이외에 명계에서 살고 있는 자들의 모습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이 낡은 건물에서 잠을 자며 카이엔은 쓰
게 웃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두 번째의 운명은 정말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카이엔은 정신없이 손을 움직였다. 손에 든 것은 은색의 날카로운 날이 서있
는 소도(小刀)였다.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자신이 지니고 있는 유일한 물건.
카이엔의 손에서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고 있었다. 왼손에 들린 나무는 어느새
명계에서만 살아가는 이형(異形)의 동물중 하나인 시랑의 모습으로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처음 명계를 되돌아볼 여유가 생겼을 때 얼마나 놀랬던가. 이곳에
는 자신이 알고 있는 동물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명계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이형의 동물들. 재난을 불러오는 동물들만이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토해내며
움직이고 있었을 뿐.
" ..........읏.."
순간적으로 온몸이 찢어질 것 같은 통증이 일었다. 육체의 고통인지 그렇지
않으면 영혼의 목마름인지. 이제는 알 수 없었다.
카이엔은 잠시 떨려오는 손을 안정시켰다. 또 다시 밀려오는 격통은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어서 새로운 생기를 달라는 무언의 외침. 육체와 정신이 유리
되어 가는 듯한 이질감이 전신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참으려해도 의지는 자신
을 배반했다. 자신에게 견딜 수 있는 힘이 없는 것처럼.
탁.
그리고 어느 순간 손에 들려있던 완성되기 직전의 조각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
렸다.
" 이상하군...."
요희는 창백하게 굳어진 얼굴로 침상에 몸을 묻고 있는 카이엔의 얼굴을 내려
다보며 말했다.
카이엔은 그녀가 알고 있는 교룡과는 조금 다른 듯 했다. 바로 그녀의 옆에
있는 천오만 해도 어린 교룡이었을 때 카이엔과 같이 육체의 고통을 느끼며
혼절하는 일은 없었다. 천오는 스스로의 힘으로 생기를 얻었고 그렇게 할 수
없었을 때는 강한 정신으로 그것을 이겨냈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난 지
금에는 생기가 없이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 어린 교룡은 어째서
인지 밑 빠진 독처럼 생기를 흡수해도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힘은 흡수하지만 생기를 가지고 자신의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천오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생기를 빠르게 흡수하고 이용할 수 있는
가를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것이 아니더라도 교룡의 몸은 본능적으로
그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그런데 이 카이엔이라는 이름의 교룡은 어떤가. 마치 온몸이 살아가는 것을
거부하기라도 하듯이 생기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하고 있다. 백룡의 피를
이은 교룡. 백룡의 피가 그렇게 약한 존재를 만들어냈을 리가 없는데도.
" 죽지만 않는다면... 아니, 죽임을 당하지만 않는다면 생각하시는 일을 수행
하는데는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천오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 아니, 방법은 있지. 아무리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해도 한번에 채워버리면
되니까."
요희는 입술을 틀어 올리며 소리 없이 웃었다. 붉게 빛나는 눈동자에는 흥미
거리를 찾아냈을 때 떠오르는 잔인한 즐거움이 배어 있었다. 이런 눈빛을 보
였을 때의 그녀는 선택한 장난감이 부서져서 되살릴 수 없을 때까지 손에서
놓지 않는다.
" 나의 피를 주지."
요희의 말에 천오는 눈을 크게 떴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직접적인 행동을 하
지 않았던 그녀가 아니던가.
" 그렇게 되면 두 번 다시 육체의 고통으로 인해 일을 그르치지는 않을 테
니..."
요희는 칼날처럼 뾰족한 손톱을 눈앞에 가져가며 소리내어 웃었다.
" 아직 아무 것도 시작되지 않았는데 말이야...."
둔한 통증이 가슴을 울렸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까지와 달리 그저 희미하게 울리는 느낌에 불과했다. 마치
꿈에서 깨어난 뒤에 생각나지 않는 꿈을 떠올리며 아련한 무언가를 느끼듯이.
" 넌 삶에 대한 의욕이 없는지도 모르겠군..."
언제나와 같이 소리 없이 다가선 남자. 천오가 말했다.
" 대부분의 교룡들은 끈질기게 살아가기를 원했지. 버림받은 자신의 삶에
대한 반발로 말이야."
천오의 말에 카이엔은 자신의 과거를 다시 한번 회상했다. 교룡이라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의 자신은 나이를 먹지 않는 다는 사실에 의문을 느끼던 것 이외
에는 어떤 불편함도 느끼지 못했었다. 그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알았
을 때는 혼란 때문에 괴로워하긴 했지만 누군가를 원망하는 마음은 생기질 않
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이들의 생명이 주는 쾌락을 알아버린 지금은 스스
로의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이 다른 것보다 더 컸다. 마치 자신의 가슴속에
다른 누군가가 살고 있는 것처럼.
" 하긴 네가 태어나기 이전에 존재했던 교룡역시 달랐지. 그 아이는 아버지
의 충분한 사랑을 받았으니.... 비록 오래 살지 못하고 죽었지만."
카이엔은 의아함을 담은 시선을 천오에게 돌렸다. 분명 기억하고 있었다. 천오
가 세월을 뛰어넘어 살아남은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겠다고 한 것을. 그
리고 그때 그의 아이 역시 교룡이었다고 말했었다.
" 대답을 기다리는 얼굴이로군."
천오는 비릿한 웃음을 떠올리며 입술을 움직였다.
" 그는 과거에도 그리고 현재도 흑룡족 가운데 가장 강한 자라는 이름을 가
지고 있는 존재다. 모든 용족 중에서도 가장 강한 것이 흑룡. 그리고 그런 역
대 흑룡족들의 이름을 뛰어넘은 자가 바로 훼이다."
훼이라는 이름의 울림이 희미한 고동을 만들어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동
은 작게 반복되며 카이엔의 가슴을 점령해갔다.
" 그자와 인간 여인사이에서 태어난 교룡이 있었다. 그 교룡이 가진 이름은
비라고 했지. 그 아이는 비록 당시의 흑룡왕에게 손자로서 인정받지는 못했지
만 훼이의 비호아래 천계에서 살아갔다. 만약 훼이가 아니었다면 어림없는 일
이지. 감히 어느 누가 교룡을 천계에 들여놓겠다는 생각을 했을까...."
카이엔은 희미한 안개에 감싸인 듯한 머리를 맑게 만들기 위해 몸을 일으키며
천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어느 새 카이엔의 머릿속에는 훼이라는 용족 남
자의 모습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 강인한 아버지의 피를 이었기 때문인지 그 교룡은 성년식을 보낼 때까지
도 교룡이라면 필히 느꼈어야 할 목마름에 시달리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훼
이가 다른 이들 모르게 그것을 처리했을지도 모르지만."
천오는 생각에 잠긴 듯 잠시동안 말을 멈췄다.
아버지의 모습을 그대로 닮았던 교룡 비. 자신과 처음 대면했을 때 그에게서
느꼈던 순수함은 마치 깊게 새겨진 상흔처럼 천오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냉소 섞인 자신의 말에 비라는 이름의 교룡은 답했었다.
자신에게는 돌아갈 곳이 있노라고, 기다리는 자들이 있노라고.
그래서 였는지 모른다. 더욱 그 교룡을 상처 입히고 싶었던 것은.
천오 자신은 지금의 모습이 되기까지 단 한번도 얻지 못했던 자신만의 장소를
그 어린 나이의 교룡은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 요희가 그 교룡에게서 대부분의 생기를 빼앗아가기 전 까지 그 교룡은 천
계와 하계를 오가며 용족다운 삶을 살았지. 물론 나도 그때 그 교룡의 생기를
얻었다. 교룡임에도 불구하고 용족에 비기지 않을 정도로 강한 기운을 가졌었
지. 그때의 느낌은 후에도 잊지 못할 것이다."
카이엔은 그 훼이의 아들이었던 교룡의 죽음이 명계와 연관되었다는 사실에
무척 놀랐다. 그것도 지금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존재와 스친 것만으로도 소
름끼칠 정도로 섬뜩한 기운을 남겼던 요희가 한 일이었다니.
" 그래서 그때 죽음을 맞이한 아들 때문에 훼이는 무너진 모습을 보였었다.
불과 몇 백년 전에만 해도...."
천오는 이제까지 단 한번도 보이지 않았던 깊은 무언가를 회상하는 듯한 표정
으로 말했다. 카이엔은 그런 그의 얼굴이 무척 생소하게 느껴졌다. 자신이 알
고 있는 천오는 요희의 명령에 움직이는 존재. 명계의 이인자. 자신이 이익을
얻기 위해서만 움직이는 이기적인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의 얼굴
은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의 목소리 또한 자신은 느끼지 못하는 듯 했지
만 낮게 가라앉아 있는 채였다.
" 비록 그때의 일로 명계는 크나큰 타격을 입었지만 그 강인한 남자의 마음
에 깊숙한 상처를 남긴 것은 분명 큰 성과가 아닐 수 없지."
천오의 눈에는 알 수 없는 일렁임이 퍼져가고 있었다.
" 두 번의 천년이 지났어도 기억하고 있을 테지... 부모란 건 그런 거니까..."
왠지 모르게 잦아든 천오의 음성을 들으며 카이엔은 조용히 눈을 깜빡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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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맞이한 휴일이었지만 거의 쉬지는 못했습니다. 뱀파 언니와 정신없
이 돌아다니다 보니 두달만에 맞은 이틀의 휴일이 다 날아가 버렸군요. 그래
도 보람있는 날들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내일 부터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군요. 또 회사에 나가고 정신없이 글을 쓰고, 요즘엔 왠지 모르게 우울한 기분
이 드는데 조금 외로운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사람을 만나고 있어도 마음 한 구석이 빈 듯한 기분은 사라지질 않는군요. 아
직 살아온 시간이 길지도 않은데 이상하죠? [번 호] 7112 / 7360 [등록일] 2000년 03월 21일 00:11 Page : 1 / 11
[등록자] 까망포키 [조 회] 134 건
[제 목] [흑룡의 숲 2부] 연(緣)... - 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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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룡의 숲 제 2부 >
연(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