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장. 微(잔향)
三.
" 그래, 그렇다고 해도 주의를 게을리 해서는 안되겠지. 그들이 어떤 자들인
지는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으니."
리린은 판유가 꺼낸 말을 듣고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명계의 불온한
움직임을 조사하기 위해 하계로 내려간 일족들의 보고는 그리 신통치 않았다.
거의 대부분이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했을 뿐더러 명계의 기운을 느꼈다는 자
도 그저 엷게 남아있는 흔적을 감지한 것뿐이었다.
리린은 이미 오백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때의 일을 생생하게 기
억하고 있었다. 명계의 움직임에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했던 자신의 무능력함
을 뼈저리게 원망하면서. 자신이 조금만 더 힘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아니 주
의력이 조금 더 깊었더라면 유안이 그런 수치스러운 일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
다. 지금은 어느 누구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강인한 흑룡왕이 되었지만 그
때의 유안은 어린 소년에 불과했었다.
그리고 그때의 일은 유안에게 뿐만 아니라 리린에게도 상처를 남겼다.
한동안 과거를 회상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던 리린은 문득 며칠 전에 받
았던 서신의 내용을 떠올리며 작게 웃었다.
" 닷새 후에 흑룡왕이 혼인을 한다고 하는데, 함께 가보는 게 좋겠군. 안 할
것처럼 굴더니 결국에는 자신보다 사백살이나 어린 여인과 혼인하다니 말이
야."
" 아... 유안님 말씀이십니까? 그런데 비가 되실 분은....?"
판유는 예전에 흑룡왕이 청룡궁을 방문했을 때 보았던 현 흑룡왕의 모습을 떠
올려보았다. 가장 강한 일족인 흑룡족의 수장이라는 느낌보다는 나이에도 불
구하고 그는 장난스러운 눈빛을 빛내는 젊은 청년이라는 느낌을 가지고 있었
다.
리린은 실로 오랜만에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웃음을 터트리며 어울리지 않는
둘의 모습을 애써 지우고 있었다. 항상 거칠게 산과 들판을 뛰어 다니는 소녀
의 모습과 그런 그녀를 당혹스러운 얼굴로 쫓아가는 유안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의아함을 느끼는 판유를 보며 리린은 겨우겨
우 웃음을 참아냈다.
" 들어본 적은 있을 거야. 오백년 전부터 유안과 친분을 쌓아온 백호족이
있다는 이야기는."
판유는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 네. 들은 적이 있습니다. 후계자시절 함께 수행을 다니셨다고 알고 있습니
다."
" 바로 그 백호족 남자 세인의 여동생이지. 나이 차가 많이 나는."
판유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아직까지 리린이 격하게 웃음을
토해낸 이유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 백호족들이 어떤 습성을 가진 자들인지는 알고 있겠지?"
" 물론입니다."
" 그래, 그대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백호족들은 한 곳에 머무르길 즐겨하
지 않으며 싸움을 즐기지. 어떤 면에서 보면 홍룡족들보다 더. 그리고 지금 흑
룡왕의 비가 될 그녀 역시 더하면 더했지 보통의 백호족들과 다를 바가 없어.
그런데 차분하게 앉아서 모든 것을 지켜보아야 할 용왕비. 더군다나 흑룡궁의
안주인이 그녀라니. 내가 웃지 않고 배기겠나?"
판유는 그제서야 리린이 웃은 까닭을 알 수 있었다. 리린은 자유분방한 백호
족 여인이 차분한 비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웃음 지은
것이다.
자신은 알지 못하는 먼 과거의 일을 회상하는 그녀의 얼굴에는 실로 오랜만에
편안한 표정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쩌면 왕이라는 자리는 알게 모르게 그 자
리에 있는 자에게 중압감을 주는 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니 항상 그랬었다. 자신이 태어나서 그녀의 존재를 알게되고 시선을
던지던 그 순간부터 그녀는 왕이었고,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으며, 당당하고
위엄 있는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왕으로서 당연히 가져야할
것들이었고, 그녀 본래의 표정은 드러난 적이 없었다. 그것을 읽어냈기 때문인
지도 모른다. 자신의 시선이 그녀에게서 떠나지 않게 되고, 급기야는 청룡족의
보좌관이 되기 위해 수련을 하게 되었던 것은.
그때 처음으로 판유는 자신의 핏줄에 감사했다. 청룡족과 백룡족의 피를 이었
지만 청룡족의 힘을 더욱 강하게 쓸 수 있는 자신의 피에.
" 어떤 후계자가 태어날지 궁금하군. 기린족과 용족과 백호족의 피라...."
리린은 중얼거리며 무엇을 떠올렸는지 피식거리며 웃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
의 모습을 판유는 말없이 지켜보았다.
* * *
아침부터 한번도 떨어지지 않은 채 자신을 향하고 있는 시선을 느끼면서도 훼
이는 단 한번도 그곳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맡은 문서들을 계속 읽어 내려가며 인장을 찍는 일을 반복하고
있을 뿐. 벌써 수백년을 계속해온 일이라 이제는 밥을 먹는 것과 마찬가지로
편안하게 처리할 수 있을 만한 일이라고 여겨질 정도였다. 그런 훼이 덕분에
유안은 자유로운 시간을 많이 얻을 수 있었고, 많은 이들과의 만남을 지속할
수 있었다. 후계자 시절과 별 다를 바 없이.
" 이제 다 끝났습니까?"
처음 훼이가 집무실에 들어섰을 때부터 자리를 지키고 있던 그녀. 앞으로 며
칠후면 당대 흑룡왕의 비가 될 백호족 여인 시령은 어린아이처럼 호기심 가득
한 표정으로 훼이를 올려다보았다.
" 유안이 칭찬 할만도 하네요. 오랜시간 동안 단 한번도 쉬지 않고 업무에
전념하다니. 저라면 반 시진도 되지 못해 뛰쳐나갔을 거예요."
불과 며칠 전 훼이에게 인사를 하러 왔을 당시의 시령은 그녀를 알고 있던 어
느 누가 봐도 놀랄 정도로 차분하며 현숙한 흑룡왕비의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지금은 훼이가 처음 만났을 때 보았던 발랄하기 그지없는 백호족 소녀의 모습
이었다. 하고 싶은 말은 거리낌없이 내뱉으며 직접 몸을 움직여 일을 처리하
는 것을 좋아하는.
"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뿐이다."
훼이는 마지막 문서에 인장을 찍어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그제서야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시령의 얼굴을 보았다.
" 훼이는 지겹지 않았나요? 다른 이들의 두 배에 달하는 삶을 살아서?"
시령은 아무렇지 않게 물었지만 그것은 알게 모르게 금기시 되어온 말이었다.
두 번의 천년을 살아온 용족 훼이. 그가 겪어온 길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다채로운 색으로 채워져 있었다. 훼이가 지금의 모습이 되고, 이 자리에
머물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던가. 그것을 아는 많은 이들은 훼
이에게 가급적 과거의 시간을 되살리게 할 만한 말이나, 기나긴 시간에 관한
것은 묻지 않았다. 아니, 묻고 싶어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백호족 여인 시령은 달랐다. 그녀는 솔직하게 자신이 알고 싶었던 것을 물
었다.
" 글세다.... "
훼이는 당돌한 시령의 질문 때문에 그 동안 생각하지 않고 있던 기나긴 시간
속에 잠긴 기억들을 되돌아보았다.
소중한 이들을 떠나보내고 그것을 현실로 받아 들이기 까지, 현재를 당당하게
살아가게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자신이 잃어버린 것들을 되돌리
는 데에는 강한 힘은 소용이 없었다. 다른 어느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는 힘
을 가진 자신이지만 어떤 것 하나도 얻지 못한 채 시간 속을 걸어왔을 뿐.
그렇게 살아온 자신은 지금 두 번째의 천년을 맞이했다. 아버지의 생명을 받
은 탓일까? 그렇지 않으면 마음속에 미련이 너무 많이 남아있기 때문일까. 훼
이는 아직 삶이 견딜 수 없을 만큼 답답하거나 견디기 힘들다는 생각은 해보
지 않았다.
" 시령. 네가 보기엔 어떻지?"
훼이는 대답 대신 희미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되물었다.
" 무언가 한가지가 빠져 있는 것 같아요. 무어라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중요한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는 느낌이랄까.... 불투명하게 희미한 감각이니까
믿을만한 건 아니겠죠."
마치 대답을 기다렸다는 듯이 시령은 막힘 없이 입술을 움직였다.
훼이는 그런 시령의 말을 듣고 굵직한 통증을 느꼈다. 아직 채 오백년의 시간
도 살아오지 못한 어린 백호족의 여인이 길고 긴 시간의 강을 날카롭게 바라
보고 있었다는 것은 실로 큰 충격이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훼이를 놀라게
한 것은 자신조차 확실히 느끼지 못하고 있던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그녀를
통해 들었다는 데 있다. 매일 매일을 살아가기는 하지만 단지 그것이 전부인
자신의 삶에서 빠진 것이 무엇인가를 그녀의 말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저
시간의 탓이라고만, 지나가 버린 과거의 기억 때문이라고만 여기고 있던 마음
의 작은 균열을 훼이는 그녀의 말 한마디를 통해 깨달았다.
" 원래 이런 말을 하려던 게 아닌데.... 여기 온 건 제게 검을 가르쳐 달라고
하고 싶어서에요. 검뿐만 아니라 다른 것들도 가르쳐 주신다면 좋겠지만. 지금
가장 강한 힘을 가진 것은 누가 뭐래도 훼이니까 말이에요."
조금 전에 자신이 꺼낸 말은 금새 잊은 듯이 말을 돌리는 경쾌한 표정의 시령
을 보며 훼이는 가만히 시선을 고정시켰다.
어쩌면 너무 쉽게 과거를 흘려 보내려 했는지도 모른다. 과거는 지나간 후에
는 변하지 않을,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것이었지만 적어도 남아있는 자는 그
것을 되새겨야 한다고. 모든 것을 잊는 것이 결코 현명한 처사가 아니라는 것
을 훼이는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어떤 이는 기억해 달라고 오래고 오랜 시간의 한 자락
에 자신을 새겨 달라고 말했었다. 또 다른 이는 잊으라고 그것이 자신이 얻을
수 있는 최대의 선물이라고 했다. 그리고 어떤 인사도 제대로 건네지 못한 채
떠나보낸 소중한 존재가 마지막에 보여 주었던 눈빛은 수백년이 흐른 지금에
도 생생하게 뇌리를 점령하고 있었다.
" 빨리 검을 배워서 유안을 깜짝 놀라게 해줄거에요."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시령은 밝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 웃음은 훼이에게
또 다시 깊은 흔들림을 느끼게 만들었다.
" 좋다. 검을 선물했으니 그 사용법도 가르쳐 주어야겠지."
" 감사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었기 때문인지 그제서야 시령은 훼이에게서 시선을
떼고 몸을 일으켰다.
" 내일부터 이 시간쯤에 찾아올게요."
훼이의 대답조차 듣지 않고 몸을 돌린 시령의 뒷모습은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생생한 움직임을 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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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출판사에서 흑룡 1부 책이 도착해서 다른 작가분들에게 부치고 하느라고
사무실에서 다른 사무실(걸어서 약 12분)로 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책 24권을
들고 가는데 정말 죽는 줄 알았습니다. 지금도 팔이 떨려서 키보드를 치는데
힘이 안 들어가는군요. 정말 오랜만에 노동다운 노동을..-_-
어제 저희 아버지와의 대화를 간략히 소개하죠. ^-^
제가 아침밥을 먹고 있는데 안방에서 나온 저희 아버지가 갑자기 절 보더니.
" 넌 전투장면이 너무 약해." 라고 하시는 겁니다. 전 발끈해서..
" 그럴 수도 있지뭐." 라고 했죠. 그랬더니 무협영화랑 책을 그렇게 많이 보고
도 왜 못쓰냐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전 " 그럼, 다음부터는 아빠가 좀 써봐
요." 라고 했더니 그러시겠다는군요. 2부에서의 전투씬은 달라질 것인가...두둥.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
[번 호] 7143 / 7360 [등록일] 2000년 03월 22일 00:57 Page : 1 / 12
[등록자] 까망포키 [조 회] 127 건
[제 목] [흑룡의 숲 2부] 연(緣)... - 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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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룡의 숲 제 2부 >
연(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