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장. 微(잔향)
四.
마음이 부서질 것 같았다.
스스로의 의지로 모든 것을 결정하긴 했지만 이것이 과연 최선이었을까. 차라
리 구차하게 목숨을 이어가지 않고 그냥 조용히 눈을 감는 것이 가장 좋은 방
법이 아닐까.
분명 아버지도, 어머니도 자신의 이런 모습을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에게
아무런 진실을 가르쳐주지 않았다고 해도 부모님과 함께 보냈던 과거의 순간
이 따스한 기억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그것
은 한때의 기억일 뿐 지금의 자신은 그때의 카이엔이 아니다.
이미 자신은 다른 이의 생명이 주는 쾌락을 알아버렸다. 그 따스한 기운이 온
몸을 채울 때 느껴지는 벅차 오르는 느낌. 그것은 끊을 수 없는 금단의 약과
도 같이 카이엔의 몸과 정신을 옭아맸다.
이제 더 이상 명계의 기운이 낯설지 않았다. 얼마간을 그곳에서 보냈기 때문
에 익숙해진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몸이 익숙해진 것이다. 분명 카이엔이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명계의 지배자 요희의 뜻에 의해 카이엔은 그
녀의 피를 가지게 되었다. 얼마의 시간을 살아왔는지도 알 수 없는 존재. 어떻
게 보면 다른 계의 지배자들보다 더 거대한 존재감을 가진 것이 그녀인지도
모른다. 그녀에게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 혼자만의 세상의 전부이자 움직이
는 자가 되는 것이므로. 그런 그녀의 피가 가진 힘은 엄청났다. 금방이라도 정
신을 아득하게 만들 것처럼 자신을 괴롭히던 육체의 통증이 마치 씻은 듯이
사라진 것이다. 과거의 그것은 꿈에 불과하다는 듯이.
' 하지만 이런 것을 바라지는 않았는데........'
카이엔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 내일 사시(巳時 오전 9시에서 11시)까지 비산국으로 가서 도움을 주도록
해라."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 자신만의 공간과 시간을 침범해 들어온 그 목소리에
놀라긴 했지만 카이엔은 고개를 들어 확인하지 않아도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 .....알겠습니다."
부정이라는 단어는 존재할 수 없었다. 천오와의 대화는 항상 그런 식이었다.
그는 일방적으로 무언가를 전달하고 카이엔은 그것을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
다. 마음이 이끌리던 그렇지 않던 간에 자신이 선택했으므로 그렇게 할 수밖
에 없다.
" 이번 일이 잘 되면 또 다시 용족의 생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너
를 위해 그림자들이 움직이고 있으니까. 영광으로 여기는 것이 좋아. 그들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요희. 그녀뿐이다."
카이엔은 요희라는 이름을 듣자 온몸에서 알 수 없는 전율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섬뜩한 느낌을 전해주는 그녀의 외모보다도 그녀가 어째서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그것이 궁금했다. 아무리 드문 존재인 교룡이라지만 자
신처럼 강한 힘도 가지지 못한. 그저 교룡일 뿐인 존재에게 어째서 관심을 보
이는 것일까.
어쩌면 천오의 얼굴과 말투에 배어있는 깊은 증오. 자신을 인정하지 않고 깊
은 암흑의 땅 명계에 투신하게 만든 자들에게 보내는 복수의 도구로 자신을
이용하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의 모습을 일부러 찾아내고 이곳
까지 데려왔을 리가 없다.
" 기억하고 있겠지? 달콤한 봉밀의 맛과 같은 생기를...."
깊이 가라앉을 듯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 용족의 생기.......'
카이엔은 아직도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색다른 감각을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
의 손바닥이 어린 용족의 머리에 닿은 순간. 자신의 몸에서 퍼져 나온 기운이
제자리를 찾은 것처럼 용족을 감싸는 모습을. 그때 자신의 손끝을 타고 온몸
으로 퍼져가던 따스하고 그리운 감각을. 마치 부모님의 품안에 감싸여 있던
때에 느끼던 편안함과도 같은 감각을. 마치 그것을 얻기 위해 태어난 것 같았
다. 그 순간만큼은 자신이 누구인지 주위에 누가 있는지 어떤 소리가 울리는
지는 모두 별개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 온 세상이 자신으로 가득 찬 만족감.
그 기억을 되살리자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카이엔은 알지 못했지만 앞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며 천오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 이 곳에는 더 이상 용족의 생기를 필요로 하는 자가 없으니 앞으로 모든
용족들은 네 차지가 될 것이다. 넌 대신 우리가 말하는 대로 움직이면 돼."
" 언제나와 마찬가지....겠지요?"
카이엔은 약간의 망설임을 담아 물었다. 그러나 입가에서 맴도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어째서 명계의 인물들이 하계의 일에 관여하는지 그것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그것은 자신에게도 다른 이들에게도 금기로 여겨졌다. 아니, 자신은
열외의 존재인데다, 이미 그들의 일에 깊숙하게 발을 들여놓았기 때문에 물을
자격이 없는 지도 몰랐다. 처음부터 자신의 존재가 그들에게 어떤 식으로 여
겨지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 넌 네가 하는 일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아도 된다. 그저 내가 가르쳐준
주문을 써서 그들의 적을 없애주면 되. 그러면 넌 용족의 생기를 얻을 수 있
다. 그것만을 생각해라."
마치 주문처럼 울리는 천오의 어조에 카이엔은 언제나처럼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러나 마음 속을 가득 채운 의문은 조금도 사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 * *
" 예의 그....."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카이엔을 조심스레 바라보며 비산국의 대신들은
입을 열었다. 이백년 전 처음으로 비산국이 세워졌을 때부터 위협을 가해오던
동한국(同 國)과의 영토다툼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하자 상대적으로 영
토의 크기도 작고 병력도 부족한 비산국의 왕은 고심하고 있었다. 매일같이
대신들을 모아놓고 대책을 논의해가면서 어떻게 하면 최소한의 피해로 땅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는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했다. 그러나 아무리
서로 머리를 맞대고 생각해보아도 결론은 나질 않았다. 처음부터 동한국은 자
신들에게는 너무나도 벅찬 상대였던 것이다. 지난 이백년 동안 큰 싸움이 일
어나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로.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늦은 밤 고민에 휩싸여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던 비산
국의 왕 환주의 앞에 기이할 정도로 긴 머리카락을 가진 창백한 인상의 남자
가 찾아왔다. 한눈에 보기에도 보통의 인간과는 확연하게 다른 기운을 가진
남자를 보며 환주는 까닭 모를 두려움을 느꼈다. 그러나 자신은 왕. 그것을 겉
으로 나타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 무슨 일인가?"
" 요즘 동한국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제 말을 듣
고 그것을 들어주신다면 이번 전쟁에서 비산국이 이길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
습니다."
환주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기이한 분위기의 남자를 응시했다. 어째
서 이 남자가 자신의 처소에 들어올 때까지 방 밖에 있던 병사들은 아무런 제
재도 가하지 않았을까. 궁 안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곳이 바로 왕의
처소임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마치 소리 없이 스며드는 안개와도 같이 갑작스
레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 제 존재가 궁금하십니까?"
남자는 소리 없이 웃으며 물었다. 그 말을 듣고 환주는 남자의 존재에 더욱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남자는 자신의 마음을 읽은 듯
이 태연하게 말을 꺼내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다 그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인
간과는 확연히 다른 그 기운은 이유 없는 불안을 느끼게 만들었다.
" 인간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천계
나 환계. 천상계에 사는 자는 더더욱 아니지요."
남자의 소리 없는 웃음에 전율을 느끼면서도 환주는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
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항상 그렇다. 인간은 인간이 아닌 존재, 혹은 그 이상의 존재에게 두려움과 적
의를 동시에 느낀다.
" 그렇다면 내가 무엇을 약속하면 되지?"
"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마치 주문처럼 울려 퍼지는 남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환주는 자신도 모르는 사
이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 저토록 어린 자 단 한 명으로 이번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말씀이십
니까?"
카이엔을 처음 본 순간부터 의구심을 지우지 못하고 있던 대신 중 한 명이 불
만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카이엔이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은 들어서 알고 있었
지만 두 눈으로 바라본 그의 모습은 전혀 신뢰감이 들지 않는다. 그것이 자리
에 모인 모든 이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자리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알 수
없는 위압감이 들게 만들었던 그 남자와 달리 카이엔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아
무 것도 없었다. 그저 별다른 표정이 떠올라 있지 않은 어린 얼굴과 남자가
입었던 것과 같은 소매와 옷자락이 긴 옷을 걸치고 있다는 것 외에는.
환주는 자신과 나이 차이가 별로 느껴지지 않는 삼십대의 대신에게 시선을 돌
리며 말했다.
" 그러면 다른 방법으로 승리할 수 있다고 자신하나? 그렇다면 당장 저 자
를 돌려보내도록 하지."
환주 자신도 카이엔의 여린 생김새 때문에 의심이 가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남
자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은 자신이었기에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자 삼십대의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대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
나 얼굴에 떠오른 불만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였다.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그렇지 않으면 불운일까. 어머니가 자신에게 남겨준 여
려 보이는 인상은 인간들에게조차 신용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항상 그랬다.
천오의 명령으로 싸움을 돕기 위해. 아니,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어딘 가로 가
게되면 인간들은 항상 카이엔을 믿지 못한다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냈다.
[ 역천(逆天) 회륜(回輪) ]
한쪽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가는 것을 주시하고 있던
카이엔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작은 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쾅!
평소 때 쓰던 힘의 십 분지 일도 채 되지 않는 미약한 힘을 모아 창을 겨누자
순간적으로 귀를 멍멍하게 만들 정도로 거센 바람소리가 울려 퍼지며 눈에 보
일 정도로 빠르게 소용돌이치는 바람이 창문을 부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마
치 종이를 찢듯이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마치 날카로운 칼날에 난도질당한 것
처럼.
일순간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의심의 눈초리로 카이엔을 두고 숙덕거리던 인간
들은 모두 그 광경을 보았다. 그리고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용족의 존재조차 현실 속에서 본 적이 없기 때
문에 그들이 쓰는 힘이 어떤 것인지. 그것이 어떤 결과를 불러오는지 알지 못
했다. 더군다나 카이엔이 쓰는 힘은 용족이 쓰는 힘을 명계의 힘에 맞추어 변
화시킨 악랄한 주문들이 대부분이었다. 카이엔 자신은 모르고 있었지만.
" 저....저건..."
처음 입을 연 것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카이엔에게 불만을 가진 채 의심스러
운 표정을 짓고 있던 삼십대의 대신이었다. 그는 아직도 눈앞의 광경이 믿어
지지 않는지 눈을 크게 뜬 채 갈기갈기 찢기워진 창문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
다. 본래에는 수명의 장인이 정성 들여 틀 하나 하나에 조각을 해서 만든 창
문이었건만 남은 것은 보기 흉하게 일그러진 나무의 잔해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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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사람의 마음이란...-_-
마감이 다가오니 이번에는 딴 맘 안 먹고 차분하게 연 쓰는데 집중하려 했는
데, 아니나 다를까 갑자기 은의 왕국이 너무너무 쓰고싶어 지는 겁니다. 전 또
성격이 이상해서 하고 싶은 거 안하고는 못 배기죠. 결국 조금 썼더니 연은
별로 못 쓰고 말았습니다. 원래 오늘은 두편 올리려고 했었는데...T^T
오늘은 갑자기 너무 피곤해서 자꾸 잠이 오네요. 밤 새워서 뒷 이야기 다 쓰
려고 하는 중인데. 그래서 일부러 집에도 안가고 사무실에서 글 쓰는 중입니
다. 그렇지만 눈이 자꾸 감기니 이를 어쩌리오....
[번 호] 7168 / 7360 [등록일] 2000년 03월 23일 00:13 Page : 1 / 10
[등록자] 까망포키 [조 회] 128 건
[제 목] [흑룡의 숲 2부] 연(緣)... - 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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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룡의 숲 제 2부 >
연(緣)...